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장소들의 재구성, 그리고 낯선 곳에서의 발견이 담긴 일주일의 기록
'한국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들'이라는 제목과 함께 나열되어 있던 리스트의 모든 항목들에 줄이 그어지자 나는 비로소 내용물 없는 빈 깡통처럼 소란스러웠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비록 그 낮아진 감정의 파도는 24시간이 채 안 되어서 두 달여 정도 할 수 있는 단기 알바 자리를 하루빨리 구해야 한다는 조바심과 함께 곧바로 사라졌지만 말이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최근 3년간의 내 인생은 늘 이런 끊임없는 감정의 오르내림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자각할 수 있었는데, 모국에 돌아와 한순간에 들이닥친 편안함에 잠시 그 배경을 잊었던 것뿐, 나의 삶이라는 피사체의 주변에는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보이지 않는 아우라처럼 굳건히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중이다.
한 가지 고해성사를 하자면, 급히 뛰어가던 내 머릿속과는 다르게 몸은 늪에 빠진 것 마냥 설렁설렁 움직였다. 여러 사이트들에 올라온 구인공고 글들을 매일 뒤져보기는 했다만, 너무 재지도 따지지도 않고 적당히 할 만한 일들에 모두 지원하기 버튼을 누르고는 "곧 연락 오겠지~"라는 조금은 안일한 생각을 가진 채로 가방에 카메라를 챙겨 평일/주말 가릴 것 없이 매일 밖으로 나갔다. 날로 먹고 싶었다는 마음도 한가득이었지만 안 해본 종류의 일을 꼽는 게 더 어려울 만큼 과거부터 쌓여 온 경험들 덕분에 나온 배짱이 더 크게 이런 스탠스를 취하게 했으리라. 나의 이야기 대부분이 결과론에 입각해 꺼내어져 나오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현재 나는 일을 하고 있고, 이 글에 맞는 사진들까지 잔뜩 얻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한 셈이 됐다.
일주일 동안 다녔던 지역은 상당히 다양했다. 내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파주, 동대문을 중심으로 한 서울의 거리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새롭게 놓인 구간 덕분에 차량 없이도 왕래가 수월해진 인천,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년부터 들었던 소문에 의해 정보를 기억해 두었던 화성의 대성당까지. 다행히 100% 뚜벅이로 움직였던 이 주간에는 서울로 향한 하루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세먼지 없는 맑은 날씨와 동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위험한(?) 변수를 집어넣었다. 바로 6개월 정도 잠들어있던 필름 카메라를 다시 드라이 캐비닛에서 꺼내 들은 것. 캘거리에서 쓰다 남은 4개의 롤이 남아있었던 터라 두 종류의 흑백필름을 끄집어 내 하나는 곧바로 장착, 다른 하나는 예비용으로 가방 안쪽 작은 주머니에 넣었다. 내장 노출계도 없고, 거기에 28mm 화각에 맞추어져 있었던 내 눈에 갑자기 50mm 화각이 달린 카메라 뷰파인더를 들이대니 그렇게 프레임이 좁아 보일 수가 없었다.
불안했다. 괜히 새로운, 아니 무리한 시도를 해서 시간과 필름 모두 날릴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저 아래 단전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와 몸 전체를 감싸기 일보 직전이었다. 결국 장고 끝에 대안이라고 하기도 뭐 한 대안을 세웠다. 서울과 인천은 필름으로, 파주와 화성은 디지털로 찍기로. 필름은 감도가 고정되어 있기에 실외를 주로 가는 날에 드는 게 좋겠다는 게 본인의 생각이었다.
부산 여행 때처럼 이번 여정에도 그렇게까지 뚜렷한 목표의식은 지니지 않았지만, 내심 궁금했던 한 가지가 있었다. 과연 나의 눈은 과거에 헤맸던 때와 달리 화각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발전했는가? 가 바로 그 물음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미 여러 차례 다녀왔던 곳을 포함시켰던 것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 더 명확히 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일종의 기출변형 문제였다. 이제 내가 2개의 화각의 렌즈를 각각 사용할 때마다 고려해야 될 부분들에서 조금 차이를 둘 수 있을 정도라면 늘 겹겹이 올려져 있던 내 실력에 대한 의구심 또한 한커풀 정도 벗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또한 이런 챌린지(?)를 겪으면서 공통적으로 경험한 2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진의 수량에 집착하기보다는 완벽한 한 컷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그리고 카메라가 손에 들려있지 않은 순간에도 스마트폰을 꺼내 들기보다는 지나가는 일상들의 장면을 유심히 관찰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집 근처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예시로 들어볼까 한다. 햇빛이 강하게 비추었던 날 나는 버스를 타고 출판단지 안쪽에 위치해 있던 한 아트 뮤지엄을 방문했는데, 이미 내/외부 구조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1시간마다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향해 구도를 잡았고, 가장 적절하다 싶은 시간에 사진 다섯 장을 찍었다. 커피 한잔과 주변에 놓여 있던 샘플 북들 덕분에 기다리는 텀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마냥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었다. 나에게 촬영은 계속해서 발을 굴리며 재미있는 순간들을 포착하는 행위였는데, 캠핑 의자에 앉아서 낚싯대 하나를 드리우고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 듯했던 이 방식은 상당히 어색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이따금씩 이런 시간을 겪을 때마다 배우는 점이 많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특히나 흑백사진을 주로 찍는 내 입장에서 빛에 대한 이해와 구도적 고민은 필수적이었기에(컬러 사진도 마찬가지겠지만 아무튼..) 맛이 쓰다는 것을 알아도 주기적으로 복용을 해 주어야만 했다. 이번에도 아주 적절한 시기에 삼켰다고 생각했다. 근래 들어서 내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건지, 기관총을 쏘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기기적 성능을 무분별적으로 남용하는 게 아닌가에 대한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1년에 좋은 사진 한 장만 건져도 성공적이라고 했던 카르티에 브레송의 말이 이제는 그렇게까지 멀게만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그래도 디지털 시대에 한 장은 쪼금 부족하다고 봐야 하는 게 아닐지?!)
이전처럼 차를 끌고 다니던 때와는 달리,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기록의 시작점이 '목적지'가 아닌 '목적지와 그에 다다르기까지 걸린 모든 시간'으로 변모한 것에 대해서도 나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특히나 익숙하지 않은 화각을 쓸 때마다 절댓값으로 가져가야만 했던 일정량의 소요시간이 반드시 필요했고, 이런 요소 때문에라도 시시각각 바뀌는 장소들이 가진 환경적 특성들을 캐치하는 데 더더욱 집중해야만 했다. 하루의 마지막 포인트가 월미도를 향하고 있더라도, 가장 만족스러운 사진은 차이나타운, 심지어는 공원을 들어서기 전에 마주하는 파도의 주름들이 될 수도 있으니까. 좋게 말하면 집중이고, 조금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매사 신경을 곤두세운 상태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지만, 현재의 나는 이 부분을 좋은 방향으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는 중이고, 실제로 이에 따른 효과가 사진들에 고스란히 묻어져 나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끊임없이 여러 레퍼런스들을 뒤져보면서 나의 눈을 연마하고 있지만 이 당시에는 하루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머릿속에 점차 구색이 갖추어져 가는 게 체감이 될 정도였다. 대전제는 항상 그렇듯 일반적인 시선에서 아주 조금 다른 느낌의 사진을 만들어보자였지만, 광각에 속한 28mm를 쓸 때는 전체 면을 조화롭게 담으려 했고, 타이트한 50mm를 들었을 때는 부분과 디테일적인 면을 살려 절묘한 사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론적인 이해보다는 나의 주관적이고 자유로운 해석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지만 확실한 건 나는 이 한 주의 과정을 통해 작년과는 다른 배움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또다시 습득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배배 꼬여있던 생각들을 상당 부분 덜어내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본격적으로 달릴 준비를 마쳤다.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다가온다. 8개월 여 정도 남은 2024년의 여러 날들 동안 수없이 만족과 의심의 너울들을 맞이할 게 분명하지만, 확실한 것은 과거보다는 그 속에서 덜 허우적거릴 것이다. 그만큼 설정해 놓은 도착지점이 현재 나의 마음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준비물들도 잘 구비하고 있는 중이니까. 다시 날이 추워져 눈이 소복이 쌓인 날 이 글을 들추어 볼 때 나 자신이 환하게 웃고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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