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동거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곱째별 Jun 12. 2024

동거 여드렛날

콩이 쾌유 일지-지진과 발사와 버섯


꿈을 꾸었다.

친구들이 나왔다. 걸었다. 그중 한 명이 다음에도 또 여행 가자고 내 손을 꼭 잡았다.

꿈에 취했는지 늦게 일어났다.


08:30쯤 켄넬 안에서 커튼과 문 여는 나를 쳐다보는 콩이의 눈이 말똥말똥하다.

삐- 삐- 벼락처럼 알람이 비명을 지른다.

어디에서 들리는 소리인가 했더니 휴대폰 긴급재난신호였다.


2027-06-12 08:24 전북 부안군 남남서쪽 4km 지역 M4.7 지진/낙하물, 여진주의

국민재난안전포털 참고대응 Earthquake[기상청]


곧이어 거실 등이 흔들린다.

지진이다.

지진.

2023년 11월 30일 새벽 4:55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진동이 지나가고 다시 고요해졌다.


부안은 영광한빛핵발전소 부근이다.

경주 지진에 월성핵발전소가 위험하듯이.



켄넬 문을 여니 콩이가 화르륵 박차고 앞으로 나온다. 원래 콩이처럼 활기가 넘친다.  

08:40 물을 마신 콩이 목에 목줄을 매고 안고 나간다. 벌써 덥다.

콩이는 소변 네 번 보고 돌아와 바깥 물그릇의 물을 새로 떠주니 마시고

08:52 올라와서 물을 마시고 사료를 손바닥에 놓아주니 100g의 반만 먹는다.


잘 먹고 트름해도 아무렇지 않은 우리 사이는 참 친하다.

하지만 보통 반려견들은 배를 보이고 쓰다듬으라고 하는데 콩이는 그런 걸 할 줄 모른다.

누워보라고 해도 뭔 말인지 모른다.


아홉 시부터 바쁘다. 오늘은 콩이 병원에 가서 실밥 뽑는 날. 일명 발사(拔絲) 일.

꼬마 토마토에 열십 자를 내어 물을 반쯤 차게 냄비에 넣고 끓여 올리브유를 뿌려 먹는다.

샤워하고 머리도 감았다. 동거 이틀 후만 해도 욕실 하수구에 내 머리카락 반, 콩이 털 반이었는데 지금 흰 털은 별로 없다. 욕실에서 용변 보라는 엉뚱한 짓 대신 용변을 위한 짧은 산책을 하기 때문이다.


10:00 차에 켄넬을 싣고 콩이를 안고 내려가 넣었다.

요즘 대전 가는 길이 계속 공사 중이라 우회도로로 고속도로를 탔다.


11:00 오늘은 대전 병원 마지막 방문일. 이제 발사하고 나면 동네 병원으로 다니기로 했다.

콩이는 진료실을 거쳐 처치실로 들어가 실밥을 뽑고 나왔다. 그동안 매일 두세 번씩 소독해 준 뻘건 포비돈 액이 벗겨지고 분홍 살이 나왔다. X-ray를 보니 처음보다 뼈가 꽤 많이 붙었다. 잘 붙고 있다고 한다.


의사에게 리뷰 썼다고 하니 안다고, 원장이 따로 불러 칭찬하셨다고 한다. 좀 쑥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여전히) 책 읽을 시간 없으시죠? 지난번에 책 읽으시냐고 물어봤더니 책 읽을 시간 없다고 하셨다. 이번에도 역시 환자 때문에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했다. 내 책을 가져왔다고 하니 가져오신 거면 달라고... 아내가 책을 좋아한다고 했다. 아내라도 읽으면 다행이란 생각에 책을 드렸다. 며칠 전 새로 구입한 새 책이다. 안에는 사인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이름을 적으면 그야말로 처치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나 내 책을 주지 않는데 그 의사는 콩이의 은인이기에 고마워서 드렸다.


약을 기다리는 사이 콩이는 켄넬 안에 들어온 목줄을 밀어낼 줄 모르고 피해서 엎드린다. 줄을 빼주었다.


받은 소독약은 자몽색 스프레이, 내복약은 이제 항생제만 하루 두 번. 저녁 약에 들어있던 진통제는 빠졌다.


접수처에서 계산하며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직원이 콩이 예쁘다며 데스크에서 나와서 몸을 숙여 콩이를 본다.

동물을 그렇게 좋아하니 그 일을 하겠지.

콩이는 이제 어떻게 되느냐고 궁금해 한다.


내가 법적 견주가 되었고 다 나을 때까진 실내에서 돌볼 것이고, 그동안도 주인은 가끔 오셔서 내가 매일 산책을 시켰지만, 내년 3월이면 계약기간이 끝나서 그다음엔 어떻게 될 지 모른다고, 이렇게 인연이 깊어져서 서로 힘들겠다고......주절주절.

 

리뷰 쓴 거 봤다고 한다. '핸섬'!^^

처음에 아000 병원 갔다가 매정하게 이리 보내서 왔다고, 그런데 접수처에서도 친절하게 해주셔서 고마웠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켄넬을 너무 무거워하자 직원이 자동차까지 들어다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사람, 좋은 동물메디컬센터다.


집에 오니 유기농 표고버섯 한 상자가 와 있다.

어린이문학작가 정이 공주에서 키운 버섯을 배송시킨 것이다.

며칠 전 전화하면서 계속 울더니 나 밥 잘 먹으라고 사보내준 것이다.

고급스러워라. 요리 잘하는 사람답게 먹거리도 특별하다. 고맙다.


홍이삭과 데미안 라이스 음악에 심취하려는 찰나 SOS 문자

당일 마감이라는 박사 논문 교정

초집중 총에너지 투입으로 1교.

이후 심야 2교.


18:40 콩이와 산책. 소변 다섯 번에 6일 만에 대변.


콩이는 목줄을 현관 손잡이에 걸어두니 대리석 바닥이 차가워 좋은지 엎드려 있는다.

그런데 가만보니 물그릇과 밥그릇을 밀 줄 모르고 피해서 문쪽 끄트머리에 엎드렸다.

그제야 알았다. 개는 놓여있는 물건을 옮길 줄 모름을. 간식은 앞발로 잡고 먹을 줄 아는데 주어진 환경을 바꿀 줄은 모른다. 문득 정리하지 못하는 사람의 뇌 구조도 개와 비슷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정리 개념 자체가 머릿속에 없으면 정리할 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무란다고 고칠 수가 없는 게 당연하다.


20:30 그릇에 있는 로열 캐닌을 먹지 않기에 손바닥 위에 올려서 입 가까이 가져갔다. 고개를 돌린다. 그릇의 사료를 비닐에 담아버렸더니 먹으려 한다. 비닐에서 꺼내 손바닥 위에 놓았더니 다 먹었다. 아마 못 먹을 줄 알고 조바심이 났나 보다. 개 심리도 사람이랑 별 다를 바가 없다.

사료가 50g밖에 안 돼 보여 오늘 발사한 기념으로 닭고기 캔을 주었다. 허겁지겁 싹 먹었다.

빈 캔에 딸기잼과 저녁 가루약을 섞어 스푼으로 줬더니 고개를 돌리다가 입술에 묻혀주니 싹 먹었다.


20:40 오늘도 일찌감치 콩이 일과 완료. 현관 바닥이 차가워서 좋은가 보다.  


나중에 더워해서 바람이 더 잘 통하는 다용도실로 옮겨주었다.


벌써 실내온도 27~28도.

선풍기 한 대로 동거견과 둘이 어떻게 여름을 날 것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동거 이렛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