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봉사는 완전한 사랑. 죽산보~영산강 하구둑 57km+목포신항+진도
죽산보~영산강 하구둑 57km+목포신항+진도
비가 올까 봐 전날부터 걱정했다. 아침 하늘은 어두웠다.
7시 미사를 드렸다. 그때까지 비가 오지 않아 하늘이 기도를 들어주시나 보다 했다.
그런데 7시 반에 신부님과 수사님들과 함께 조찬을 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남풍 따라오는 비였다. 식빵 두 쪽에 버터를 바르고 마멀레이드 잼을 바르고 슬라이스 치즈를 얹어 토스트를 만들고 먹고 원두커피에 우유를 부어 마셨다. 삶은 반숙 달걀도 있었다. 이틀째 완벽한 아침 식사였다. 비를 맞고 자전거 타기에도 든든한.
8시 40분 빗길 속에 출발했다. 광주 시내는 출근길이라 막혔다.
10시쯤 죽산보에 도착했다. 따끈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싶었다. 근처 야영장 매점이 있었다. 커피믹스 두 잔을 부탁해서 마시는데 매점 주인이 이야기했다. 경영난과 산 쪽에서 불어오는 악취로 인한 고초에 대해서.
10시 20분 출발해서 산 쪽으로 가다 보니 출입금지 표시가 있는 무슨 처리장이 있었다. 죽산보는 해체 의견이 나오고 있는 곳이다. 4대강 산업으로 보를 쌓으면서 물을 가두니 물이 부패해 악취가 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냥 보만도 아니고 근처에 처리장이 있어 무언가를 처리하는지 그 악취가 인근 주민들 두통을 유발하고 있었다. 민원을 넣어도 소용이 없다는데 대체 무얼 처리하는 곳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늘 소지하던 내 소형 카메라는 서울 수리센터에 있었다.
비가 오니 자전거 옷 위에 검정 방수 점퍼를 덧입었다. 고글을 쓰고 모자와 헬멧을 써도 비가 들이쳐 점퍼의 모자를 썼는데 달리니 훅 벗겨졌다. 똑딱단추 하나가 떨어져 다른 쪽에 붙어 있었다. 해남에서 선물 받아 아끼고 아끼다 작년 지리산 종주 때 제대로 입어봤을 뿐인데 벌써 망가지다니 아까웠다. 여하튼 점퍼 모자 위에 헬멧을 쓰고 비를 맞으며 달리는데 얼마 가지 않아 운동화는 젖었다.
11시 30분 느러지 전망대를 지나는데 인증센터가 없었다. 다시 500m를 되돌아가 산으로 올라갔다. 자전거를 끌고 맨 운동화로 디뎌도 미끄러지는 나무 데크길. 내려가는 게 문제였다. 전망대에선 굽이진 영산강 하류의 곡선을 볼 수 있었다. 비는 점차 잦아들었다.
내려가는 길은 반대쪽이었는데 포장도 안 된 흙길이었다.
평탄한 길을 달려 우회도로를 돌아 12시 30분에 몽탄대교를 건넜다. 거기서부터는 쭉 직선도로였다. 아무도 없는 2차선 길을 달리다 문득 니키가 떠올랐다. 오후 한 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니키는 그날 오후 2시 목포 산정동 성당에서 세월호 참사 10주기 미사를 드리고 싶어 하셨다. 11시 20분에 영산강 하굿둑에서 출발하셨다니 평균 속도를 따져보면 만나기까지 한참 걸릴 터.
나는 니키께 전화를 했다. 지금 다시 출발 지점으로 돌아가셔서 자동차로 미사에 참석하시라고 강경하게 말씀드렸다. 마침 길을 헤매고 계셨던 니키도 그게 좋겠다고 하셨다. 전화를 끊자 마치 내가 기특한 일을 한 듯 대견했다. 각자에게는 다른 욕구가 있고 그걸 서로 존중하는 게 바람직하기에.
거기서부터는 정말 고독한 주행이었다. 너른 영산강을 끼고 쭉 뻗은 자전거 길에는 이전처럼 아무도 없고 맞바람이 정면 남쪽에서 불어 주행을 방해했다. 한 바퀴 두 바퀴 힘들여 페달을 밟으며 바람을 달래듯 노래했다.
산 넘어 남쪽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아~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불 때 나는 좋더라
한 시 반이 넘어가자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마침 공중화장실이 나타났다. 그런데 멜빵바지처럼 생긴 빕숏을 입었더니 화장실에서 문제였다. 게다가 그 화장실은 재래식에 걸쇠도 녹이 슬어 옷을 걸어놓을 수 없었다. 방수 점퍼 둘에 조끼에 져지를 한 겹 한 겹 벗어 싸안고 빕숏의 어깨걸이를 내리고 아슬아슬 곡예가 따로 없었다.
오후 두 시가 넘으니 가도 가도 끝이 없을 듯한 길에 그네 세 대가 나타났다. 자전거를 세우고 가운데 그네에 앉아 보았다. 30초도 못 있고 일어섰다.
두 시 반이 넘자 강가 억새 뒤로 연둣빛 물오른 나무들이 서 있었다.
영산강 제1경 영산석조(英山夕照)에는 나무 데크로 억새 위까지 조금 나아가볼 수 있었다.
잠시 후 아스팔트 끝에 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빗줄기가 굵어졌다. 직진이 곡선이 되기 시작하다가 막판에 한 바퀴 길게 우회했다.
오후 세 시가 넘어 영산강 하구둑 인증센터에 도착했다. 그런데 바다가 보일 줄 알았던 곳에 하구둑이 4km 가로막혀있었다. 지도에는 담양부터 영산강이던 게 바다 코앞에서 영산호가 되어있다. 아무리 탁상행정이라지만 참…….
그런데 미사에 참석하셨을 줄 알았던 니키는 그곳에 계셨다. 상향 중에 길을 헤매 돌아오실 때 녹초가 되셨고 하굿둑에 다시 도착했을 땐 이미 두 시가 넘었다고.
나는 스무 살 정도 많은 니키를 이름 부르며 친구로 대했다. 그렇게 맞먹으면서 니키의 연세를 숫자로만 알고 그에 따르는 증세는 전혀 생각을 못 했다. 군산에서 영광까지 순례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 앞에 가던 사람들은 신경 쓰지 못했던 니키를 챙겨준 벗이 있었다. 순례에는 그런 사람이 꼭 필요하다. 나와 선두는 남을 돌아보기엔 목표의식이 너무 강한 사람들이었다. 달랑 둘이 하는 이번 자전거 순례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고 중간에서 만나는 것도 어디쯤일지 가늠할 수 없었다. 혼자서 비 오는 자전거 길 57km를 완주하기도 벅찼던 나는 니키를 돌볼 순 없었다. 오히려 니키가 오며 가며 자동차로 나를 돌보신 셈이었다.
오후 네 시가 좀 넘어 자동차에 자전거를 싣고 목포신항으로 향했다.
녹슨 세월호는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인양된 2017년 10월부터 2021년 4월과 6·7월, 2022년 3월과 4월, 2023년 4월, 그리고 2024년 4월 15일. 몇 해째 가보아도 달라진 건 없었다.
차에 실은 가방에 있던 크고 무거운 카메라를 꺼냈다.
오후 다섯 시 넘어 다시 목포 시내로 와서 독천식당 갈낙탕을 먹었다. 갈낙탕은 2인분부터 주문 가능한 갈비와 낙지가 섞인 탕으로 보신을 위한 음식이었다. 탈진 위기를 모면하시고도 계속 운전하셔야 하는 니키께 그 정도는 대접해야 했다. 아울러 영양 섭취를 해야 병나지 않을 만큼 험난한 순례 날이었다.
여섯 시 조금 넘어 다시 목포대교를 건넜을 때 세월호는 안개에 싸여 보이지 않았다. 두 시간 차이인데 진즉 보고 오길 잘했다.
일곱 시에 진도에서 간단한 장을 보고 깜깜해서야 관지 하얀 집에 도착했다. 후다닥 씻고 관지가 마련해 두신 모스카토를 마시며 순례 나눔을 했다.
“니키 덕분에 저는 담양부터 영산강 하구둑까지 편하게 종주했어요. 감사해요. 그런데 제가 이기적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돕는 사람이 그걸로 만족하면 그건 이기적인 게 아니죠. 일곱째별 복이에요.
완전한 봉사가 완전한 사랑이다.”
니키는 둘째 날도 명언을 남기셨다. 그리고는 또 말씀하셨다.
“일곱째별은 내가 없었어도 혼자 종주했을 거예요.”
“… 맞아요. 힘들게는 했겠지만 아마 (종주)했을 거예요.”
그랬다. 오르막 내내 구역질하면서도 기어이 종주했던 지리산이 떠올랐다. 그때도 도와주는 이가 있었지만. 목표 지점 앞에서 나는 망설인 적이 별로 없었다.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에 직진본능은 습성이었다.
종주 달성 만족감과 그에 어울리는 달콤한 모스카토 덕분이었는지 토, 일, 월 사흘간 누적된 피로 탓이었는지 중간에 깨지 않고 숙면했다. 이번 종주의 목적은 다음 날이었다.
이날은 4월 15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