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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감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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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Jun 05. 2024

thanks for the lovely notebook

마지막 감사 일기-매일 공책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벽 여섯 시 반에 일어나 전날 모아놓은 욕조 물로 현관부터 계단까지 깔끔하게 물청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전날 저녁부터 꼼꼼히 읽어보던 공책들을 마저 읽었습니다.

학기 초부터 매일 쓰기 과제를 담은 학생들 공책입니다.

중간에 한 번 걷고 돌려주면서 이번에는 주제를 정해서 쓰라고 했습니다.


감정, 행복, 좋아하는 것들, 감사, 발견, 칭찬, 명언 운동, 사람, 사진 등


자신이 정한 주제로 쓴 학생도 있고 그냥 일기처럼 쓴 학생도 있습니다.

대부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두 줄이라도 그날의 마음을 기록했습니다.

참 잘했습니다.


매일 느끼는 감정에 대해 쓴 학생은 교수님이(제가) 자신에게 기쁨을 주신다고 썼습니다.

제게 배우면서 느끼는 기쁨과 제 마음을 통한 기쁨이 있다고.

학교 수업을 들으며 자신이 이렇게 듣고 싶어 하고 기쁨을 많이 느낀 것은 거의 처음이라고.

새로운 형태의 기쁨을 느껴 기쁘다고.


인도네시아에서 온 학생은 제가 항상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는 분이라고, 저처럼 진심을 다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기를 바란다고 썼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온 학생은 '우리나라 속담에 '뛰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이, 걷는 사람보다 서있는 사람이, 서있는 사람보다 앉아있는 사람이 더 낫다'는 말이 있다. 그래야만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라고 썼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로 날지는 못 해도 더 빨리 뛰어야 할 듯한 한국과는 전혀 다른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방과 후 보충수업으로 한국어 개인지도를 따로 해 주었는데 기말고사로 바빠 두 번밖에 못 하게 되어서 아쉬운 학생입니다. 덕분에 저는 에티오피아의 수도와 알파벳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민한 시사 문제에 대해 같은 의견을 가졌기에 동질감을 느껴 감사하다고 쓴 학생도 있었습니다.

제가 윤성희 사진작가의 <표지 없는 지도와 지워지는 사진들> 사진집을 보여주면서, SPC 그룹 제품을 먹지 않는다고 말했던 날이었습니다.  


일회용품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텀블러를 가져온 학생들에게 왜가리가 그린 고양이 엽서를 세 장씩 나눠준 날도 감사하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교수의 평가 점수를 받아야 하는 학생들은 억지로 혹은 좋아서 한 학기 내내 공책에 무언가를 써야 했습니다. 얼마나 귀찮고 힘들었을까요? 하지만 지금쯤 글쓰기가 점점 좋아졌음을 스스로 알까요? 그리고 간혹 놀랍게도 글쓰기 실력이 부쩍 향상된 자신을 발견했을까요?


공책 덕분에 저는 학생들의 힘겨운 생활을 알게 되어 그들을 훨씬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발전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는 크나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제 다음 시간이면 학생들에게 공책을 돌려줍니다.

아마 공책이 없는 동안 허전했을 겁니다.

다시 이어서 쓰는 학생이 있기도 하겠죠.


하지만 저는 이제 이 감사 일기를 마치려 합니다.

매일 감사하면 감사한 일이 더 생기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마음과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고자 하는 책임감으로 쉬지 않고 감사한 것들을 찾아 썼습니다. 감사 일기를 쓰지 못하는 날엔 길뜬별이나 순례길 이야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쓰다 보니 자정이 지나 다음 날 발행한 적은 있어도 쓰지 않은 날은 없었던 듯합니다.

이렇게 쓸 수 있던 원동력이 된 나의 사랑스러운 학생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앞날에 건강과 행복과 기쁨과 사랑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콩이를 퇴원시키러 가야겠습니다.



길목인에 '감사 일기' 일부을 게재했습니다.

 https://www.gilmokin.org/board_110/2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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