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되게 만드는 사람 (Enabler)

직군, 연차, 경력과 상관없는 유일한 평가 기준

by 백승엽

제 경력의 어느 순간인가부터... 제가 해본 적이 없는 직무의 사람들을 채용하고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략, 사업개발, 재무를 주로 해왔던 사람인데 개발자를 채용하거나, 마케터를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경험이 더 많은 분에 대해서도 감히 평가를 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처음에 그런 경험을 하게 될 때는 당혹스럽고 어려운 경우가 많았는데, 어느 순간인가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저는 제가 해보지 않은 일, 잘 모르는 영역들에 대해서 누군가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떤 근거로 이 사람은 채용해야 한다, 잘하는 사람이다, 더 많은 보상을 해야 한다, 이 정도 일은 맡길 수 있다는 판단하게 되는 것일까요?


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다른 리더 / 임원 / 경영진 / 대표들도 왠지 비슷한 잣대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글로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이런저런 기준들을 다 걷어내고 한 마디로 정리를 해보면 '이 사람이 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감각입니다.

(팀원들에게는 어찌 보면 미안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어떤 사람이 이 일에 적합한지, 혹은 뛰어난지에 대해서 판단할 때... 그 사람이 가진 여러 가지 역량, 장점과 단점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고려하기보다는... '이 사람이 이 일 해낼 수 있을까?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라는 단순하고도 감각적인 질문에 의존하게 되곤 합니다. 그 사람이 몇 년차이고, 어떤 직군인지 등은 사실 뒷전입니다. 저는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고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채용해야 하고, 그런 사람에게 일을 맡겨야 하고, 그런 사람에게 보상을 해야 하니까요.

분야와 상관없이 오롯하게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 일이 무엇인지 상관없이 일을 맡기게 되고, 좋은 평가를 하게 되고, 채용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에이스가 되면 일이 늘어난다'는 말도 그래서 나오게 되는 것 같고요.


결국 '일이 되게 만드는 사람인지'가 누군가를 평가함에 있어 마지막에 남는 단 하나의 질문입니다.

그 질문을 통과할 수 있다면, 갑자기 디자이너가 사업을 이끌기고 하고, 전략 담당자였다가 인사를 총괄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엉뚱한 의사결정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을 맡기는 리더나 경영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납득이 되고 자신감을 가지고 내린 의사결정일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이 문제를 해결해 내고 일이 되게 만들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니까요.


** 제가 제목에 Enabler라고 써놓았는데, 정확한 영어 뉘앙스로는 Enabler는 조력자나 안 좋은 행동을 조장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일이 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the Closer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는데 원래의 제 의도에는 그 단어가 더 적합한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제 콩글리쉬 기준으로는 Enabler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굳이 수정하진 않고 두었습니다



#1. '로리 골러'와 '셰릴 샌드버그'

Meta의 Chief People Officer였던 로리 골러가 처음 Meta (당시 페이스북)에 조인할 때, 당시 COO인 셰릴 샌드버그에게 이런 말을 하고 채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밤잠을 설칠 정도로 고민하는 문제가 무엇인가요? 제가 그걸 해결하겠습니다." (What is your biggest problem and how can I solve it?)

당시 로리 골러는 마케팅과 전략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아온 상태였고, 셰릴 샌드버그의 가장 큰 고민은 인사(HR) 분야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로리 골러는 과감하게 해낼 수 있다고 했고, 셰릴 샌드버그는 이를 맡겼습니다. "이 사람이라면 분야와 상관없이 해낼 수 있다"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도 해냈기에... 단순히 채용이 되는 것을 넘어 16년간 Meta에서 일하면서 Chief People Officer까지 올라갈 수 있었겠죠.

image.png 로리 골러(Lori Goler, Meta의 전 Chief People Officer)


#2. '레브잇'의 Problem Solver

'올웨이즈' 서비스를 운영하는 '레브잇'이라는 스타트업에서 직무 구분 없이 "Problem Solver"라는 명칭으로 사람을 채용하던 것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채용 플랫폼 '원티드'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에 채용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저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실패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레브잇의 고민과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오히려 이해가 되고 의미 있는 방향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역량과 열정,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분야가 무엇이든지, 과거 어떤 경력을 가졌는지와 상관없이 결국 문제를 해결할 테니까요.

(제 생각이 바뀐 것과는 반대로, 지금 레브잇 채용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여느 회사들처럼 직무별로 채용을 하고 있네요.)


#3. AI 시대와 Enabler

최근의 트렌드들과 결합하면서 앞서 말한 경향이 더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좋지 않은 경기와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기업은 한 명의 담당자가 여러 가지 일을 해결해 내길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담당자가 원래 무엇을 해왔고 직무가 무엇이었는지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있는지가 중요하게 되었죠. 게다가 AI가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이 AI의 도움을 받아서 생소한 분야의 일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런트엔드 개발자-백엔드 개발자의 경계, 브랜드마케터-퍼포먼스마케터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고, 더 나아가 아예 직무 구분의 의미가 옅어지고 있습니다. 마케터, 사업개발자, 전략가의 경계가 없어지고, 기획자와 디자이너, 개발자의 구분이 점점 더 의미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AI로 인해 앞으로 점점 더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래 그 역량을 가지고 있건, AI의 도움을 받건 상관없이 결국에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성과가 어땠는지만 남는 것이죠. 과거에는 기술(Skill)이 진입장벽이었다면, 이제 AI가 그 장벽을 허물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도구를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어떤 기술을 써서든 결국에는 문제를 해결해 내는 그 행위 자체인 것 같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결국 우리가 누군가를 평가할 때 마주하는 마지막 질문은 하나입니다. '이 사람은 일이 되게 만드는 사람인가?'

그동안 쌓은 기술과 경험, 역량과 이력들은 결국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한 힌트일 뿐인 것 같습니다. 당장 저부터도 스스로에게 묻게 되네요. 저는 지금 저에게 주어진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낼 수 있는 사람일까요? ㅎㅎㅎ 부디 제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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