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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국도 순례길 5-4
전설 따라 호미반도해안순례길

7번 국도 순례길 5-Day 4. 흥환간이~청림+형산강~영일대18.2km

by 일곱째별
호미반도 해안 둘레 이야기 따라

2024년 1월 26일 금요일 도보순례 넷째 날

새벽 4시. 목이 아파 깼다. 너무 덥고 건조했다. 보일러를 끄고 시끄럽게 돌아가는 빈 냉장고 전원도 꺼버렸다. 비로소 고요하다.

양치하고 벌건 얼굴에 양포항에서 붙이고 남은 마스크 팩을 붙였다. 겨울 바닷가 자외선은 강하다.

다시 잠들었다 일어났더니 왼쪽 창에 햇빛이 강하게 비친다. 8시가 훌쩍 넘었다. 깊이 잠들었나 보다. 부지런히 씻고 옷을 입는데 이번엔 회색 지퍼 슈트 다음에 검정 후드 티를 입어보았다. 전자레인지를 사용하지 않고 뜨거운 물을 부어 오래 둔 떡국은 맛이 없었다. 수입쌀이라서인듯했다.


9시 20분에 1층 카페로 내려갔다. 펜션 주인이 커피를 준비하고 계셨다. 숙박비를 현금 결제하면 커피를 서비스로 주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하는 스페셜티 커피 바리스타 파운데이션 자격증을 취득했기에 다른 방식으로 핸드드립 커피를 마셔보고 싶었다. 먼저 커피를 고르라고 하셔서 AA 브랜딩 커피를 선택했다. 그리고 카페인이 적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업 시간이 아니니 테이크 아웃을 하라고 하셨다. 내 티타늄 컵을 내밀었더니 도기 잔에 주셨다. 원두를 굵게 갈아 약간 산미가 있는 가벼운 맛이었다.


도기 잔에 드립 커피


평일 오전에는 문 여는 카페가 아니라서 나 하나 때문에 문 열고 계시는 게 부담스러워 다 마시지 못한 채 출발했다. 출발할 때 길을 물었더니 나무다리를 건너가는 해안도로를 알려주셨다. 거기다 더해 포스코 포항 제철소 구간을 걷지 말고 도구해수욕장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형산강 다리를 건너가서 내리라고 알려주셨다. 거길 다 걷는 사람들 있는데, 좋은 자연을 걷지 왜 매연 마시고 걷느냐고.


일단 찻길보다 나을 듯해 나무다리로 들어섰다.

영하 3℃. 기온은 좀 올라갔지만 바람이 불었다.

9:47 하선대 선바우길로 들어섰다.


건너야 할 다리


9:58 해안을 돌아 다리가 나 있는데 꽤 길었다. 다리 밑으론 거친 파도가 들락거렸다. 스틱의 캡을 뺐다. 파도가 다리 위로 덮칠까 봐 심호흡한 후 숨을 멈추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리와 다리 사이 자갈밭에 쓰레기가 잔뜩이었다. 하나도 주워올 생각을 못했다. 지리산에서 페트병을 주워 온 건 그나마 살만했을 때 혹은 만용이었다. 정말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 쓰레기가 눈에 들어와도 줍진 못한다.


건너 온 다리


1.2km쯤 오니 0.5km 앞에 하선대 선바우길.


마산리를 지나며 10:21 먹바우(검둥바위)가 있었다. 바위 두 개가 연결되어 있는데 연오랑세오녀를 싣고 간 배가 아닌가 하는 설명이 있었다. 잠시 연오랑세오녀 이야기를 축약하자면 둘은 부부였는데 어느 날 해초를 따고 있던 연오를 바위가 데리고 일본으로 갔는데 일본 사람들이 연오를 왕으로 삼았단다. 남편을 기다리던 세오는 남편의 신발을 발견하고 그 바위에 올랐다. 그랬더니 그 바위가 역시 세오를 일본으로 데려갔다. 마침내 연오와 세오는 다시 만나 왕과 왕비로 살았다. 그러나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단다. 일관이 연오와 세오가 일본으로 갔기 때문이라고 해서 왕은 사신을 보내 고국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연오는 자신이 일본에 온 게 하늘의 뜻이라며 세오가 짠 비단을 대신 주어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였더니 해와 달이 제 빛을 찾았다고 한다.

마침 그 자갈에는 내 겨울 고무신과 같은 종류의 낡은 한 짝이 있었다. 나도 그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가야 하나. ㅎ


먹바우(검둥바위)


10:29 드디어 하선대 도착.

작은 바위에 선녀가 내려와서 놀았다는 하선대. ‘옛날 동해의 용왕이 매년 칠석날 선녀들을 이곳에 초청하여 춤과 노래를 즐기곤 하였는데 용왕은 그 선녀 중에서 얼굴이 빼어나고 마음씨 착한 한 선녀에게 마음이 끌리어 왕비로 삼고 싶었으나 옥황상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용왕은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다를 고요하게 하고 태풍을 없애는 등 인간을 위하는 일을 하자 황제가 감복하여 선녀와의 혼인을 허락하게 되었다고 하며 용왕과 선녀는 자주 이곳에 내려와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안내문을 읽자마자 나도 인간을 위하는 일을 하면 하늘이 감복하여 사랑하는 이를 허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선대 1km에는 각종 이야기를 담은 바위가 계속된다.

소원바위, 아기발바위, 여왕바위, 안중근의사 손바닥바위, 폭포 바위, 어디에나 흔한 남근바위



그렇게 하선대를 지나 연오랑세오녀 공원에 막 다다랐는데 스틱이 이상했다. 들어 보니 스파이크(쇠촉)가 달아나 버렸다. 그동안 캡을 씌운 채 다녀서 충격이 손에 그대로 전달됐었는데 캡을 빼자마자 스파이크 한쪽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장렬히 부상 당한 스틱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가는 길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에서 처음으로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시며 쉬었다. 햇살이 따뜻해서 좀 전의 긴장감을 풀 수 있었다. 5.3km를 쉬지 않고 달리다시피 걸어왔다. 그런데 그 심장이 조여 오는 긴장감을 다시 감당하며 해안도로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차라리 찻길 가로 가려고 산책로를 찾았다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오다가 호텔로 가는 길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길도 결국은 해안도로로 통하는 길이었다. 철창에 통행로가 뚫려있는 게 얼마나 다행이던지 모른다.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에서


임곡리를 지나 도구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 솔밭이 있었다. 자전거 도로로 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들어간 솔숲은 동화 속 기울어진 나라처럼 소나무들이 전부 육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해풍에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12시 반쯤 도구해수욕장에 다다랐다. 거기서 점심식사할 계획이었다. 펜션 주인은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앞에 놓인 길로 쉬지 않고 나아갔다. 데크가 놓여있는데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걸어 나아갔다.

가끔 스틱 끝이 데크 사이에 끼어 발을 멈출 때가 나왔다. 그때마다 지리산 종주 마지막 날이 떠올랐다. 낙오할까 두려워 유평리로 정신없이 하산하던 때 나무 데크에 스틱이 팍 끼어서 줄달음을 멈춰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다시 비움실천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크는 매우 길었다. 전날 아주 멀리 보이던 공단이 점점 가까워졌다. 정말 꽤 많이 걸어왔다.

한 시간 넘게 걸어 드디어 끝이 없을 듯하던 데크가 끝이 났다. 그곳은 청림바닷가였다.


저 멀리 보이는 포항제철소


쭉 나가보니 해군항공역사관 앞이었다. 도구해수욕장 입구에서 4km쯤 더 온 곳이었다. 거기서도 밥 먹을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편의점에서 초코바를 한 개 사서 먹고는 펜션 주인의 말대로 버스 209번을 타고 형산로터리까지 갔다.


버스를 타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내가 왜 이렇게 남의 말을 잘 듣지?’

팔랑귀라서일까? 어른 말씀을 너무 잘 듣는 모범생 습성이 남아서일까? 난 그 길을 걷지 않을 생각이 없었다. 몇 달 전 지도 보고 계획표를 짤 때도 그 길을 다 걸어서 그날은 송도 해수욕장 근처에서 쉬는 게 당일 목표였다. 그런데 다이어리를 배낭에 넣어 보내서 잊었을까? 아침에 들은 남의 말 때문에 몇 달간의 내 계획을, 더 나아가서는 4년 동안의 7번 국도 완주라는 내 계획을 고작 5km 남짓 때문에 달성 못 하다니…… 영 찜찜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맨 처음 2020년 2월 울진~삼척 7번 국도 도보 순례 때도 장호항에서 궁촌항까지 5.4km를 레일바이크 타고 갔었다.

나아리에서 문무대왕릉·봉길대왕암 해변까지도 버스로 15.8km 돌아서 갔다. 만약 승용차로 터널을 건넜다면 6.2km 거리다.

나는 해군 항공역사관부터 형산강 로터리까지 5km를 209번 버스로 통과한 것뿐이다.


하지만 망설이던 그 길을 되돌아가지 않고 직진하게 된 건 로터리에서 길 건너 형산강 낀 강변 길에 올라서자마자 본 ‘영일만 북파랑길 시점’ 표지 때문이었다.

2020년 겨울이 다가오는 가을, 외로움과 상심에 푹 젖은 내가 막막하기만 한 심정으로 하루 걷고 올라가고 또 하루 걷고 올라갔던 그 길이 월포에서 화진 그리고 월포에서 칠포 ‘깊고 우아한 북파랑길’이었다. 그 길의 시작점에 섰으니 새로운 기분이 피어올랐다.



5.8km만 가면 영일대 해수욕장이 있다는 강변길은 안정감이 있었다. 이미 닦아놓은 길은 아주 편하다. 자전거길과 도보길이 나뉘어 있고 군데군데 의자도 있다. 아무 때나 쉴 수 있으나 나는 쉬지 않고 걸었다. 형산강을 바라보는 의자 중 하나에는 노부부로 보이는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오후 햇살을 쪼이고 계셨다. 눈물겹게 바라는 미래의 모습이었다.


포항운하관에서 지도를 보며 잠시 발길을 멈추었을 때였다. 초라하고 묘한 여인이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제 나이 50에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는데 남녀호랑개교를 믿고…….”

보통은 그냥 지나치는데 대꾸를 했다.

“저 예수님 믿어요.”

교회 다녀요도 아니고 예수님 믿어요라니. 갑자기 웬 신앙고백? 교회 안 나간 지 7년. 이 도보순례 길이 사람을 변화시키긴 하나 보다.


포항 송도해수욕장


쭉쭉 나아갔다. 포항제철과 영일대 사이의 송도해수욕장이었다. 송도해수욕장에서도 밥 먹을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계속 나아갔다. 오후 세 시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나는 길거리 의자에 앉아 단백질바를 먹었다. 점심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날이 왔구나. 생각하면서 영일대 쪽으로 계속 걸었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다 보니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포항지회 건물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2층으로 올라갔다.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인 패스를 보여주며 혹시 숙소를 소개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단체와는 연계가 없다고 했다. 괜찮았다. 대신 텀블러에 온수를 채워 나왔다.


그때 울산 북콘서트엔 못 가지만 포항에 오면 꼭 연락하라는 사람이 떠올랐다.

지난 8월, 어떤 무리 중에서 솔직함으로 기억에 남아있었던, 유달리 친절해서 선한 마음으로 이어진 인연이 또 어떤 좋은 일로 양상 될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망설이다 처음으로 전화를 했다. 현지인이니 괜찮은 호텔이 어디냐고 물어볼 심산이었다.

그이는 호텔 예약을 해도 되느냐고 물었고 나는 고맙지만 십 원도 신세 질 생각 없다고 했다. 통화한 지 10분만에 나는 영일대 해수욕장에 도착해 버렸고, 그이가 한 예약은 취소가 되지 않았다. 해변 정류장에서 기다리다 4시가 좀 넘어 여행자 호텔에 들어갔다. 막 청소한 듯 물기가 흥건한 욕실은 대실 흔적이 역력했고 창밖은 건물로 꽉 막힌 일명 시티 뷰. 게다가 신세 질 생각이 없었기에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금요일 오후에 관광지에서 숙소 구하기는 쉽지 않다. 그 어려운 일을 잘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연락한 나를 위해 바쁜 중에 해 준 것이었다. 고마워해야 마땅했다.


씻고 5시 반이 넘어 해가 지기 시작해 밥을 먹으러 나갔다. 영일대 해수욕장에서 횟집 아닌 밥집을 찾긴 어려웠다. 차이홍이라는 중국집에 들어갔다. 순례 중 중국집에 들어간 건 처음인 듯. 그곳은 대형 식당이라 위생문제는 없지 싶었다. 백짬뽕을 시켰다가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아 백짬뽕밥으로 바꾸었다. 그날 중 유일하게 제대로 식사한 만 원의 만족이었다.


만 원의 만족


식사 후 영일대 해수욕장 모래에서 밤이 내리는 걸 지켜보았다. 오른쪽으로 포항제철의 불빛이 왼쪽으로는 스페이스 워크의 불빛이 화려했다. 얼마만의 도시 풍경인지, 이렇게 전기를 쓰니 핵발전소가 계속 가동되지……. 한쪽에선 젊은이들 서너 명이 폭죽을 터트린다. 그게 뭐가 재밌다고 화약 냄새 맡으면서 저리 즐거울까. 내게 그 즐거움은 싱겁기 짝이 없다. 하지만 청춘에게는 그 또한 재미이겠지. 그들 사이엔 오늘 밤 뭔가 추억을 쌓으려는 낭만이 있겠지.


DSC02067.JPG 영일대 해수욕장에서 보이는 호미곶과 포항 제철소


6시 반쯤 카페에 들어가 생강차를 시켰다. 다 마시고 온수를 첨가해 마시며 더 기다렸다.

누군가와 약속은 기다림을 필수로 한다. 정시까지도 기다려야 하고 누군가 늦으면 늦는 만큼 다른 사람이 기다려야 한다. 나 또한 얼마나 많은 지각으로 다른 사람을 기다리게 했던가. 갑작스러운 내 연락에 그 사람은 이미 있던 스케줄에 내 스케줄을 끼워 넣어야 했을 것이다. 괜히 연락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하지만 7시에서 20분이 지난 후 허겁지겁 들어온 그 사람과 어린아이를 보았을 때 내 마음은 순식간에 연민으로 돌아섰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바쁘고 늦고 허둥댈 수밖에 없다. 아이가 인생의 전부인 대부분의 기혼 3~40대가 떠올랐다. 그렇게 사랑과 정성과 헌신을 다해 키워도 부족하고 모자란 게 육아다. 그리고 그런 키움을 받은 아이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마움보다는 비교로 인한 부족함을 더 느끼기 쉽다. 육아에 전념하는 이가 나를 보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반면 나는 그들을 보면 얼마나 안쓰러운가. 서로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다가, 바쁜 스케줄을 쪼개어 나를 만나느라 고마운 엄마 대신 아이에게 세뱃돈을 주고 헤어졌다. 나는 호텔을 대접받고 아이는 용돈을 받았으니, 용도가 다름으로 돈의 쓰임이 따스해졌다. 물질은 잘 다루면 꽤 괜찮은 도구이다.


8시쯤 다시 호텔에 들어왔다. 발을 씻는데 드디어 왼쪽 둘째 발톱이 빠져서 떨어져 나갔다.


다른 날의 두 배인 20분간 스트레칭을 하고 10시 반쯤 취침하려는데 침구의 락스 성분 때문에 피부가 가려웠다. 1인용 코튼라이너가 필요했지만 지금의 짐 무게를 유지하기까지도 힘들었다.


겨우 잠들었다가 새벽 2시에 다시 깼다.


고독하게 순례하려 했는데 타의 반 자의 반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마는 순례, 잠시 스쳐가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이 내 감각을 훑고 지나간다.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하려고 했던 신경이 흐트러진다. 순간 인내심 없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누가 뭐래도 제 갈 길 갈 것 같은 나는 예상치 못한 천사들을 만나며 흥환간이해수욕장에서 영일대해수욕장까지 좌충우돌 18.2km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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