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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감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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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Apr 08. 2024

thanks for the books&music

감동의 물결 감사합니다


오늘 내로 이 글을 다 쓸 수 있을까요?

사실 이런 마음은 더 묵혀두어야 하는데, 매일 감사일기를 쓰겠다는 혼자만의 약속 때문에 급하게 자판을 두드립니다.


학원이 끝나고 여유 있게 나와서 차에 올랐습니다. 자전거용 장갑을 연습 삼아 끼고 핸들을 잡았지만 시동은 걸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찻길에서 노란 트렌치코트가 골목으로 들어섰습니다. 자동차 창을 열고 손을 들어 보였습니다. 그이가 차에 탔습니다.


"오늘은 노란색이네요."


경쾌하게 건넨 제 인사에 그이는 그 주간이라서 입었다고 했습니다. 말문이 막혔습니다.

4월이 되면,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방법 중에 이렇게 온몸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니 먹먹했습니다.

 

그이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학원 근처였지만 처음 가보는 동네였습니다.

지난달 말 제 집에 와서 유리밀폐 용기와 그릇을 사주고 갔을 때, 다음엔 그 유리용기에 음식을 담아 가겠다고 학원 메뉴 시간표를 보내주었습니다. 그이가 고른 날이 오늘이었습니다.


유튜브에서 선보이는 꾸민 집 같이 알록달록한 그이의 집에서 앙증맞은 그릇에 구운버섯샐러드와 훈제연어샌드위치와 상하이파스타를 담았습니다.

아침에 누룽지 한 그릇 끓여 먹은 게 전부라 요리하는 내내 배가 고팠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막 만든 요리를 먹을 때 저는 유리그릇에 담았습니다. 함께 먹을 사람이 있다는 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배고픈 상태에서 같이 먹으면 더 맛있지요.


식사 후 그이가 디저트를 준비하는 사이 책장을 둘러보았습니다. 옷이나 신발이 그 사람의 외면을 보여준다면 책장에 꽂힌 책은 그 사람의 내면을 보여줍니다. 전공인 핵천체물리학책은 거의 없이, 빼곡한 사진집, 사회학책, 에세이와 소설....... 어쩜 한 권 한 권 다 꺼내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었습니다.

수제 책꽂이를 빌려 주겠다고 했던 이가 변심하지 않았다면 저도 서울에서 그런 책들을 다 가져왔을까요? 책꽂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곳은 정착지란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에 책들을 가져오지 못하는 거겠지요. 여하튼 하나같이 빛나는 책들 때문에 눈이 반짝반짝해진 제게 그이는 선물을 준비했다며 세 권의 책을 내놓았습니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 김인정, whale book

노순택 글, 사진, 말하는 눈, 한밤의 빛

표지 없는 지도와 지워지는 사진들, 윤성희, VOSTOK PRESS


그 책들을 찬찬히 살펴보다 책꽂이에 있던 정택용 사진작가의 <너희는 고립되었다>와 <외박>을 보았습니다.

아는 얼굴들이 등장했습니다. 고통 속에 살다 지금도 고통의 현장마다에 있는 사람들.


대체 이 책들은 죽비인가요?

시골에 들어와 교육자 반 작가 반으로 살고 있는 제게 현장의 뜨거움은 폐부를 찔렀습니다.

넌 지금 뭘 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 거냐고.


정밀아의 팬이기도 하다는 그이는 책 세 권에 이어 정밀아 4집 시디도 선물로 주었습니다. 정밀아는 '무명'과 '별'을 들어 알고 있던 뮤지션입니다. 좋아하는 작가와 뮤지션의 작품을 여럿 구매해서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그이는 정말 착한 소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본이 이렇게 쓰인다면 언더그라운드에서 소신 있게 작품 활동하는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될까요?


마지막으로 그이의 침실을 보았을 때 입을 떡 벌렸습니다. 현관과 거실에 빼곡하던 사진과 포스터의 절정이 침대 옆에 붙어있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왜?


그이는 대답했습니다.


"이렇게라도 기억하려고."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 시대 이 민족 민주주의 비정규직 노동자 인권.......  제가 아름다운 것들과 예쁜 것들로 마음을 다독일 때 그이는 공간 가득 신념과 투지와 의미로 마음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이는 와신상담 (臥薪嘗膽)을 하고 있었습니다.


갈 때 올 때 두 손 가득 제 짐을 들어준 그이와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랐습니다.

노란불 신호에서 재빨리 시디 비닐커버를 벗겼습니다. 시디플레이어에 시디를 넣었습니다. 정밀아의 노랫소리가 차를 채웠습니다. 코너를 앞두고 횡단보도도 아닌데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여자가 짐을 들고 컴컴한 찻길을 가로질러 옵니다. 비상등을 켠 채 정차했습니다. 그이가 준 사과 중 한 개가 굴러 떨어졌습니다. 여자가 제 차 앞을 지나갑니다. 사고 나지 않아 다행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정신과 제정신이 아닌 것은 종이 차트에 불과한 건 아닐까요?


어느덧 집에 도착했습니다. 콩이는 목을 빼고 제가 차에서 내리길 기다리는데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7번 노래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뭔가 촉촉한 것이 차올랐습니다. 감동, 반성, 감사의 <물결>이었습니다.



'.......

나무 바람과 푸른 땅

풀꽃 별 하나에 기대는 밤

그저 흐르는 강을 보니

나의 작은 마음이 보여


훨훨 훨훨

훨훨 그렇게 살자 하네

그저 흐르는 강을 보니

나의 마음이 보여.'



노래가 끝나고 차에서 내렸습니다. 콩이의 빈 밥그릇에 사료를 채워주고, 아드득 아드득 씹어 먹는 걸 쭈그리고 앉아 기다려줍니다. 싹 다 먹은 콩이를 데리고 느티나무 앞까지만 갔다 왔습니다. 밤 열 시. 온종일 저만 기다렸을 텐데 그냥 들어갈 순 없었습니다.


샤워를 하고 그이가 준 레몬 라벤더 차를 마시며 정밀아의 노래를 들으며 이 글을 씁니다.


'훨훨 훨훨 훨훨 그렇게 살'고 싶은데,

숨이 찹니다. 숨이 차.

간신히 자정 전이네요.

차박사, 고맙수미다!


정밀아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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