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수령
아침 등원길에 둘째에게 물었다.
"하늘아, 빛이언니 저번에 여권 만든 거 오늘 찾으러 가는 날인데 같이 갈래?"
"응!"
"그럼 너 점심만 먹고 평소보다 유치원에서 일찍 나와야 하는데 괜찮겠어?"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하늘인 두 눈을 뒤집어 까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막상 첫째와 여행을 가기로 결정하니 둘째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차라리 자기도 같이 가고 싶다고 떼를 쓰면 덜 미안할 텐데, 아직 초등학생이 아니라서 못 간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5살 아이가 뭔가 더 짠하다.
하늘이와 함께 할 다음 여행을 위해, 준비하는 분위기라도 경험시켜주고 싶었다. 여권도 찾고, 한강버스도 타고, 맛있는 간식이라도 먹으며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기로 했다.
빛이의 하교시간에 맞춰 하늘이도 유치원에서 데리고 나왔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하늘이의 화려한 치마에 사람들의 시선이 꽂힌다.
"와아. 너 진짜 예쁘다!"
저 멀리 지나가는 트럭에서조차 창문이 열리더니 아저씨 한 분이 하늘이에게 엄지척을 날리며 소리친다. 하늘이도 그 상황을 충분히 즐기는 듯하다.
빛이와 둘이 여권 신청하러 갔던 길을 지금은 하늘이까지 셋이 간다. '다음엔 하늘이 여권을 만들러 이 길을 또 가겠지.' 생각하며 버스에 올랐다.
"아빠, 나 한강버스 타고 싶어."
빛이가 뜬금없이 한강버스 얘기를 꺼낸다. 난 오늘 '한강버스'라는 말을 입밖으로 꺼낸 적이 없는데 내 계획을 어떻게 알았을까. 마음을 들킨 것 같아 화들짝 놀랐다. 말하고 있는 빛이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버스 벽면에 한강버스 광고가 붙어 있다. 도둑은 늘 제 발 저리는 법이다.
"와. 안그래도 아빠가 너네 오늘 한강버스 태워주려고 했는데 마음이 통했네?"
그냥 던져본 말이 즉시 이루어지자 빛이와 하늘인 앉은 자리에서 방방 뛰며 신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빠가 한강버스 어떻게 생겼나 사진 보여줄까?"
휴대폰으로 한강버스 홈페이지에 들어가는 순간, 버스 안의 난방이 냉방으로 바뀌듯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한강버스 지금 고장나서 안 한대."
아이들의 기대 가득했던 표정은 금세 아쉬움으로 변했다. 나 역시 이 상황이 무척이나 안타까웠지만, 선착장까지 가서 허탕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혹시 다른 데 가고 싶은 곳 있어?"
"스타벅스!"
하늘이가 주저없이 대답한다. 평소 그리 자주 가지도 않는 곳인데 저렇게 바로 내뱉는 걸 보면 최근에 누구한테 스타벅스 얘기를 들었나 보다.
"그럼 이따 여권 찾으면 스타벅스 가서 젤리랑 빵이랑 먹을까?"
물건너간 한강버스는 그새 또 잊히고, 아이들의 머리속은 다시 스타벅스 젤리와 빵으로 가득 찼다. 이렇게도 쉽게 마음이 바뀌는, 아이들은 참 신기한 존재다.
구청에 도착했다. 불과 열흘 전 왔을 때 없었던 트리가 생겼다. 아이들과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잠시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빛이는 한 번 와봤다고 힘찬 발걸음으로 하늘이의 길을 인도한다. 대기가 2명 밖에 없어서 거의 바로 받을 수 있었다. 딸의 생애 첫 여권을 받아 드니 왠지 모르게 경건해진다. 꿈같다.
나도 이제 저 파란 여권을 써보고 싶은데, 지금 쓰는 초록이가 아직 3년이나 남았다.
"환승입니다!"
여권을 손에 쥐고 나와 스타벅스행 버스에 오르니 경쾌한 기계음이 우릴 반긴다. 그렇게 오늘 두 딸과의 데이트는 '한강버스' 대신 '한라봉젤리'로 마무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