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동거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곱째별 Jun 10. 2024

동거 엿샛날

콩이 쾌유 일지-살아가는 조건


08:40 콩이에게 목줄을 해서 안고 바깥으로 나갔다.

모래 위에 소변을 보고는 꼭 앞발로 땅을 헤짚으려 해서 목줄을 들어 올린다. 철심 박은 다리에 무리가 가면 절대 안 된다. 남의 밭 배추에다 꼭 소변을 본다. 노지 배추 사시는 분들 꼭 깨끗하게 세척해서 드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오늘 아침은 시원하게 소변 두 번.


08:47 바깥에 있는 제 물그릇의 물을 마신다. 내가 스테인리스 그릇을 사다 놓았는데 나중에 집주인이 실리콘을 사 오셨다. 사용 직후부터 물때인지 시커멓다. 그래도 자기가 쓰던 거니 익숙할 거다.

다시 안고 올라오니 내가 전에 사다 놓은 스테인리스 물그릇의 물을 알아서 마신다.


09:00 로열 캐닌을 그릇에 덜어주니 먹지 않아서 내 손바닥에 놓으니 콩이가 먹는다.

딸기잼에 약을 섞어 손가락에 묻혀 주니 핥아먹는다. 아침 임무 완료.


수제 요거트가 거품 나고 물과 분리되어 묽고 맛이 지나치게 시다.

종균을 주신 릴리에게 문자로 물어보니 밖에서 이틀 있었으면 종균이 죽었을 거라 하신다.

그리고 한 말씀,

'살아가는 조건이란 모든 존재에게 나름대로 중한 포인트~~~^^'



17:20 나가고 싶어 하는 표정이라 밖에 데리고 나갔다. 덜 마려운지 두 번 소변.

저만치에서 오토바이 탄 남자와 목줄 안 한 시커멓고 커다란 개가 오길래 얼른 콩이를 안고 돌아섰다. 콩이를 안은 내 걸음은 느리고 큰 개도 오토바이도 빨라 어느새 그 개가 가까이 왔고 남자의 오토바이도 다가왔다.


"콩이 퇴원했어요?"

"네. 그런데 두 달 간 걸으면 안 되고 실내에 있어야 돼요. 다리에 철심 박아서."

시커먼 개는 계속 콩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남자는 "괜찮아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큰 개가 거슬렸다.


"얘가 큰 개 트라우마가 있을 거예요."


남자는 냉큼 갔고 개도 따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안고 있는 콩이의 뒷발이 덜덜 떨고 있었다. 한동안.


집 앞에서 내려주니 제 실리콘 그릇의 물을 마셨다.

상추밭에 월요일에 누군가 하얀 비료를 뿌려주었는데 상추가 죽어가고 있었다.

정읍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상추가 떠올랐다. 그 상추는 밭을 이전해도 잘 자랐는데 얘네들은 비료를 뿌려줘도 죽어가네. 작년엔 상추가 잘 자라서 왜가리네 원도심레츠에도 한 봉지 뜯어다 주었는데 올해는 시원치 않다. 상추 하나 제대로 못 키우면 뭘 키울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콩이 하나 돌보는 것도 벅차다.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상처 부위 소독을 해줘야 하고 발과 넥칼라도 걸레로 닦아줘야 한다. 그리곤 칫솔 간식을 주니 잘 먹는다.


창문을 끝까지 활짝 연 첫날이었다.


20:10 콩이가 켄넬에서 나오려고 애를 쓴다. 뭔가 마려운 듯. 철문을 열어주었더니 나와서 착 앉는다. 목줄을 채우라는 표시다. 답답한 목줄을 자청해서 하라고 하다니. 문득 10년 전 썼던 개에 관한 에세이가 떠올랐다. 개와 인간과 신에 관한.

이번엔 순종에 대한 단상이 떠올랐다. 그토록 순종적이라서 사랑받는 개. 순종이 안전을 보장한다는.

그동안 정해진 틀이 싫어 얼마나 자유롭고 싶어 발버둥 쳤던가. 그래서 벗어나면 또 울타리나 품을 그리워하고는. 그랬다. 캔넬 나사를 조이던 날 이 넓은 세상에서 안길 품 하나 없는 내 처지가 울적했었다.

내게 살아가는 조건이란 무엇인가?

책에 늘 사인해 주는 생명, 평화, 자유, 사랑인가? 그걸 모두 갖출 수 있을까?


모래더미와 다리에서 되돌아오며 배추밭과 이웃집 담벼락 등에 콩이는 여섯 번이나 소변을 보았다. 밤새 편안할 것이다. 다시 안고 계단을 올라와

20:25 물을 마시고 로열 캐닌을 손바닥 위에 올려주니 싹싹 다 먹고,

저녁 가루약도 딸기잼에 섞어 스푼으로 주니 안 먹고 손가락으로 주니 핥아먹는다.

저녁 임무 완수.


콩이 수술 부위 상처를 소독해 줄 때면 콩이 입김이 내 콧구멍으로 들어온다. 처음엔 힘들었는데 이젠 괜찮아졌다. 몇 마디 할라치면 털이 들어오는지 목구멍이 칼칼하다. 같은 공기를 가까이에서 들숨 날숨하는 콩이랑 나는 밀접하다.


20:40 콩이의 일과가 다 끝났다.

그동안 모르고 거실에서 밤늦게까지 형광등 켜놓고 글 쓰던 걸 멈추고 작은 방만 불을 켜고 거실엔 소등을 해 주었다. 그동안 콩이는 가로등 불빛 정도의 어둠에서 밤을 보냈을 것이다. 지금처럼.

동거 6일 만에 우리는 서로에게 적응했다.  



작가 정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길래 늦은 밤 긴 통화.

일주일 전 안부문자가 왔길래 설명이 길어 글 'thanks for my love in action'을 보냈더니


애 많이 썼다고.

생명을 살리느라.

자꾸 눈물이 난다더니


'별, 당신은 참


말할 수 없는 '참'이에요

말로 할 수 없는 참이고요'


그 문자가 내내 훈훈했는데 전화하는 동안 계속 운다.

코가 막히도록 운다.

생명을 살리고 지키는 일이 그토록 울 일인가.

그렇게 운다.

그게 그렇게 고맙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거 닷샛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