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0주기 기억
이른 아침에 일어나 자리를 정돈하고 흩어진 짐을 차곡차곡 리어패니어에 담았다. 순례 전날 구입한 고가의 패니어는 주차장에서 기차로 이동할 때 한 번 자전거 리어랙에 달아보았을 뿐 내내 자동차와 숙소에 얌전히 있었다. 내 작은 뷔나에 달기엔 너무 크고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검정 바지에 노란 반소매 티셔츠와 검정 점퍼를 입었다. 바지 치수를 보니 한 사이즈가 컸다. 그 바지를 입고 지리산을 종주했었다. 재작년 말 급격히 살이 쪘을 때 샀던 거라 이후엔 허리가 매우 컸다. 바지가 헐거우면 힘을 못 쓴다고 도반은 자신의 허리띠를 빌려주었다. 내 짐까지 더한 무거운 배낭에 허리띠도 없이 그는 나를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이번에 담양에서 목포까지 133km 자전거 순례로 올 때는 니키의 봉사가 있었다. 그렇게 내 순례에는 타인의 헌신이 있었다.
아침 식사는 전날 사 온 북엇국 컵밥과 요거트와 사과 반 개. 사과 한 알에 5000원 하니 2500원짜리 반 알을 먹은 셈이다. 독이 든 사과보다 물가가 무섭다. 비치된 드립백 커피까지 마시니 완벽한 아침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손걸레질로 집안을 싹 닦은 후 잘 정돈한 집 문을 잠그고 차에 올랐다.
니키의 운전으로 팽목항 가던 길에 기억의 숲에 먼저 들렀다. 작년에 기억의 벽 뒤 은행나무에 묶어 놓고 온 노란 리본이 혹시나 나무가 자라면서 꼭 끼어 생장을 방해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서둘러 그 나무를 찾아 올라갔다. 내가 묶어 놓은 리본은 어디로 가고 빛바랜 리본엔 희미하게 다른 이름이 쓰여 있었다. 혹시라도 풀어져 떨어지거나 날아갔다면 다행이다. 뜻이 아무리 거룩해도 자라나는 생명체에 인위적인 족쇄를 채워 생장을 방해하면 안 된다.
팽목항에 도착했다. 맨 먼저 분향소에 들렀다. 배치가 달라지고 정리가 되어있었다. 하얀 국화를 헌화하고 묵념 후 뒤에 서 있었다. 뒤에 들어오신 니키는 절을 두 번 하셨다. 가톨릭에서는 민간 풍습을 존중한다.
사인하고 노란 리본을 몇 개 챙겼다. 지난 세월호 10주기 김정용 사진전에서 뵌 포토청 오 선생님께 드릴 용도였다.
되도록 천천히 팽목항 등대를 향해 걸었다. 작년 9주기 이후 강풍으로 쓰러졌다는 철제 조형물 대신 새 조형물이 기다림의 의자 옆에 설치돼 있었다.
방파제 위에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커피 등 음료를 타주는 무료봉사대가 있었다. 반갑게 인사했다. 그때 그 젊은 여성은 날 알아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커피를 마시겠다고 하고는 등대로 발길을 옮겼다.
해마다 등대로 걸어가는 발걸음은 긴장이 된다. 가까이 갈수록 등대가 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10년간 첩첩이 매달렸던 낡은 노란 리본이 싹 사라지고 등대는 선명한 빨강으로 하얗게 바랬던 리본 그림은 샛노란 색으로 페인트칠되어있었다.
한 발 한 발 다가갈수록 조마조마했다. 참사 6주기 때부터 일 년간 카메라 가방에 매달려 있다가 3년 전인 2021년 4월 세월호 참사 7주기 때 등대 난간에 묶어 놓고 간 노란 실 팔찌와 파란 끈의 황동 세월호 리본이 그대로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있었다. 다른 천 리본은 싹 치워졌고 내 노란 실 팔찌와 파란 끈의 황동 리본은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청소하시는 분이 그 리본의 특별함을 알아보셨나 보다. 고맙다!
다시 되돌아와서 무료 커피 봉사대로 갔다. 커피믹스 한 잔을 부탁했다. 작년의 노란 의자는 없었다. 사라졌다고 한다. 젊은 여성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나이는 스물여섯, 이름은 이 사랑. 그이의 부친은 나보다 몇 살 더 많으셨다. 십 년 동안 4월 15일과 16일이면 강진에서부터 와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따끈한 커피와 차를 타주시는 아버지 따라 작년부터 이곳에 나왔다는 사랑 씨. 그 이름을 지어준 부모님의 마음에도 그이의 얼굴에도 사랑이 가득했다.
잠시 후 한 무리가 왔다. 팽목 이장님과 일행이었다. 작년 기억의 숲에서 한 말씀하셨던 게 기억났다. 그날 아침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들으셨다고.
사랑 씨와 부친의 친구분께 물었다.
“혹시 점심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러면 식사하러 다녀오실 동안 제가 여기서 급수대를 지킬까요?”
“괜찮습니다.”
내년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오는 길에 타일로 장식된 기억의 벽에서 대전 왜가리의 작품을 찾아보았다.
‘다음엔 꽃으로 피어나세요’
세월이 지나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방법으로 추모하고 있다.
세월호 기억의 벽을 지키는 어린이 문학인들 주최로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 전시, 지상의 304인이 하늘의 304인을 [다시 부르는 이름] 전시공간에 들어가 보았다. 살아있는 이들이 별이 된 이들의 이름을 한 사람이 한 사람씩 써서 전시한 공간이었다. 기억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작년엔 없던, 새로 건축된 진도여객선터미널 앞 편의점에서 1+1 국수로 점심을 먹었다. 차도 마셨다. 그래도 시간이 남자 서망항에 있다는 진도국민해양안전관으로 가보았다. 옅은 안개 낀 모퉁이를 돌아 1.3km. 왼쪽 축대 위 커다란 건물이 있고 그 가운데 거대한 노란 동상이 앉아 있었다. 하죽도에서 진도항으로 올 때 배에서 보았던 그 동상이었다. 가운데 구멍이 뻥 뚫려 허무함과 허망함이 가득한 철제 동상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동상의 없는 눈과 마주칠까 봐 오싹했다. 지나치게 크고 위압적이었다. 그 동상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세월호 침몰 당시 상황이 벽에 기록돼 있었다.
얼마나 많은 예산이 들었을까? 거대한 규모만큼 썰렁한 유스호스텔과 안전관을 본 후 서둘러 팽목항으로 다시 돌아왔다.
‘세월호 참사’를 검색하니 안산온마음센터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경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전복되어 침몰한 사고다.
세월호는 안산시의 단원고등학교 학생이 주요 구성원을 이루는 탑승인원 476명을 수용한 청해진해운 소속의 인천발 제주행 연안여객선으로 4월 16일 오전 8시 58분에 병풍도 북쪽 20km 인근에서 조난 신호를 보냈다.
4월 18일 세월호는 완전히 침몰하였으며, 이 참사로 시신 미수습자 5명을 포함한 304명이 사망하였다.'
8시 49분에 좌현으로 기울어진 세월호는 10시 30분에 침몰했다. 101분 만이었다.
내가 아는 세월호 참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일본이 버린 배를 사 와서 개조했다.
안개주의보에 늦은 출항을 했다.
과적과 부실 고박을 했다.
급격한 우회전의 원인은 모른다.
해경이 출동은 했는데 제대로 구조하지는 않았다.
인근에서 구하러 온 선원들도 철수시켰다.
선장은 도망갔다.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에 따라 아이들은 배 안에 있었다.
그리고 침몰했다.
304명이 사망했다.
다섯 명은 아직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
오후 두 시 정각. 무대에선 진도 진혼굿이 진행 중이었고 철제 가건물 팽목 성당에선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팽목성당으로 들어갔다. 신부님까지 총 열 명이 모여서 드리는 미사 내내 바로 옆에서 울리는 굿 소리가 쟁쟁했다. 앞쪽에 3653일째라고 쓰여있다. 참사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오후 두 시면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부부가 그렇게 하고 계시니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팽목항에 올 때 오후 2시에 맞춰 오셨단다. 한 번 살다 가는 이 세상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면 그렇게 한마음으로 사는 게 최상이 아닐까.
팽목성당에서 나와 곧 기억식이 열릴 무대 쪽으로 가는데 귀에 익은 노랫소리가 들렸다. 무대 위에 선글라스를 쓰고 노란 숄을 걸친 이가 신시사이저를 치며 노래하고 있었다. 해남의 나무였다.
무대 앞으로 갔다. 리허설을 마친 나무를 불렀다. 나무가 내게 왔다. 우리는 포옹부터 했다.
“어떻게? 어떻게 오셨어요?”
“(그대 집)도 가는데 여기라고 못 올까?”
나른한 듯 나긋한 나무의 목소리는 부여 신동엽 문학관에서나 팽목항에서나 여전했다. 내 목에는 나무가 준 노란 세월호 2주기 손수건이 매여 있었다. 민주노총에서 마련한 커피차와 떡볶이와 어묵 차가 왔고 떡도 나누어지자 비로소 북적였다. 지난 3월, 서울 후쿠시마 10주기 에너지 전환대회에서 만나기로 했던 3M 14년째 해고노동자 박근서 광주전남지부 사회연대위원장도 만났다. 그렇게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해도 작년에 비해 썩 만든 인원수는 아니었다. 10주기인데…….
오후 3시 정각. 세월호 10주기 기억식을 시작했다.
사회자는 참사라 하지 않고 ‘학살’이라고 했다. 먼저 10년 동안 팽목항을 지킨 故 고우재 군 아버지의 인사말이 있었다. 진도교육희망연대와 어린이문학 작가들과 몇몇 뮤지션이 무대를 장식했다. 참사 10주기라 웬만한 지자체 관리나 국회의원 한 명 정도는 올 줄 알았다. 오면 왜 이제 왔느냐고 핀잔이라도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목포에서 진도 참사 해역으로 이동한 선상 추모식, 목포신항 추모문화제, 안산화랑유원지 10주기 기억식, 인천가족공원과 대전현충원 추모식, 울산 시민분향소, 청주 순례 등 전국에 기억식이 있었으니 그중 어디엔가는 가 있겠지. 나중에 찾아보니 안산화랑유원지 윤석열 대통령 의자는 비어있었다.
하지만 눈물이 왈칵 나오는 기쁜 소식이 있었다. 진도군수가 3선 만에 바뀌고 새 군수가 팽목항에 기억관 부지를 기증하겠다고 했단다. 시민과 유가족의 뜻과는 상관없는 진도국민해양안전관이 아닌 유족이 자녀의 시신이라도 찾기를 간절히 원하며 애타게 기다렸던 그곳 팽목항에 기억관이 생긴단다.
순서 중 진혼무가 가장 강렬하게 인상적이었다.
오후 4시 16분. 사이렌이 울렸다. 전국에서 동시에 울릴 애도의 사이렌이.
묵념하자마자 팽목항을 떠났다. 광주에서 18:46 기차를 타야 했다. 진도에서 해남 지나 목포 넘어 고속도로에 오르고 몽탄 넘어 동광산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러시아워였다. 작년에 그 기차를 탔기 때문에 무리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작년 416은 일요일이었고, 올해 416은 화요일인 평일이었다. 10여 분이 모자라 결국 기차를 포기했다.
다음 기차는 21:28. 세 시간 남짓 기다려야 하는 나뿐만 아니라 들어가시라고 해도 함께 기다려주신 니키에게도 그 시간은 힘들었다. 광주 맛집인 69년 된 영발원(永發園)에서 건짬뽕밥을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건짬뽕밥과 맛만 본 간짜장 모두 맛있었다. 백짬뽕밥은 영일만 차이홍이 맛있었고, 짬뽕은 군산 복성루만 한 독특한 맛이 없다.
자전거와 리어 패니어 두 개를 싣고 그날 마지막 기차인 무궁화호에 올랐다. 맨 앞 좌석 앞에 접은 자전거를 얌전히 두고 빈 옆 의자에 패니어 둘을 놓고 고단한 내 몸도 그 옆에 실었다. 두 시간 반 정도만 가면 된다.
기차에서 내릴 땐 역무원이 가방을 들어주어서 자전거를 수월하게 내릴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역 밖으로 나와 공용주차장까지 올라가니 자정이 넘었다. 그렇게 4월 13일 낮에 떠나 17일 새벽에 돌아왔다.
*
지난 2월에 자전거 수첩을 사고 처음으로 순례길을 떠났다. 416 세월호 10주기 추모를 조금은 고되게 하고 싶었다. 그냥 편하게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고통스럽지는 않았지만 역시 고독했다. 그것이 내게 잘 맞았다. 담양에서 좁았던 강물이 광주 지나 나주 넘어 목포 바다까지 흘러가는 동안 나도 자전거로 그 옆을 달렸다.
진도를 향해 달려가는 내 자세는 바퀴를 한 번 두 번 수천수만 번 굴리며 정직하고 우직하게 다가갔다. 한 번도 꾀부리지 않고 시작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133km 길을 밟아간 이번 영산강 자전거길 순례는 내게 무언가를 더해주었다. 지난겨울 영하 10도의 혹한을 뚫고 경주에서 포항까지 100km를 걸었을 때 생겨난 자신감의 확인이었다. 독립과 자립을 굳건히 다져나가는 다짐이었다.
물론 앞뒤로 니키의 노고가 뒷받침되었기에 순수하게 자전거만 탈 수 있어서 덜 고생스러웠다. 담양과 광주 수도원에서 재워주셨고 조식도 제공해 주셨다. 진도에선 관지가 하얀 집을 빌려주셨기에 씻고 자고 먹을 수 있었다. 친구들 덕분에 순례가 편안했다. 함께 달리지 못해도 그들은 편의를 제공함으로 순례에 동참했다.
받자마자부터 사흘 내내 왼쪽 손목에 끼고 다닌 묵주는 꽉 끼어서 자국이 생길 정도였다. 이상하게도 해남 대흥사 일지암 주지 스님이 주신 은 염주는 헐겁고 담양 수도원장님이 주신 나무 묵주는 꽉 낀다. 내 손목에 딱 맞는 팔찌는 언제 낄 수 있을까?
자전거 순례는 도보 순례처럼 골반이 틀어질 듯 무릎 뒤가 찢어질 듯 고통스럽지 않다. 다만 오래 타면 엉덩이가 아프다. 자전거를 이동하는 데 힘이 들뿐 순례는 도보보다 훨씬 편하다. 게다가 거리상 도보의 네 배 정도는 하루에 주파할 수 있다. 하지만 매 순간 사진을 찍을 수 없고 그만큼 자세히 볼 순 없다.
내년 세월호 참사 11주기 추모 순례는 어떤 방식으로 할까?
그맘때 가야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이다. 다만 언제고 그날이 오면 기억할 것이다. 애도와 추모는 산 자의 몫이니까.
돌아오니 욕실 작은 창 너머로 옅게 보이던 분홍빛이 사라지고 연녹색이 피어오른다. 옆산의 벚꽃이 다 졌나 보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