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8~09 울진~망양~고래불~영덕해맞이공원~강구항 90.4km
2024년 9월 8일 일요일 울진종합버스터미널~민박 5.2km
새벽에 울진행 버스를 탈 계획이었지만 고민 끝에 갤러리에 들렀다. 소중한 사람의 친구가 온다고 했다. 검은 고양이 원두를 선물 받고 사진집을 증정했다. 갤러리 옆 매운탕 집에서 점심식사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14:15 동서울 터미널에서 울진행 버스를 탔다.
16:40 구정휴게소에서 쉰 후 다시 버스가 출발하니 동해가 보였다.
또 비가 왔다.
울진 가는 길에 근덕, 궁촌, 초곡 지나 톨게이트로 나가니 정겨운 7번 국도였다.
용화, 장호, 울진, 임원, 노곡, 호산, 나곡에서 경북으로 진입했다. 나곡해수욕장, 3리, 1리, 한수원아파트, 부구터미널.
울진 핵발전소 주변이라 송전탑이 가득한 산은 민둥산이 많았다. 2년 전 산불 때문일 것이다.
길가에는 아직 배롱나무 꽃이 피어있었다.
비가 그치고 죽변항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은어다리를 지났다.
18:20 네 시간 걸려 울진 터미널에서 내렸다.
2020년 2월 처음으로 탈핵도보순례를 하겠다고 왔던 곳이 울진종합버스터미널이었다. 그때 탈핵 벗이 아닌 낯선 사람과 처음 이 길 위에 올랐었다. 나는 경주에서 그는 서울에서 와서 만난 곳이 울진터미널이었다. 우리는 바로 옆 기사식당에서 국밥을 먹었었다. 다시 그곳에 들어가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새 새로 생긴 편의점으로 가서 컵국밥을 먹었다.
날이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4년 전에는 택시로 민박집에 갔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전거로 갈 참이다. 어둡고 낯선 길을 나선다. 자전거도 어색하고 길도 불편하다.
금방 깜깜해진 상태에서 다리를 건너 좌회전했다. 그 길엔 차량 통행도 없이 암흑이 가로막고 있었다. 무서움을 꾹 참고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해변에 나 있는 길만 따라가면 민박집이 나올 것이다.
19:20 항아리가 담장 대신 쌓여있는 민박집에 도착했다. 전에 묵었던 침대 방은 길가가 아니라 맨 안쪽이었다. 기억은 때론 불분명하다. 아래에서 뭔가 나오던 이상하게 생긴 침대 대신 더블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 하나로 가득 찬 방에는 텅 빈 냉장고와 보지 않을 TV와 욕실. 잠이 오지 않는데 끝말잇기 할 사람도 없어서 비치된 책을 꺼냈다. 책장을 넘겼더니 금세 얼굴이 가려웠다. 오래된 책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 나온 것이었다. 혼자인데도 어색한 밤이었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
9월 9일 월요일 울진 민박집~강구버스터미널 85.2km
아침 일찍 일어나 전날 사온 두유와 단백질바를 밖에서 먹었다. 실내에서 음식물을 먹으면 안 되는 방이었고, 먹고 싶진 않지만 억지로 먹어야 몸을 움직일 수 있다.
주인 여자분은 이른 아침부터 항아리 밑 정원을 손질하고 계셨다. 내 조끼를 보시곤 순례 이유를 물으셨고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었다.
7시에 출발했다.
자전거 도로가 비교적 잘 나있어, 47분 만에 망양 휴게소에 도착했다.
아침을 먹어둬야 했기에 미역들깨국을 먹었다. 무엇 때문인지 불친절과 의심으로 가득한 점원은 아침부터 밥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순례 중에 드문 일이었다. 처음으로 쌀밥을 반이나 남긴 채 더는 먹을 수가 없었다. 늘 마시는 캔커피가 용량이 많아 오랜만에 레쓰비를 사서 인증센터 쪽으로 갔다. 역시 마시지 않던 커피는 입맛에 맞지 않았다.
8:28 다시 출발해서 조금 가자 3년 전 네 명이 돌아가며 대게 흉내를 내던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세 번 넘었다.
9:30 기성항 바닷가 의자에 앉아 보았다. 햇살이 밝고 바다는 조용했다.
10:30 월송정 인증센터에 도착했다. 친구들과 함께 걸을 때 비가 왔었다. 그래서 진짜 월송정에 가보지 않았었다. 이번엔 혼자 들어가 보았다. 만 그루 가량의 소나무가 있다는 그곳 깊은 지점에 바다가 보이는 정자가 있었다. 관동팔경 중 하나인 월송정 위에는 난간에 앉지 말라고 쓰여있었다. 이번에 가져간 방석을 꺼내 처음으로 사용해 보았다. 달이 떠있을 때 와보면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혼자서 밤에 올 순 없으니.......
11:08 이후 내내 편의점이나 가게가 보이지 않다가 우수편의점에 들어갔다. 말이 편의점이지 동네 구멍가게였다. 게다가 물건도 몇 개 없었다. 오는 동안 가게가 하나도 없었다고 하자, 장사가 안 돼 다 문을 닫았다고 하셨다.
내가 즐겨 마시던 캔커피는 유통기한이 24.06.22. 대구에서 물건이 와서 그렇단다. 그래도 마셨다. 한라봉 음료도 마시고 생수 500ml도 샀다. 카드 사용은 안 됐고 현금 결제만 가능했다.
할머니는 "아이고, 여자 혼자 이렇게 다녀. 무섭지 않나." 하시더니 "그런데도 피부는 하얗네." 하셨다.
"할머니도 하얘요."
연세를 여쭤보니 나이보다 고우셨다. 내 집이니 월세 걱정 없어 장사를 하지 남의 집 같으면 못 한다고 하셨다. 이렇게 소소하게 가끔 손님이 와도 생활하시는 데 걱정이 없어 보이셨다.
가게에서 나오니 문자가 와 있었다.
친구 부친 부고였다.
나는 당일 종착지에서 자고, 다음날 한 코스 더 갈 계획이었다. 여기까지 내려오는 데 시간과 돈이 지나치게 많이 드는 건 두 번째 문제였다. 앞으로 가능한 날짜가 거의 남지 않았다.
11:54 영덕군 진입
12:00 칠보산 휴게소에 도착했다. 4년 전 9,000원 하던 한식 뷔페는 12,000원 했다. 물가 상승률이 심각했다. 평소에 먹고 싶던 호박죽에 된장국과 밥, 메밀국수와 샐러드를 먹을 수 있었다. 두 칸 앞 테이블 노중년 여성들이 내 조끼를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길을 끌었다는 점만으로도 성공이다.
12:50 출발, 잠시 후인 13:13 고래불 해변이 나왔다.
3년 전 겨울과 봄 사이, 멍 때리는 곳에 앉아 활짝 웃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번엔 반대 끝 해변에 잠시 서보았을 뿐 그곳에서 쉬진 않았다.
대진1리를 지나니 13:55 그곳이 나타났다.
내가 운전을 하고 도반이 뛰어서, 그다음엔 내가 걷고 도반이 운전해서 당일 순례 거리를 늘여갔던 그 해변. 노란 건물. 놀랍도록 또렷한 기억은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화처럼 생생했고 그날의 색채와 공기마저 떠올랐다.
이어 사진리 다음에 축산리에 도착했다.
14:22 축산항 농협하나로마트에서 더위사냥을 사서 마트 안에 서서 먹었다. 어지간히 더웠다. 유리문 밖 맞은편에는 노천 주차장이 있었다. 4년 전 그곳에 주차하고 도보순례를 시작했었다. 한참을 가다 내가 차 문을 잠그지 않은 걸 기억하고는 도반이 되돌아와 잠그고 갔던 곳이었다. 내 그런 황당한 실수가 있을 때마다 도반은 한 번도 정색하거나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대신 처리해 주고 유머로 내 미안함을 웃음으로 바꾸어 주었다. 맨 처음 울진에서 낯설었던 사람은 탈핵 벗이자 도반으로 세 번의 도보순례를 함께 했었다.
다시 페달을 밟았다. 지독한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15:33 마침내 동해안 자전거길 경북 지점의 마지막인 영덕 해맞이공원이 나왔다. 오르막 끝 지점에서 매실 주스 한 병을 마시고 황분희 부위원장님께 전화를 했다. 목소리에 병색이 완연했다. 무슨 일인가 놀라서 여쭤보니 갤러리 오프닝 날 내려가시는 길에 식중독으로 병원에 입퇴원 후 여태 기운이 없다고 하셨다. 너무 죄송했다.
“고성부터 ‘이주만이 살길이다’ 조끼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있어요. 지금 영덕에 도착했어요. 21일에 나아리까지 갈게요.”
16:40 강구항에 도착했다. 전에 잤던 민박집 앞에 텅 비었던 공터에 근사한 공원이 조성돼 있었다.
16:55 강구항 영덕 대게거리가 나왔다. 다시를 건너 방향을 좌로 트니 강구버스터미널이 나타났다.
17:00 여섯 시간 내내 머리 터지도록 고민했지만, 나는 재고 따질 겨를 없이 본능적으로 포항 가는 버스를 탔다.
18시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는데 거기선 동서울 가는 버스가 끊긴 후였다. 자전거를 접어 택시를 타서 포항 고속버스터미널로 가는 도중에 퇴근 시간으로 길이 막혀 서울행 버스는 출발했다. 하는 수없이 포항역으로 목적지를 바꿨다.
18:59 포항에서 서울역 가는 기차에 올랐다.
21:30 서울역에서 지하철로 갈아타는 데 엘리베이터가 없어 자전거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한 시간 후 서울 동쪽 끝에 있는 장례식장에 헬멧 쓰고 노란 조끼 입은 내가 초록 자전거를 끌고 나타났다.
친구와 자매들과 친구들이 있었다.
검은 옷도 못 입고 쫄쫄이 자전거 옷을 입은 내가 문상을 하자, 친구 언니들 말소리가 들렸다.
“OO야, 네가 뭘 하든 응원해.”
그것으로 충분했다. 강구에서 포항까지 자전거 순례 도중 지나치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이주만이 살길이다. 월성원전이주대책위’도 중요하지만, 내가 아는 단 몇 사람만이라도 이 사실을 안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새벽까지 장례식장에 친구와 함께 있었다. 내일 일은 난 모른다. 남은 날 중 언제 다시 강구에서 나아리까지 115km 자전거 순례를 이을 수 있을지 정말 모른다. 한마디로 나는 즉흥적이고 대책이 없다. 그러나 이번 순례를 통해 변화한 자신을 알아챌 수 있었다.
8월 26일 북천철교에서 봉포해변까지 26km만 더 갔더라면, 8월 29일과 9월 8일 갤러리에서 사람 맞이하지 말고 새벽차로 내려와 월송정까지 33km 더 탔더라면, 9월 9일 구순이 넘으신 친구 부친 장례식장에 다음 날 가고 포항까지 50km만 더 타고 갔더라면, 21일 나아리까지 가는 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사람이 우선이었다.
순례가 일이라면 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사람, 대의명분이 아닌 개인의 인연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이제 개강했고 더는 시간의 여유가 없다. 그러나 나는 달라진 내 모습에서 변화를 느꼈다. 이제 앞으로 내가 하는 순례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