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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Apr 24. 2024

영산강 자전거 순례길 1-1

완전한 봉사는 완전한 순례. 담양댐~죽산보 76km


2024년 4월 14일 일요일 자전거 순례 첫날  

담양댐~죽산보 76km


똑똑

새벽 6시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나는 5시 대에 일어나 준비하고 있었다.


“네?”

“아침 식사하시겠어요? 커피라도.”

원장님이셨다.  

“수사님이 7시에 오신다고 했어요.”

니키는 수사님이시다.      


아침 7시에 휴게실로 갔다. 니키는 30분 전에 오셔서 차에서 기다리고 계셨다고 했다.

삶은 고구마, 반숙으로 삶은 달걀, 동그란 누룽지, 커피에 딸기까지. 준비해 주신 아침 식사는 맛있고 충분했다.      


식사 후 담양댐으로 가서 자전거 탈 준비를 다 하자 아침 8시였다. 니키와 승촌보에서 한 코스 더 간 죽산보에 주차하고 거꾸로 올라와 어딘가에서 만나기로 하고 내가 먼저 출발했다.

자전거 탈 때는 헬멧과 고글과 마스크와 장갑과 체인에 감기지 않을 몸에 딱 붙는 바지를 비롯한 간편한 옷을 착용해야 한다. 새로 산 자전거 옷은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는 데 최적이었지만, 나는 그 위에 앞치마를 입었기 때문에 저항 면에서는 일반 옷을 입었을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통기성이 탁월해 땀으로 인해 옷이 젖지는 않았다. 하긴 화창했지만 이른 아침이라 춥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아무도 없는 좁은 자전거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니 비로소 순례 느낌이 들었다. 상쾌하고 좋았다.     


한 1~2km쯤 갔을까? 맞은편에서 어떤 남자가 손을 흔들며 온다. 나도 위태롭지만 간신히 한 손을 흔들었다.

“잠깐만요.”

내 자전거나 복장 어디 이상이 있어서 알려주려는 게 아니면 아침부터 무슨? 나는 멈추지 않고 쌩하니 갔다. 그런데 잠시 후 또 소리가 들렸다.     

 

“행복입니다.”     

방금 그 사람이 따라온 모양이었다.      


“저 아는 분이세요?”

“네.”


담양 수도원장님 성함이 펠릭스라는 게 기억났다.

“원장님?”

“네. 잠깐 서 보세요.”     


담양 수도원 원장님이 자전거를 타고 오신 거였다. 자전거를 잘 타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나를 따라오실 줄은 몰랐다. 참, 자전거를 탈 때는 헬멧과 고글과 마스크를 착용하기 때문에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다. 그분은 손수 만드신 묵주를 내 왼쪽 손목에 끼워주시고 홍삼 양갱 다섯 개를 주셨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광주에 있는 담양 대나무숲까지 25km 정도 함께 타셨다.

담양 메타세쿼이아길을 지나니 죽녹원과 관방제림과 국수거리가 보였다. 2년 전 담양 글을낳는집에 있을 때 가봤던 곳들이었다. 하지만 그리움에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하루치 거리가 남아있으니까. 그런데 땅바닥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일률적으로 이동하는 송충이들 때문에 멈칫멈칫했다.

원장님은 미물이니 (밟아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벌레 입장에선 산책 나왔다가 봉변 당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주저주저 가는데도 누군가 안내해 주며 타니 놀랍게도 시속 20km가 나왔다.  


9시 25분, 행정구역은 광주지만 이름은 담양 대나무숲인 인증센터에서 원장님은 미사 드리러 수도원으로 돌아가셨다.

잠시 쉬며 물을 마시는데 저만치 무리 지어 있던 중년 남자들 중 한 명이 물었다.    

  

“아가씨~, 거기 뭐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앞치마에 쓰인 글을 말하는 듯했다.

두 번째 지구는 없다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구, 그러니까 자연을 보호하자는 말이에요.”

“그렇지. 지구는 하나밖에 없지.”     


어디서 나왔냐, 같이 다니는 사람 없냐 등 즐거운 대화는 아니었지만, 아가씨라고 불러주었으니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리 중 한 명이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자전거 앞에 달린 몸자보에 손을 대서 펼쳐 읽었다.      


“핵 발전소 없이 안전하게 살자. 아니 핵 발전소 없으면 전기세를 얼마나 내려고…….”     


지구 아끼는 데는 동의하면서 핵 발전소는 있어야 한다니……. 그리고 전기세가 아니고 전기요금이랍니다. 하지만 시비 붙으면 골치 아프다. 상대는 여럿. 묵묵히 있는 게 상책이다.      


거기서부터 31km를 혼자 탔다. 니키는 혼자 타는 나를 안쓰러워하셨지만, 비로소 혼자가 되니 무념무상 페달 밟는 행위가 좋았다. 힘든 길도 거의 없는 자전거길이라 사고 날 위험도 별로 없고, 일요일이라 타는 사람이 많아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다. 자전거길 옆에 야구장이 여럿 있고, 야구 경기를 하는 이들도 많았다. 광주에는 야구 애호가가 많은가 보다.      


11시 25분. 자전거길에서 올라가 뾰족뾰족한 투구처럼 위압적으로 생긴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곳이 승촌보였다. 영산강 문화관과 캠핑장이 있는 데다 휴일이라 사람들이 북적였다. 강가에는 이명박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공식 표지석이 커다랗게 있었다.  

    

‘2009년 11월 22일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중 가장 길이가 짧고 규모가 작은 영산강의 승촌보에 와서 기공식을 했다. (중략) 승촌보는 2009년 11월 10일 착공했다. 주민들에게 토지 수용 공문을 보낸 시기는 공사 5일 전이었다.’

위 문장의 출처 송기역 글, 이상엽 사진의 <흐르는 강물처럼>을 보면, ‘수몰되기 전 마을에서는 가락시장에서 판매되는 돌미나리의 60퍼센트를 공급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돌미나리와 함께 영산강변 하천부지에서 논농사를 지어왔다. 너른 들녘은 4대강과 함께 국가에 수용되었고 농민들은 일터를 잃었다.’     


그러니까 4대강 사업을 반대했던 나는 4대강에 보를 세워 물을 막고 그 옆으로 나 있는 자전거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민망한 일이 또 있을까.      


12시가 되자 9시 반쯤 죽산보에서 출발하신 니키가 18km를 거슬러 도착하셨다. 승촌보로 올라오는 길을 놓치셔서 잠시 헤매셨다고 했다. 우선 니키도 국토종주 자전거길 여행 인증 수첩을 사셨다. 그리고 ‘두 번째 지구는 없다’ 앞치마를 입은 두 사람은 컵라면과 떡과 캔커피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13시쯤 출발했다.


14시쯤 가니 영산포 홍어의 거리가 나왔다. 그렇다면 나주. 벌써 담양, 광주 거쳐 세 도시를 지나오다니 대견했다. 황토돛배선착장길을 지나는데, 가로수 꽃잎이 벌써 다 진 벚꽃보다 화려했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전구였다.      


나주 황토돛배선착장길


‘세상에. 나무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무가 아니어서 다행인 가로등


화를 품고 나무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건 나무가 아니라 나무 모양의 가로등이었다. 섣부른 분노가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을 식히려고 강 자락에서 잠시 앉아 쉬었다. 나뭇가지에 연둣빛 새순이 나고 있었다. 포근한 봄이었다. 선착장을 오가는 황토돛배가 영산강에 유유히 떠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조류가 밀물일 때 목포 앞바다에서 영산포까지 황토돛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어선이 드나들고 물류집산지가 되면서 나주 영산포는 번영했었다. 그러나 하굿둑이 건설되면서 뱃길은 끊겼다. 영산강은 보와 하굿둑 사이에 갇혀서 마음껏 흐르지 못하는 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위에 떠다니는 황토돛배는 관광 유람선에 불과하다. 아래위로 보를 유지해야 수면을 높여 황토돛배 관광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는데 보로 인해 흐르던 강이 막혀 수질 오염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영산강은 4대강 중 유일하게 식수로 쓸 수 없는 물이 되었다고 한다. 가짜 나무 가로등이나 보로 막아 억지로 수량을 늘려 뱃놀이하는 품이나 부자연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14시 30분쯤 앙암바위가 나왔다.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정읍을 떠나기 직전이었던 2022년 6월이었다. 연초에 김진숙 복직 투쟁 최장기 48일 단식했던 느리가 복식 여행 코스 중 한 곳으로 내게 왔었다. 그때 남원과 나주에 가서 느리의 지인들을 만났는데, 그때 나주 3M 해고노동자 박관서 노조위원장이 나주 곳곳을 관광시켜 주었다. 그때 나주박물관과 앙암바위와 홍어의 거리에 와보았다.

그때부터 다음 해 4월까지 느리는 종종 연락하는 친구였다. 그런데 하죽도에서 문자가 왔을 때 내가 다음날 연락하자고 하고는, 다음 날 뭍으로 나오자마자 절망감에 연락처를 모두 삭제하는 바람에 아직도 연락을 못 하고 있다. 그게 벌써 2년. 그동안 그이가 나를 찾지 않았으니 아직도 연락처가 없겠지만, 애초에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나이니 내 탓이다. 그런 기억이 앙암바위 입구를 보자 스쳐 지나갔다. 지금까지 내가 지나쳐 온 전국 구석구석의 수많은 장소에 사람과 연관된 기억들이 얼마나 많을까.      


15시. 죽산보에 도착했다. 승촌보와 달리 죽산보는 황량했다.

식사 시간 빼고 틈틈이 쉰 것 포함 6시간에 76km. 체력이 약간 남았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광주로 돌아왔다. 딸기 세 상자를 방문 선물로 사서.      


천주의성요한병원의 건물 3층 의료봉사수도회는 니키의 집이다. 그리고 수도회 313호 게스트룸이 그날 내 숙소였다. 70년대 스타일의 방에도 담양과 마찬가지로 현관 입구의 옷장과 싱글 침대와 책상과 의자로 가구는 같았다. 거기에 1인용 소파와 소형 냉장고가 추가되었을 뿐. 병원과 함께 운영되는 곳이라 실내는 따뜻했고 온수도 펑펑 나왔다. 씻고 입었던 옷을 세탁해서 비치된 건조대에 널고는 침대를 보았다. 오래된 담요에 하얀 면 시트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옷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순간 물밀 듯이 유년의 추억이 솟아올랐다.    


18시쯤 근처에서 황태콩나물국밥과 만두로 식사를 하고 니키가 관장님으로 계신 한국 대건관구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니키는 천주의성요한의 정신 호스피탤러티 HOSPITALITY(환대) 50년 역사를 정리하고 계셨다. 사진 중에서 스물여섯 살의 니키를 보았다. 몇 년 후 니키는 수사가 되신 지 50주년을 맞으신다. 그곳은 엄률수도회였다. 그러고 보니 금녀의 집에 여자인 내가 있었다.    

  

20시가 넘어 그날 순례 나눔을 했다.

니키는 이 순례를 더 많은 사람이 할 수 있도록 알렸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건 내게는 힘든 일, 나는 각자의 스타일이 있다고 했다. 내 마음속 탈핵 벗은 나까지 다섯. 강원도 양양 지경리를 함께 걷던 우리는 독수리 5남매였다.      


“올 초 영하 10도에 7번 국도 완주 도보 순례를 하고 나서 생각한 게 있었어요. 다음엔 7번 국도를 고성부터 부산까지 자전거로 순례해야겠다고요. 그런데 고성까지 자전거 가지고 가는 게 너무 힘든 거예요. 누가 날 거기 데려다주고 차로 먼저 내려가서 쉬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오늘 그런 게 가능해진 거예요. 니키가 저를 담양에 데려다주고 가셨고, 다시 죽산보에서도 니키 차로 왔잖아요. 꿈이 이루어졌네요.”


“완전한 봉사는 완전한 순례예요.”     


아~ 니키는 명언을 하셨다. 완전한 봉사는 완전한 순례.      


그날 밤 자리에 누웠는데 사람에 대한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메시지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청명이나 니키와 달리 나는 늘 혼자 또는 극소수의 벗들과만 순례했다. 낯가림이 심한 데다 순례에서까지 사람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섯 중 가장 성격이 모나고 까탈스러운 내가 유일하게 모든 벗의 집을 다 가보았다. 그냥 간 정도가 아니라 가서 자기도 하고 얼마간 지내기도 했다. 심지어는 수도회까지.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어찌 보면 나는 원만하지 않은 대신 사람을 아주 깊이 대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을 열고 준 사람에 한해서는 끝까지 변치 않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 그걸 의리나 믿음이나 우정 혹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자로 잰 듯 계산하거나 따지지 않지만, 준 것보다 더 많이 받는다. 서로에게서. 그렇게 나는 청빈의 극치인 두 수도원에서 환대받으며 이틀 밤을 보냈다.           


담양댐에서 죽산보까지 나를 태우고 달린 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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