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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국도 순례길 완주 5-5
밝고 가벼운 북파랑길

7번 국도 순례길 5-Day 5. 영일대 해수욕장~칠포항 16.5km

by 일곱째별


밝고 가벼운 북파랑길

2024년 1월 27일 토요일 도보순례 다섯째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채비했다. 오늘만큼은 꼭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준비를 다 하고 나가려다 일출을 본 후 조식을 하고 나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샤워한 후 옷을 입으려고 거울을 보았다. 근육도 살집도 없는 깡마른 사람이 서 있었다. 하도 말라 복근이 보이는 듯했다. 옷을 하나하나 겹쳐 입으니 좀 두둑해 보인다.


영일대 해수욕장 모래에 서서 일출을 기다렸다. 사람들이 꽤 나와 있었다. 해변 걷기 운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7:33 붉은 기를 머금은 하늘을 뚫고 바다에서 해가 올라왔다. 날이 맑아 2분 간 일출 과정을 다 볼 수 있었다.


영일대 밝은 해야


2020년 2월 울진 나곡에서도 보았고, 그해 7월 강릉 등명해변 지나서도 보았던 일출을 당당히 혼자 보았다. 비장함은 없었다. 결연함도 없었다. 그저 어제 떴던 해가 오늘 뜬 것이고 별일 없으면 내일도 뜰 것이다. 하지만 혼자 시작하는 아침에 해를 기다려 일출을 찍은 날은 닷새의 도보 순례 날 중 최초였다. 뿌듯했다. 몰렸던 사람들이 흩어지고 나도 길 건너 호텔로 들어왔다.


아침이 되자 네 군데의 숙박 시설 중 최초로 조식이 제공되는 턱에 전날의 불평은 쏙 들어갔다. 토스터에 식빵 네 조각을 넣었다. 2인 1실에 1인이 잤으니 2인분을 먹는다고 해서 염치없지 않다. 콘푸레이크에 우유를 붓고 오렌지 주스를 따르고 연한 아메리카노를 받았다. 버터와 딸기잼도 두 개씩 챙겼다. 토스터에서 식빵이 올라오자 종이 접시에 담아 아슬아슬 방으로 올라왔다.


7:47 우유와 콘푸레이크를 먹고 식빵 한쪽에 버터를 바르고 잼을 짜서 다른 한쪽을 붙여서 먹는다. 평소에는 한쪽이면 양이 차지만 도보 순례하는 날엔 많이 먹어두어야 한다. 다 먹고 마시고 나서는 남은 식빵에 버터와 잼을 발라 딱 붙였다. 그리고 종이접시를 양쪽으로 덮은 다음 손수건으로 쌌다. 점심식사 완성. 독일 본 호텔의 성대한 조식은 아니지만 소박하게 두 끼를 해결할 수 있다니 흡족했다.


숙소를 둘러보니 양포항에선 정신없이 어질러있던 짐이 구룡포에서도 여전하더니 흥환간이에선 조금 나아지는 듯하다 영일대에 오니 정리가 되었다. 이젠 그렇게 어지를 숙박 시설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마지막 날이니.

텀블러에 물을 끓여 넣고 오설록 달빛 걷기 한 봉을 우렸다. 가져온 커피믹스 5봉, 블랙커피 2봉 그대로다. 챙겨 온 게 미안해서 발효차라도 덜어내었다.

옷은 줄일 수 없어 매일 상의 다섯 벌, 하의 네 벌. 양말 두 켤레. 정말 많이도 껴입는다. 거기에다 버프 두 겹에 모자.


8:37 들어올 때처럼 깔끔한 방을 만들어 놓고 체크 아웃.


8:40 영하 1℃에서 0℃. 날씨도 풀렸겠다 긴장할 것 없다. 단단히 복장을 챙기고 배낭을 메고 등산화를 신고 장갑을 끼고 스틱을 쥐었다.

자~ 출발.


600m 앞에 다리를 통해 바다로 나간 영일대가 있다. 바다 위로 나아가 보았다. 2층까지 올라가 한 바퀴 돌았다. 그 아침에 젊은 남자가 형 되는 남자에게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한 시간 전에 해를 이미 맞았으니 영일대는 가볍게 둘러보고 직진.


해를 맞이하는 영일대


9:18 두무치마을 지나는데 조깅하는 사람들이 있다. 건강한 도시다.


9:42 한 시간 만에 환호마을 둑에 앉아 물을 마셨다. 어린이들이 몰려 달려와 내가 앉아있는 곳에 선다. 선생님이 지시를 한다. 그만 일어나야겠다. 지쳐 보이는 어린이에게 물어보았다.

“어디에서 온 거예요?”

“태권도요.”


내가 피아노를 배울 때 바로 아래 여동생은 태권도를 배웠었다. 그걸 배우고 싶어하는 여동생이 신기했었다. 영하권 아침에 달리기하는 게 태권도 체력 기르기라면 그때 나도 배워볼 걸 그랬나.

거기서 계속 바닷길로 가야 하는 건지 지도 앱을 켜보았다. 국토종주 자전거길이 마을 쪽으로 나 있다. 가로지르는 길인 것 같아 신나게 그쪽으로 갔다.

거기서부터는 계속 큰 찻길을 낀 인도를 걸었다. 우회전, 좌회전, 우회전 4km 정도 가니 죽천 해수욕장이 나왔다. 한 시간이 지났다.

마을 입구 정자에 앉아 물을 마셨다. 마을 입구에 이렇게 쉴 곳을 만들어 놓은 동네는 주민들에게도 순례자에게도 고맙다. 그 작은 마을을 지나며 운동 기구에서 허리 돌리기도 했다.


반짝이는 건 바닷물인가 햇살인가 물오리의 날갯짓인가


죽천 방파제 가까이 가니 부산에서 보았던 까만 오리들이 바다에 떠 있었다. 햇빛 받아 따뜻해 보였다. 마을을 지나면서 막다른 곳으로 보이는 곳에 이상한 길로 안내판이 있었다. 공사장 뒷길 같은 그 길로 한참을 나갔더니 산업도로가 나왔다. 영일만대로에서 영일만 항로였다. 가끔 덤프트럭이 지날 뿐 사람도 없는 산업단지를 2km 정도 걸어가면서 이런 길을 걸을 거면 포항제철소 길도 못 걸을 게 없었다는, 지난 선택이 또 생각났다. 이미 지난 일이다.



길고 지루한 길이 끝나자 드디어 바다가 나타났다. 용한 서퍼 비치였다. 바람 막을 곳을 피해 해변에 있는 파라솔에 앉아서 물을 마시는데 바다에 까만 점들이 움직인다. 유심히 보니 까만 슈트를 입은 사람들이 서핑을 하고 있었다. 바람 때문에 멀리 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서핑 용한


거기서부터는 거친 겨울바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용한리간이해수욕장에서 2km 지점부터는 해변에 나무 데크 길이 이어졌다. 시작점인 정자에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칠포 가는 길


12시 칠포해수욕장까지 1.5km 남았다. 데크 길을 가다 보니 스틱은 어느새 끝부분이 사라졌다.


칠포 가는 데크 길


대구교육해양수련원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가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는 걸 보고 따라갔다.

칠포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엔 태양과 바람으로 가동하는 신재생에너지 가로등이 있었다.


신재생 에너지 가로등


12:50 드디어 칠포해수욕장에 당도했다. 나무를 심어 놓고 바람막이를 했는지 썰렁했다. 해변에서 뭔가를 채취하는 사람 말고는 쉴 곳도 없이 황량했다. 거기서 사진을 찍었다. 끝인 줄 알았다.


칠포 해수욕장


그런데 저만치 계단이 보였다. 그제야 내가 순례한 곳이 칠포항이었음을 기억했다. 그해 초겨울 어두워지는 시간에 나는 300m 더 가면 있다는 칠포해수욕장까지 가는 걸 포기하고 칠포항 해변에서 돌아갔었다.

모래 위를 걸어 나무 데크와 계단을 올라갔다. 절경이 펼쳐졌다. 거리도 꽤 있었다. 3년 2개월 전 그때 내쳐가지 않길 잘했을 만큼.

그렇게 작은 산등성이를 넘었다 싶었을 때. 눈앞에 그날의 풍경이 반대편에서 펼쳐졌다. 그 작은 해변이 내가 걷다가 지쳐 돌아갔던 곳이었다. 마침내 다시 찾아온 그곳. 그곳은 칠포 캠핑장이었다. 그때 보았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바위 위에 소나무가 있었다. 이번 도보순례 신창에서부터 봐 온 여러 바위와 소나무 중 제일 멋졌다.


13:13 바위 아래 스틱을 꽂고 배낭을 내려놓고 스틱에 조끼를 걸쳤다. 이것으로 7번 국도 혹은 해파랑길을 완주했다.


7번 국도 - 해파랑길 완주


이주만이 살길이다 월성원전이주대책위원회


기뻤다. 매우 기뻤다.

그 길을 따라 칠포 1리 정류장에 가서 다시 앉았다. 4년 전과는 전혀 다른 밝고 가벼운 기분이었다.


2020년 11월의 나는 외로움이 고독이 되기 전 상심과 슬픔으로 칠포해수욕장까지 가지 못하고 해변에서 돌아와 칠포 1리 정류장에 주저앉아 있었다. 거기서 모르는 사람이 포항역까지 태워다 주셨다.


2024년 1월의 칠포 1리 정류장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비록 시간대와 날씨는 달랐지만, 그때도 혼자였고 지금도 혼자인데 내 마음은 매우 달랐다. 길 건너 새마을 슈퍼에서 드디어 따뜻한 캔커피를 샀다. 이날을 위해 나흘 동안 철저히 마시지 않았던 캔커피. 혹시라도 고함량 카페인으로 몸에 탈이 날까 봐, 그래서 완주하지 못할까 봐 못 마셨던 캔커피를.


칠포 1리 정류장


시골 물가는 참 소박하다. 도시 편의점에서 2200원 하는 게 시골 구멍가게에서 1500원. 계산하는데 가게 주인아저씨가 “어, 이 카메라 되게 오래된 건데.”하신다. 지갑을 꺼내느라 내려놓은 내 고물 카메라. 중고로 두 번째 수선을 거듭해서 쓰고 있는 내 소중한 분신.


내 카메라는 혼자 다니는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당했을 때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증거물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작품이 아니라 족적을 남기듯이 사진을 찍었다. 그게 만일의 경우, 나를 찾을 사람들에게 내가 남겨줄 수 있는 단서니까. 보안이 철저한 아이폰 회사는 소유자가 사고사해도 유족에게 휴대폰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 안의 사진은 본인만이 볼 수 있다. 급박했던 지리산 하산 길에서도 나는 연신 사진을 찍었다. 낙오하더라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 했으니까. 촬영은 혼자 다니던 내게 생존과 안전을 위해 저절로 따라붙은 습관이었다. 힘든 동행인 아랑곳하지 않는 게 아니라 순간을 기억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행위였다.


한 시 반쯤 캔커피를 사서 다시 정류장으로 왔다. 배낭에서 손수건으로 싸놓은 토스트를 꺼냈다. 짐에 밀려 납작해진 토스트는 버터와 잼으로 딱 달라붙어 있었다. 미지근하고 달달한 커피 한 모금과 함께 한입씩 베어 먹는 토스트는 고소하고 달콤하니 정말 맛있었다. 그 소박한 식빵과 캔커피는 간식이 아닌 점심 식사였다. 깨끗하게 싹 먹고 캔을 버리려고 다시 가게로 가는 짧은 길이었다. 컹컹 강아지 짖는 소리는 들리는데 강아지는 안 보이고 허리 굽은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좋은 일 하시네요.”

“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순간 궁금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요. 좋은 일 하시는 거죠.”


할머니는 내 배낭에 매달린 ‘핵발전소 없이 안전하게 살자’를 읽으신 건가? 지나가는 할머니의 속이 보이는 배낭에서는 강아지가 컹컹 짖고 있었다. 순간 하선대 전설이 떠올랐다. 좋은 일을 하면 내게도……?


뜻밖의 칭찬으로 마무리하며 7번 국도 순례길 다섯째 날 영일대 해수욕장에서 칠포항까지 16.5km를 걸었다.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 7번 국도

2019년 6월 22일 토요일 고리핵발전소~울산 온양 남부통합보건지소 17.6km

23일 일요일 남부통합보건지소~울산시청~중구보건소 17.3km

24일 월요일 중구보건소~경주 외동읍 행정복지센터 18.4km

25일 화요일 외동읍 행정복지센터~월성 핵발전소 21.9km

합 : 75.2km



나만의 7번 국도 탈핵도보순례

2020년 2월 12일부터 15일까지 울진에서 삼척까지 79.6km,

7월 1일부터 8일까지 삼척에서 고성까지 187.5km,

11월 13일 월포에서 화진까지 10.5km와 20일 월포에서 칠포까지 8km,

2021년 2월 28일부터 3월 4일 울진에서 화진까지 102.6km,

2022년 1월 9일부터 10일까지 부산 오륙도에서 고리 핵발전소까지 54km

2024년 1월 23일부터 27일까지 5일 경주 문무대왕릉부터 칠포항까지 96.1km……



이렇게 부산에서 고성까지 도보 순례를 완주했다.

그런데 보통 때 같으면 여기저기 벗들에게 완주 소식을 알렸을 텐데 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 기쁨을 오롯이 혼자만 간직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철없는 바다 철없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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