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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Jun 29. 2024

동거 스무닷샛날

콩이 쾌유 일지-장마 시작


오늘도 6시 대에 일어났다가 또 자고 8시 대에 다시 일어났다.

08:40 어제처럼 햇빛이 강해 느티나무 아래로 갔다. 개천에서 올라온 환삼덩굴이 호박줄기처럼 느티나무 아래로 뻗어있길래 발로 밀어 놓았다.

콩이가 자주 소변을 보는 옆집 입구 노란 달맞이꽃이 다 졌다. 분홍꽃이 오래가고 그 옆 도라지꽃도 아직 피어있다.

빨간 바가지에 물을 받아 콩이 마시게 두고 털을 빗겨 주었다.

다 죽은 줄 알았던 텃밭 식물 중 상추 몇 포기와 고추대가 아직 살아있다. 잘 자라라고 뿌려준 비료가 독이 될 줄이야. 사랑도 과하면 독이 되는 법.

  

비가 온다기에 2층 입구에 피어있는 여리여리 노란 들꽃을 잡아 보았다. 비가 오면 흔적도 없어질 본새였다. 뿌리가 있는 듯 없는 듯 쏘옥 뽑힌다. 들꽃 잡은 손으로 콩이를 안고 올라왔다. 며칠 전 다 쓴 파란 로션 병에 물을 담고 노란 꽃송이들을 꽂아 보았다. 역시 예뻤다. 억센 금계국이나 시일이 지나면 먼지처럼 흩어지는 개망초와는 다른 분위기다.


09:15 콩이에게 소독약을 뿌려주고 사료 100g을 주었더니 혼자 알아서 먹는다. 다 먹었는 줄 알고 칭찬해 주러 다가갔더니 남겼다. 손으로 집어서 입에 한 알 넣어주었더니 뱉는다. 이 녀석이.......


잡곡 한 컵에 작은 감자 네 개를 넣고 밥을 짓고 된장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물에 다듬은 국물멸치 너댓 개를 넣고 말린 표고버섯기둥 몇 개를 넣고 끓인다. 감자를 썰어 찬물에 담가 녹말 성분을 빼낸 후 썬 호박과 양파와 함께 넣는다. 담양에서 보내주신 된장 한 스푼을 풀고 네모지게 썬 두부와 굵은 채 썬 표고버섯 두 송이와 다진 마늘과 썬 대파를 넣었다. 오~ 이렇게 슴슴하면서도 맛있는 된장국이 또 어디 있을까?


일기예보를 보지 않고도 선견지명이 발달한 건지 어제 그리 많은 빨래를 해대더니만 오늘 장마가 시작되었다. 이럴 줄 알고 어제 말리던 표고를 거둬 밀폐용기에 담아 놓았다. 그리고 오늘은 나비금옥 가지를 10~15cm 남겨두고 잘라주었다. 가을에 소국을 보려면 가지치기를 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국화는 같은 흙에서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데 올 가을 어찌할지 두고 볼 일이다.


원고 하나 송고.

예전 글들을 찾아보다가 평화바람 20년 꽃마차 후원금을 보냈다. 내 자동차는 못 바꿔도 평화바람 꽃마차는 바꿔 줘야지. 문정현 신부님과 그 친구들이 편하게 다니시려면. 내가 워낙 소식에 어두워서 벌써 바꿨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차량 유지비로 사용하면 되겠지 뭐. 자동차에 기름 한 번 꽉 채워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받아 본 사람만이 아니까.


출출하진 않지만 송고 기념으로 감자 세 개를 버터에 구워 허브솔트를 뿌려 먹는다. 역시 비에는 기름맛이지. 때 맞춰 좌악 좌악 굵은 비가 내린다. 어제오늘 라디오를 듣는데 오후 2~4시 프로그램이 멘트 없이 음악만 틀어줘서 좋다.


그런데 말 끝나기가 무섭게 오후 4시 프로그램에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이룰 수 없는 꿈'이 나온다. 세종보 위 한두리교 아래에서 나귀도훈이 불러주던 노래. 그때 나는 "꿈은 이룰 수 있어야죠."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막상 지금 내게는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없다. 세종보 철거, 탈핵 이런 거 말고 나만의 꿈 말이다.


16:41 오도독오도독

콩이가 아침에 남긴 사료를 먹기 시작한다. 오호~ 가만 놔둬도 알아서 먹는군. 그래. 무얼 억지로 하라고 하면 안 하고 싶은 건 개나 사람이나 마찬가지. 다 때가 되고 필요하면 알아서 찾게 마련.

내가 지금 꿈이 없는 건 바라는 게 없다는 것이고 그건 만족스럽다는 증거다.


지금 여기 이 순간.

밖에는 비가 좍좍 오고 나는 할 일을 하다가 잠시 환기하며 브런치에 글을 쓰고 콩이는 사료를 다 먹었다.



19시가 넘자 콩이가 낑낑댄다. 밖에 비가 조금 잦아든 듯.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콩이를 안고 나갔다. 하지만 밖에는 비가 멈춘 게 아니라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막 나가려니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그래도 소변은 봐야 하니 조금만 걸어 나가 보았다. 콩이도 당황스러운지 소변을 두 번밖에 못 보았다.

들어올 때 보니 아침에 뽑아오고 남은 꽃은 예상대로 거센 비에 꽃잎 하나 자취도 없다. 다행이다. 내 거실에서 더 오래 살게 되었으니.

병중 우중산책은 득 보다 실이 많다. 콩이는 욕실에 들어가 찬물로 발 샤워를 해야 했다. 그리곤 깔아놓았던 종이 패드로 네 발을 꼭꼭 잡아 물기를 어느 정도 제거해 주고 현관에 데려다주었다.

19:35 허기져 보여서 사료 100g을 주니 혼자서 다 먹었다.



참, 오늘 나갔을 때 맞은편에서 일하시는 여자분이 말을 거셨다. 

"고생이 많으세요."

그에 대한 대꾸로 나는 깔깔깔 청량한 웃음을 웃어 보였다. 


콩이 물 끼얹은 덕분에 오늘도 집안 전체 바닥 물걸레질하고 깔끔한 마무리.

어느새 잠든 콩이를 위해 작업 장비를 작은 방으로 옮기고 거실 불을 꺼준다.

배려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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