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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윤 Mar 01. 2024

세 대의 카메라, 4일의 밴쿠버 #4

Last Day(Day-4)




나와 D는 전날 밤 침대에 누워 몇 시에 체크아웃을 할지 고민했다. 10시도, 11시도 아닌 무려 12시까지 머물 수 있었던 호텔 규정 덕분에 다양한 옵션을 가지고 있었던 우리는 하루 남은 화창한 밴쿠버를 최대한 쥐어짜내듯 즐길까도 했지만, 이내 둘 다 너무 지친 상태로 돌아다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라 판단해 최대한 늦게 방을 나서기로 결정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매우 좋은 선택이었던 게 분명했다. 아침에 일어나 확인한 내 양쪽 발가락들은 눈에 띄게 부어서 다시 딱딱한 부츠 안으로 쑤셔 넣기가 힘든 수준이었고, 결국 비상용으로 가져왔던 슬리퍼와 함께 마지막 날을 시작해야만 했다.







셋째 날과 마찬가지로 하늘은 매우 맑았지만 조금 더 거센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닥쳤다. 아무리 캐나다에서 겨울 시즌 평균기온이 높은 곳 중 하나가 밴쿠버였을지라도, 2월 중순 해안가에서 다가오는 풍력은 상상 이상의 수준으로 강력했다. 점심을 먹으러 차이나타운보다 약간 더 떨어져 있던 재팬 타운에 가기 전, D가 어제 보지 못했던 캐나다 플레이스 주변을 둘러보고 싶다 해서 다시 그곳을 들렀다. 한창 점심시간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건물 안팎으로 원하는 메뉴를 얻기 위해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우리는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전망이 좋은 곳으로 향해 사진을 몇 장 찍고 분주함이 한풀 꺾인 보도를 통해 미리 찾아놓았던 식당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당연히 나는 D의 의견을 믿고 따랐다. 







우리의 본래 목적은 '사진'을 찍기 위해 온 것이었으므로 길을 걷는 그 잠깐의 여유에도 부단히 양손과 눈을 움직였다. East Hastings와 Powell Street 중간에 위치했던 거리여서 전반적인 모양새나 분위기도 딱 이 두 스트리트의 교착점에 놓여있는 듯 보였다. 밝은 날씨와는 조금 안 어울렸다는 게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짧은 여행에서 100% 본인의 의도대로 되길 바라는 것만큼 미련한 생각도 없을 것이다. 얼마나 더 가야 되냐는 나의 물음이 끝나자마자 그늘에 가려진 어두운 톤의 레스토랑이 모습을 드러냈고, 우리는 빈자리가 여럿 보이는 것을 밖에서 확인하자마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메뉴 골랐어?"



"난 이미 정하고 왔지. 일본식 오믈렛이 내가 이 가게에 오려했던 목적이었으니까. 너도 같은 메뉴로 먹는 거 어때?"



"나도 그럴까 했는데, 여기 밑에 고등어 구이가 있는 걸 보자마자 생각이 확 바뀌었어. 1년 동안 가장 그리웠던 음식 중 하나였는데 상당히 기대가 되는군." 




제대로 익혀진 고등어 한 마리와 레몬 반 개, 그리고 작은 크기의 밥 한 그릇이 전부였던 심플한 메뉴였지만 맛은 기대 이상으로 나를 만족시켰다. 확실히 한국과 마찬가지로 물가가 근처여서 오는 이점이 매우 큰 듯했다. 아무 생각 없이 왔던 나는 이번 여행에서 먹었던 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식사를 했는데, 정작 D는 기대한 것에 비해서는 실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전날 저녁으로 훠궈를 거하게 먹어서 둘 다 더 이상 들어갈 배가 없다고 했었지만 또 막상 단출한 식사를 하고 나니 아쉬움이 생겼는지 근처에 있던 베이커리로 곧장 이동해 서너 가지 빵들을 사서 입에 쑤셔 넣었다.







외형이 조금 특이하게 생긴 센트럴 도서관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밴쿠버 다운타운과 작별을 고했다. D는 얼마 안 가 여자친구와 함께 결혼식 하객으로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장소였다. 4일 동안 많은 시간을 이곳에 할애하지는 않았음에도 심취한 것을 넘어 중독 수준으로 도심지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그 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왠지 모르게 조금의 씁쓸함이 마음에 맴돌았다. 공항에 가기 전 마지막 장소로 꼽은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로 가기 위해 승객들로 빽빽하게 들어찬 버스에 40여 분 정도 몸을 싣고 나서 캠퍼스를 마주할 수 있었던 우리는 바로 앞에 있던 카페에 곧바로 들어가 반 이상 맛이 간 몸에 카페인을 수혈했다. 말수가 많았던 D와 어색함을 깨기 위해서라도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던 나도 이 때는 서로 아무 말 없이 진한 블랙커피만을 들이켤 뿐이었다. 



입구 쪽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가자 양 옆으로 길게 뻗은 길이 나왔고, 우리는 우측으로 가서 뷰포인트로 만들어 놓은 곳에 잠시 들른 뒤 바로 옆 작은 갤러리 건물로 들어가 전시를 관람했다. 컨템퍼러리 아트와 사진전이 반반으로 나뉘어서 동시에 전시 중이었고, 나는 몇몇 작품들은 익숙했지만 이름은 익숙지 않았던 한 사진작가의 슬라이드 쇼에 빠져들어 구형 코닥 프로젝터의 넘버가 1에서 마지막 순번인 84가 될 때까지 한동안 자리에 앉아 집중해서 사진들과 글귀를 쳐다보았다. 당시에는 캐치하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니 전반적인 일상 속 모습들과 과격한 이벤트들이 섞인 기록들을 보면서 내가 1년 간 캘거리에서 행했던 것과 상당히 궤가 비슷해 더욱 주의 깊게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았다.








"이제 해변가로 내려가면 딱일 것 같은데?"



"?? 학교 안에 그런 게 있어?"



"나름 유명한 장소야. 근데 조심해. 누드 비치니까."



"그러면 사진도 제대로 못 찍겠네 쩝." 



"그냥 참고만 해 친구. 어차피 지금은 추워서 다들 단단히 둘러매고 있을 테니까." 




캠퍼스 안에 해변가라니! 건물을 빠져나와 그가 말해주기 전까지 아무런 정보도 없었던 나는 이 말 한마디에 피곤함이 약간 사그라들었다. 그만큼 '해변' , '바닷가'라는 단어는 언제나 나에게 단어적 낭만과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더 나아가서 왜 학생들이 해가 저무는 시간에 캠퍼스 밖이 아닌 안쪽 보행로 쪽으로 가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단번에 타파할 수 있었다. 외곽 도로에 다다라서 나무로 된 수많은 계단들을 하나씩 밟아 내려가다 보니 우거진 수풀의 프레임 안으로 사람들의 실루엣과 넓은 바다가 보였고, 나는 뒤에서 내려오고 있던 D를 제쳐두고 곧장 신발이 물에 닿는 곳까지 내달렸다. 수평선보다 약간 위에 걸쳐있던 태양을 마주 보고 한 컷, 그리고 조금 숨을 돌린 뒤에 좌측에 기다랗게 놓여있던 바위길까지 걸어가서 또 한 컷. 양말 안쪽과 슬리퍼 사이사이로 들어온 모래들 때문에 양 발은 상당히 깔끄러웠지만 추위도 잊은 채로 수영복을 입고 해변가를 내달리고 있던 몇몇 친구들처럼, 나 또한 모든 걸 내려놓고 마지막 날의 클라이맥스를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또 다른 기념사진을 남겨야겠다 싶어 D가 앉아있던 곳으로 간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두어 장의 셀카를 찍었다. 카메라로 수만 장의 사진을 찍었음에도 이건 또 다른 영역처럼 느껴져서인지 내 얼굴은 프레임에 반 정도 잘려 들어갔지만, 우리는 그런 못난 컷들을 보고도 "아티스틱하다"는 말로 포장을 하며 기분 좋게 마무리를 했다. 태양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나서도 몇 분 정도를 더 있다가 다시 짐을 챙겨 계단을 올라 아까와는 조금 다른 위치에서 버스를 탄 우리는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에 도착해 열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아 D는 햄버거 세트로 저녁을 해결했고, 나는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게 없어 아까 사놓은 생수병을 모조리 비워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게이트 근처에 다다라서는 백팩 부피를 줄이기 위해 그의 짐 일부를 내가 건네받아 추가요금을 내지 않고 무사히 기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4일 동안 수많은 모습들의 밴쿠버를 눈과 카메라, 그리고 마음에 담고서 다시 캘거리 공항으로 돌아갔다.




체크인 장소로 빠져나와 시간을 확인했다. 밤 11시가 조금 넘은 상태였다. 담배 좀 피고 가자는 D의 말에 외부 흡연장으로 나간 우리는 곧바로 쌀쌀함을 넘어서는 매서운 추위를 맞이했다. 근래에 또 눈이 왔었는지 공항 곳곳에는 하얗게 색이 입혀져 있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 어떠셨수?"



"두말할 것도 없이 최고였지. 너네가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지 뭐."



"별말씀을. 당연히 주인공이 제대로 즐겨야지. 크게 만족하는 것 같아 나도 기분이 좋구먼."




다시 안으로 들어가 각자의 집 주소를 도착지로 택시를 불렀고, 잠시 뒤 D는 다른 게이트 쪽에 도착해 있는 것 같다면서 나에게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조만간 또 보자며 손을 흔들고 점점 멀어져 갔다. 얼마 안 가서 나도 차량 보조석 시트에 앉아 한껏 익숙해진 도로를 따라서 작년부터 머물고 있던 집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이불을 뒤집고 방에 켜진 불을 끄고 싶었지만 수많은 젖은 빨랫감들과 기름진 머리, 그리고 백업 없이 담겨 있던 데이터들을 외면하고 눈을 감기에는 나에게 있어 너무나 중요하게 여겨졌던 야간의 과업들이었기에, 몰려오는 피곤함과 귀찮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조금 더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세 대의 카메라, 4일의 밴쿠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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