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31정동진~망상해변~추암해변~한재~맹방해변~임원항~노곡항 84km
8월 31일 토요일 정동진~노곡항 84km(252km)
정동진 바다부채길에서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전날밤에 한 빨래는 마르지 않았지만 밖의 날이 맑았다.
기찻길을 지나 8:40 강릉초당두부로 아침 식사하고 강릉 커피를 사서 출발했다.
출발하자마자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하지만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는 법.
헌화로 지나 산을 넘어 심곡항 해안도로를 구불구불 지나다 예나 지금이나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는 합궁골을 지나치니 금진해수욕장이 나왔다.
10:14 한국여성수련원을 지날 무렵 숲 그늘이 시원했다.
옥계에서 긴 다리를 지나는데 건너편에서 땡볕에 지쳐 주저앉았던 기억이 났다. 그때 도반은 발에 생긴 물집을 살펴보고 있었다.
망상해변
10:40 동해시로 들어와 10분 후 망상해수욕장 그네에 앉았다. 나는 잠시 양말을 벗어 땀에 젖은 발을 말리고, 뷔나는 바다로 돌진하려는 듯 데크 위에 있었다.
어달해변 복잡한 동네에서 접이식 자전거 아저씨를 따라갔다. 덕분에 마을 사람이 아는 지름길로 잠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인 아저씨는 한섬해변에서 갈 길로 가시고, 나는 아저씨가 알려주신 대로 자전거 도로 역주행 방향으로 갔다. 타다 보니 동해안 길은 상행 방향으로 설계된 길이었다. 인증센터로 그렇고 주행 방향도 그렇다.
추암해변
추암해변 겨울 날짜 카페에서 흑임자 커피와 소금빵으로 점심 식사했다.
이 작은 해변을 찾아와 한가로이 쉬는 사람들이 있는데, 계속 달리는 나는 카메라와 휴대폰을 충전하는 동안 몸과 마음을 짧은 쉼으로 충전했다.
추암해변에서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 인증센터를 지나면 바로 삼척시.
한재에서 본 맹방해변
삼척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엉금엉금 올라 목마른 한재에서 맹방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기대어 맹방을 바라보던 소나무는 하나 전 산이었던 모양인데 지나쳐 버렸다. 4년 전 촬영했던 그 지점은 아니었지만, 내려다본 화력발전소는 예상보다 훨씬 길고 넓고 파괴적이었다.
한재 도로 맞은편 산 울타리에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맹방해변
맹방해변으로 들어가 발전소를 지나니 해변에 여러 사람 무리가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그 가운데 톰이 계셨다. 어제 만났던 그 톰이었다. 톰은 인천에서 온 열 명가량 되는 사람들에게 맹방해변 화력발전소의 폐해를 설명하고 계셨다.
운명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약속 없이 낯선 장소에서 조우하는. 그러려면 관심사가 같아야 한다. 같거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 결국 운명은 생각과 행동 양식이 만들어내는 인연이다. 내가 발전소 주변을 찾아다닌다면 그곳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활동하는 사람을 만날 것이고, 아름다운 정원을 찾아다니거나 문학관을 찾아다닌다면 그 역시 비슷한 관심사의 사람을 만날 것이다.
2018년 6월 여름, 맨 처음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에 다친 다리로 참가한 내게 마찬가지로 다친 발가락으로 핵발전의 원리를 설명하던 그때처럼 톰은 화력발전소의 건설 과정을 청산유수로 강의하고 계셨다. 하늘이 그에게 명석한 두뇌를 주신 건 이렇게 쉬는 날 어디에서 누가 찾아와도 맹방 해변에 나와 강의하라고였을까?
강의가 끝나고 무리는 몇 대의 자동차로 내가 지나온 한재로 향했다.
나는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맹방해변이 끝나는 지점에서 가다가 다리를 건너야 원전백지화기념탑이 나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전거길은 강 이쪽으로 있었다. 오후 4시가 넘어있었고 다리를 건너갔다 올 시간이 없었다. 강가의 조각배도 보이지 않았다.
레일바이크 대신 산 넘는 길
궁촌항을 향해 달렸다. 내륙으로 길이 나있었다. 그런데 비가 내렸다. 자전거를 세우고 가방에 레인 커버를 씌웠다.
레일바이크 정류장이 있는 궁촌항부터 초곡, 용화, 장호까지는 산을 계속 오르내렸다. 예전에는 레일바이크를 탔기 때문에 그 길이 그렇게 험한지 몰랐다.
갈남, 신남 지나 임원항에서 쉬려고 했다. 4년 전에 쉬었던 그 민박을 찾아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1km 전방에 인증센터가 있었다. 도장을 찍고 와서 쉬려고 했는데 엄청난 오르막이었다. 자전거를 타지도 못한 채 끌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올라오고 보니 다시 내려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내려가면 다음 날 그 오르막을 다시 올라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저녁 일곱 시. 해는 빠르게 지고 있었다.
노곡항
8km만 가면 호산항이었다. 그러나 날은 저물고 도로는 험했다. 아무 시설 없는 비화항 이정표를 지나 민박 표지판이 있는 노곡항으로 600m 내려갔다.
이미 깜깜해졌다. 여행객에게 숙소를 물어보니 동네 할머니를 알려주었고, 경로당에 누워계신 할머니께 여쭤보니 돌아가면 민박집이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1층 상가는 이미 불이 꺼졌고 문도 닫혔다. 다시 할머니 댁에라도 신세 지려고 돌아와 문이 닫혔다고 하니 안으로 들어가 보라고 하셨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소리 나는 2층 문을 두드리니 사람이 나왔다. 투숙객 같았다. 그분이 주인에게 전화를 해주니 잠시 후 주인이 나오셨다.
생존을 위한 간절함이 안도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주인 여자분은 제일 안쪽 방을 보여주시고 저녁을 못 먹었다고 하자 1층 상점을 열어주셨다. 라면과 햇반과 생수와 비타민 드링크제와 맥주 캔 하나와 과자 한 봉지를 샀다. 주인이 김치를 한 접시 주셨다.
방은 넓고 깨끗했다. 욕실 타일도 새것이고 샤워기 필터도 있었다.
샤워하고 빨래한 후 라면을 끓이면서 햇반도 넣어서 같이 끓였다.
탁자에 불은 밥과 함께 퉁퉁 불은 라면과 김치와 물을 놓고 먹었다. 라면을 좋아하진 않지만, 대진항 경로당이 떠올랐다. 그때도 날은 저물고 숙소는 없어서 마을 경로당에 묵었었다. 라면을 샀는데 가게 주인이 흰쌀밥을 주셨었다.
그 밤에 나는 처절히 애곡 했었다. 운다는 건 어쩌면 몸에든 마음에든 상처의 아픔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 그러고 보니 나는 꽤 오래 울지 않았다. 울지 않는다는 건 그만한 상처가 없다는 건지 상처를 딛고 일어선 건지 모르겠다. 고성에서 출발해서 지금까지 걸어갔던 길을 자전거로 되짚어 돌아오면서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아련함이 있을망정 통곡할 슬픔은 그 바다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면 슬픔이 피어오를 새라 서둘러 페달을 밟았는지도.
파도 소리 들리는 노곡항 민박에서 밤이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