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루트 짜기
생각지 못했던 막내의 입원으로 2주간의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퇴원 후에도 여전히 손이 많이 가서 시간의 틈이 잘 안 보인다. 덕분에 첫째 딸과 아주 여유롭고 우아하게 하나씩 준비하려던 여행 계획은 자연스레 변경당했다.
여행 출발까지 이제 보름 정도 남았다. 현재까지 준비된 건 비행기 티켓과 여권, 외국에서 쓸 신용카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 정도?
'조금 빠르게, 하지만 여전히 우아하게'쯤으로 일단 계획을 변경하기로 한다.
'뭐부터 해야 하지?'
캐나다와 미국 여행 허가도 받아야 하고, 숙소도 예약해야 하고, 현지 정보도 좀 알아봐야 하고... 그러고 보니 여행 루트도 아직 안 짰다. 무턱대고 구글지도를 펼치며 빛이에게 물었다.
"너 미국이랑 캐나다에서 가보고 싶은 데 있어?"
"난 자유의 여신상 보고 싶어. 나이아가라 폭포도 갈 수 있어?"
물론 못 가는 건 아니다. 근데 하필 동쪽 끝? 빛이가 말한 대로라면 이 정도 루트가 나올 것 같다.
"빛이야, 우리가 갈 밴쿠버가 여기 서쪽 끝에 있거든? 근데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뉴욕은 여기 동쪽 맨 끝에 있어. 그리고 나이아가라는 여기 토론토라는 도시에서 가까운데, 찾아보니까 밴쿠버에서 토론토까지만 가도 비행기로 5시간 정도 걸려. 괜찮겠어?"
"아, 그럼 안 갈래. 너무 멀어."
의외로 쉽게 포기한다. 그렇게 1번 루트는 땡!
"난 우주과학자가 될 거야."
빛이는 요즘 '우주의 신비'라는 책에 빠져 있다. 엄청 크고 무거운 책이라 꽤나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책에 나온 그림을 보고 그리거나, 소제목을 따라 쓰기도 한다.
"나 오로라 볼래!"
그런 빛이가 캐나다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말에 완전히 꽂혔다. 의지가 너무 확고해서 현실적으로 오로라를 보러 갈 수 있는지 방법을 알아봤다.
오로라를 보려면 '유콘' 지역의 '화이트호스'라는 도시로 가야 하는데 비행기로 2시간 반 정도의 거리다. 위도상으로도 한참 올라가고, 내륙이면서, 밤늦은 시간에 봐야 한다.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추위'다.
"빛이야, 우리가 오로라를 본다고 하면, 지도에서 여기로 가야 하는데, 이쪽은 영하 20도 이하로 내려갈 만큼 막 엄~청 춥거든? 근데 괜찮겠어?"
"어. 괜찮아. 따뜻하게 입으면 되지~"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영하 20도'가 마음에 와닿을 리 없다. 추위 따위는 오로라 사진의 '예쁨'에 바로 묻혔다. 재빨리 다른 핑계를 찾아야 했다.
"여긴 사람들이 자주 안 가는 지역이라 비행기 값도 비싸고 비용이 좀 많이 들어. 그리고 우리끼리 오로라를 찾아다니는 게 쉽지 않거든? 그래서 투어도 신청해야 돼. 거기에 돈 다 쓰면 우리 먹는 것도 줄여야 하고, 너 좋아하는 놀이기구 같은 것도 별로 못 타는데 괜찮아?"
"어. 괜찮아. 다른 걸 아끼면 되지이~"
내가 말하면서도 약간 치사하다고 느꼈으나 정작 빛이는 끄떡도 없다. 아직 경제적 개념이 크게 없는 아이의 머릿속엔 오직 '오로라' 뿐이다. 3차 시도에 들어간다.
"근데 너 평소에 밤 9시에서 10시면 잠들잖아? 오로라 보러 가려면 출발을 밤 10시에 해서 새벽 2시까지 보고 돌아온대. 그때만 오로라를 볼 수 있거든. 춥고 졸려서 못 보는 거 아니야?"
"쪼끔 늦게 잘 수 이써어! 오로라아~ 오로라아아아~~"
저렇게 오로라 노래를 부르는데 보여주고 싶지 않은 아빠가 어디 있겠냐마는, 문제는 체력이다. 이 아이의 놀이터체력이 끝판왕인 건 나도 인정하지만, 여행체력은 분명 또 다른 얘기다. 오로라를 찾아 나서는 만 7세 아이의 패기가 짜증으로 돌아올 그림이 눈에 훤하다.
"일단 알겠어."
설득에 실패한 아빠는 우선 한 발 물러서기로 한다.
다음 날,
빛이가 엄마와 놀이동산에 다녀왔다. 평소에도 엄마와 자주 하는 데이트지만, 방학을 맞이해서 오늘은 특별히 야간 퍼레이드까지 보고 왔다. 저녁 10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빛이의 눈에 피로가 가득하다. 지칠 대로 지친 빛이가 집에 들어오며 말한다.
"아무래도 오로라는 힘들겠어."
스스로 느껴서 다행이다. 그렇게 두 번째 루트도 패스!
"빛이야, 너 수상비행기는 어때?"
"그게 뭔데?"
난 빛이가 혹할 만한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이거 물에 떠서 출발하는 비행기인데 밴쿠버에서 탈 수 있대."
"진짜? 그런 게 있어? 좋아!"
사실 설명하고 있는 내가 더 기대된다. 원래 가격대가 조금 있지만 비수기인 데다 미리 예약하니 생각보다 훨씬 저렴하다. 게다가 오로라를 포기함으로써 비용적으로도 여유가 확 늘어났다. 그리고, 수상비행기 하나를 결정하니 여행루트도 자연스레 완성된다.
밴쿠버에서 수상비행기를 타고 우선 '빅토리아'라는 도시로 떠나 3일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후 빅토리아에서 다시 수상비행기로 미국 '시애틀'에 갈 예정이다. 저 작은 비행기로 국경을 넘어 시내 한복판에 있는 호수 위에 내린다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빛이야, 미국 시애틀 갔다가 다시 밴쿠버로 돌아올 땐 육로로 올 거야.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차를 타고 다른 나라로 넘어가지 못하잖아? 근데 미국에서 캐나다로 갈 땐 기차나 버스를 타고 나라를 넘을 수 있거든? 둘 중에 뭐가 좋아?"
"난 기차!"
빛이의 한마디에 돌아오는 길은 4시간의 기차여행으로 결정됐다. 그렇게 캐나다와 미국에서 보낼 17일간의 일정 중 12일의 큰 그림이 그려졌다.
'그럼 남은 5일은?'
가서 정하련다. 혼자 가는 여행이었으면 70% 이상은 현지에서 결정했을 테지만, 이번엔 벌써 70%는 정해진 느낌이다. 나머지 30%만 여유와 변수로 남겨두려 한다.
아이와 둘이 떠나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한 모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