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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Jun 13. 2024

동거 아흐렛날

콩이 쾌유 일지-Soul Food와 소포


새벽 여섯 시 직전에 일어났다.

전날부터 준비해 놓은 김밥을 싸야 한다.

쌀을 씻어 물기를 따라 버리고 30분 불린다.

그 사이 재료를 정리한다.

오이 껍질을 벗기고 4등분 해 속씨를 도려내고 소금을 뿌려 절인다.

당근도 껍질 벗겨 길게 썰어 놓는다.

달걀 세 알을 풀어 지단을 부쳐 반원으로 잘라놓는다.

당근을 기름에 볶으며 소금을 살짝 친다.

한우 소고기 분쇄육에 설탕, 후추, 간장, 다진 마늘과 파를 넣고 달달 볶는다.


07:10 콩이를 안고 나간다.

1층 정원에 집주인이 취나물을 한가득 다듬고 계신다.

콩이가 반가이 꼬리 치며 다가간다. 가서는 등을 댄다. 좋아하고 의지한다는 뜻이다.

나물 다듬던 주인이 일어나 목줄을 쥐고 나가신다.

오늘 아침 콩이 소변은 집주인 몫이다.


나는 2층으로 올라와 밥물을 맞추고 아무래도 물이 좀 많은 듯한데 불을 켰다.

잠시 후 초인종 소리.

콩이가 왔다.

다리에 소독약을 뿌려주고는 오늘 학교 가는 날인데 어떡할까 상의.

바깥에 내놓을까 하다가 그냥 있던 현관에 두기로 결정.

콩이는 어제 통조림을 줬더니 아침 사료를 쪼끔 먹다 만다.


다시 김밥 준비.

아~ 그런데 밥이 질다. 망했다.

햇반을 10분 간 끓여 섞었다. 조금 나은 듯 그래도 질다.


김 위에 반원 달걀을 깔고 밥을 깐 후 단무지, 다져 볶은 소고기, 절인 오이, 맛살, 당근을 넣고 말았다.

그런데 너무 싱겁다. 밥에 소금을 더 넣으면 됐을 텐데 재료에 넣을 방법이 없다고 그냥 네 줄을 말았다.

유리그릇과 재활용 죽 그릇에 김밥을 담았다.

어제 담아놓은 방울토마토 두 그릇도 꺼냈다.

마지막으로 남은 캔커피를 꺼냈다.

종강 후 그 산에 재도전해서 마시려고 남겨두었던 캔커피.  

유통기한은 2024. 06. 28.

그러나 두 주 안에 커피를 마실만한 어디에도 갈 수 없다.

포부도 당당했던 계획은 콩이의 사고와 동거로 이어져 어이없이 수포로 돌아갔다.


목요일 마지막 수업이었다.

1교시에는 기획안 피드백을 해주었고

2교시에는 르포와 에세이를 보여주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쓴 공책에 대한 상으로 내가 처음으로 받은 내 책을 나눠주고, 글을 잘 쓴 학생에게는 고양이와 하트 키링을 주었다. 릴리의 낭군이 만드신 것이다.


드디어 3교시에는 인조잔디밭에 둥글게 앉아 소울푸드를 먹기로 했다.

귀여운 학생들은 자취 실력에 요리 솜씨도 좋아 새우볶음밥, 두부김치, 김치전, 유부초밥 등등을 싸왔다. 순댓국, 초밥, 핫도그, 닭가슴살, 삶은 달걀, 육회 포케 그리고 인도네시아 전통음식 부부르 끄딴 히탐과 에티오피아 전통음식인 인제라와 볶은 고기도 있었다.

모두 그 음식이 왜 소울푸드인지 설명한 후 먹었다.


나는 할머니가 싸주신 김밥-달걀을 깔고 양념한 소고기를 넣어 입이 터질 것처럼 커다란 김밥-을 싸보려고 했으나 밥은 질고 간은 싱거워 맛이 없어진 김밥을 한 개씩 먹도록 돌렸다. 매우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情 자체인 초코파이를 한 개씩 돌렸으니 만회 아닌 만회를 했다. 식사 후쯤엔 방울토마토도 한 개씩 돌렸다.



집에 오니 정갈하게 포장된 소포 한 상자가 있었다.

열어 보니 세상에 세상에 정성도 정성도 이런 정성이 없을 정도로 세심하고 아기자기한 선물 보따리가 계약서와 함께 왔다. 단정하고 예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손길, 상대를 행복하게 해 주는 마법의 손길이었다. 그런 감각은 날 때부터 따로 타고나는가 보다. 그건 정성을 넘어선 성심이었다. 정말 안심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콩이 사고 나던 날 새벽에 왔던 이메일의 결실이었다.


그날 이후 17일.

롤러코스터 타듯 인생이 견생과 함께 뒤죽박죽 동거 9일째.

올해 가장 큰 선물을 받았다.

장의자에 가만히 앉아 선물로 온 책을 읽었다. 진짜 먹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포근하고 앙증맞으면서도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책이었다. 그냥 다 멈추고 가만히 있고만 싶었다.


17:30 하지만 행복은 잠시 미뤄두고 화상회의를 해야만 했다.

실내온도 29도. 드디어 선풍기를 꺼내 틀었다.


19:15 회의가 끝나자마자 콩이를 데리고 산책. 소변 12번.


19:50 사료를 거부하는 콩이에게 닭고기 캔 반을 섞어 주니 다 먹었다.

나머지 반은 입으로 먹기 불편해 티스푼으로 떠주니 꼴깍꼴깍 잘 먹는다.

땅흙에서 살던 콩이가 도구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

가루약도 딸기잼에 섞어주니 싹싹 핥아먹는다.

저녁 임무 완료.


20시부터 초스피드로 두 시간에 구성안 수정 및 송고.


자정까지 보내온 학생들 음악을 모아야 내일 아침부터 라디오 실습을 한다.

18시간이 꽉 찬 매우 행복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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