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와 동백 덩컨
9월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남원역에서 나를 기다리던 자동차는 내가 너무 늦게 와서 심통이 났는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밤 9시 넘어 긴급출동서비스를 불렀다. 방전이란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남원역에서 25km, 그중 깜깜한 산길을 2.5km 올라와 귀정사에 다다르니 세찬 바람에 나무가 운다.
숲이 운다. 윙윙.
보광전과 관음전과 맞은편 만행당과 내가 있는 요사채. 건물 넷의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하다. 하늘엔 구름 사이 별 하나가 보였다. 담력 테스트를 하듯 그 어둠을 뚫고 옆 건물에서 샤워를 했다.
다음 날이 밝자 여섯 시쯤 화장실에 가려고 밖으로 나왔다. 요사채를 도는데 종이 보였다. 관목들이 싹 잘린 것이었다. 나보다 일찍 돌아온 하늘소 작품이었다. 서울에서 받아온 카모마일 차를 마시고, 나도 배롱나무에 죽은 가지 하나를 톱으로 잘라내었다.
점심 식사 후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다섯 달 만이었다.
툇마루에 작은 상을 펴고 새로 산 A6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꺼냈다.
첫 스케치북을 지난 3월 귀정사에서 다 쓰고 새 스케치북을 서울 교보문고에서 골랐다. 몰스킨을 마다하고 산 하네뮬레인데 첫 국산 스케치북과 쌍둥이처럼 크기가 딱 맞았다. 눈대중으로 골랐기에 두 수첩을 대보니 속도와 강도가 딱 맞는 뽀뽀처럼 기분이 좋았다.
내가 그리고 싶은 건 당연히 그분방 앞 배롱나무였다. 8월에 꽃잎이 지는 줄 알았는데 9월에 더 붉어진 배롱나무. 두어 시간 후 색연필을 칼로 깎았다. 그동안은 연필깎이 기계로 깎았는데 칼로 깎아보고 싶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엄마는 매일 밤 연필을 칼로 깎아 필통에 너댓 자루를 나란히 넣어주셨다. 그 연필 끝부분에는 나무를 잘라 내 이름을 써준 엄마의 글씨가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오면 연필심은 뭉뚝해져 있었고 그건 내가 필기를 얼마나 많이,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뿌듯한 증거가 되었다.
엄마는 저녁밥을 먹고 설거지를 다 하고 나면 연필들을 깎아 필통에 가지런히 꽂아주셨다. 방 한 칸에 다섯 식구가 살던 그 시절이 내 기억엔 가장 행복했다. 우리만 있었으니까.
3학년 때 대가족이 되고 나선 우리의 단란하던 생활은 엄마의 중노동으로 이어졌다. 두 배는 더 되는 요리를 해야 했고 청소도 빨래도 양이 훨씬 많아졌으니까. 살림만 하던 엄마는 가내수공업까지 도와야 했으니까.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전셋집 그만 전전하고 내 집을 마련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내 집을 사자마자 2년 만에 돌아가셨으니까.
저녁밥을 먹었다. 휴가 가셨던 공양주 보살님이 하루 일찍 오셨다. 따순 밥과 호박볶음과 김치 콩나물국. 맛있었다. 일주일 만에 산동이에게 갔다. 반가워 짖는 산동이를 데리고 마을로 내려가는 길에 갔다 왔다. 우산을 쓰고.
드디어 남원 귀정사에서 대전으로 주 2회 출퇴근을 시작했다.
나에게도 직장이 생긴 것이다. 비록 일 년짜리지만 계약서를 쓰고 당당히 출근한다.
잡지 취재기자와 출판 편집부원에서 방송작가에서 르포작가에서 요양보호사에서 대학교 겸임교수라니 참으로 각색 깃털이 한 몸뚱이에 붙은 공작새 같다.
빗속에 왕복 네 시간. 긴 거리와 시간이지만 할 만했다. 거처가 없는 지금, 이 정도만 해도 감사하다. 게다가 내가 잘할 수 있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전공을 살리는 일이라니, 하늘은 내게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셨다.
그사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만행산 천황봉 올라가서 별 보기 목록이 생겼다. 누구와 갈지 궁금하다.
추석
아침나절에 깨끗이 샤워하고 차례상을 차렸다.
송편과 배와 사과와 복숭아와 구운 달걀과 캔커피와 주스. 갖고 있는 음식들을 작은 상에 골고루 올려놓았다. 복숭아는 제상에 올리지 않는 품목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니까 올렸다.
마침 옆 보광전에서 목탁소리와 함께 제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를 다 묵상하고도 제는 계속되었다. 이상하게 가보고 싶었다. 지난봄과 올여름과 가을, 두 달 넘게 있으면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대웅전인 보광전이었다. 열린 문으로 슬쩍 들여다 보았는데 위패에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先 세월호 여객선 희생자 靈駕’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중묵처사님이 오른쪽에, 한 남자분이 왼쪽 조금 뒤에 앉아계셨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제를 지내다니 8월 말에 떠날 계획이었던 귀정사에 계속 머물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귀정사는 설, 백중, 추석, 이렇게 연 3회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제를 지낸다고 한다. 지난 음력 7월 보름이 백중이었다. 그날 나는 외출했었다. 지루한 장마 중 유일하게 반짝 비가 그친 날이었다.
달을 기다렸다.
하늘엔 구름이 많았고 귀정사엔 나무들이 많았다. 숲이 우거져 작년 해남보다도 훨씬 늦게 뜬 달을 기다렸다.
마침내 달이 떴다.
달에게 빈 소원은 ‘하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요즘 나는 소원을 빌지 않는다.
순리, 무욕. 하늘 뜻을 아는 나이이지 않은가. 내 뜻이 하늘 뜻이고 하늘 뜻이 내 뜻이다.
결국
일요일에 오신다던 공양주 보살님이 편찮으셔서 따님 보살님이 사흘간 공양주로 원정 오셨다. 유일하게 쉼터에 있는 내가 돕는 게 당연했다.
죽순무침과 버섯과 무조림과 콩나물 김칫국 등 저녁밥이 아주 맛있었다. 그런데 밥을 다 먹고 이틀 전에 내가 끓여놓은 된장국이 아까워 두부와 호박을 건져다 먹었다.
너무 짰다. 그 짠맛이 밤새 몸을 괴롭혔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서 아깝다고 맛없는 음식을 먹어 몸과 마음을 망치는 나를 보았다. 절약이 언제나 미덕은 아니었다. 그동안의 노력과 정성이 아깝다고 이미 지난 것에 연연하지 말자. 깨달음을 얻었다.
다음 날 아침, 아니나 다를까 변을 보니 피가 났다. 몸과 마음 중 뭔가 불편하다는 표시였다. 몸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점심 식사 직전 공양간 책장에 있는 책을 살펴보다가 현경 교수의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 원. 할. 거. 야.>를 발견했다.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그날이 지나기 전에 다 읽어버렸다. 숨 돌릴 수 없이 스펙터클하고 세계관이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20년 전에 쓰인 책인데 그토록 혁명적이고 강인하고 아름답고 세련될 줄이야.
저자의 당시 나이보다 열 살 쯤은 더 먹은 나는 책 속 저자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고고한 귀정사 어둠 속에. 전생을 끊고 후생으로 나아가는 지점에.
본격적으로는 2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면 7년째 한발 한발 밟아온 과정이다.
이 도도한 흐름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다만 흘러갈 뿐이다. 흐름이 인생이라면 그 물살에 나를 맡기는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가수 민해경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비장하게 노래했지만 내 인생이 어디 나만의 것이던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고 그걸 받아들임도 인생이다. 이제 나는 내 뜻을 주장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게 모두 좋으리라는 확신도 없다. 순간순간 진심을 감지하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뿐이다. 그러다 보면 가장 좋은 길로 인도되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는다. 요즘 항상 마음에 되새기는 말씀은 이것이다.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밤새 바람이 세게 불어 무서웠다. 새벽 세 시 쾅쾅 문 부딪히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요의가 느껴졌다. 해 뜰 때까지 참아보려 했는데 힘겨웠다. 30여 분 지나 방문을 열어보니 보광전 가운데 문이 열려 법당에 있는 전기촛불 빛이 새어 나왔다. 방 유리창 문도 열려있었다. 창문은 닫았는데 보광전 문은 닫으러 갈 수가 없었다. 이미 이른 밤에 오른쪽 문을 닫으러 간 적이 있었다. 황금빛 어른거리는 불상 셋을 또 볼 자신이 없었다. 내가 불자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개신교 모태신앙이다. 내 안에 신상(神像)이 있다면 예수상이나 십자가다. 이성적으로는 모든 종교를 존중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감정은 정직하게 드러난다. 아무리 오전 10시와 오후 5시에 중묵처사님이 치는 종소리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하더라도 뼛속 깊은 신앙심을 지울 순 없던 것이다.
다음 날 오후,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다 고통스러운 실패로 끝났다.
처음엔 내 불찰이라고 자책했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데 도우려고 한 자신에 대한 질책이었다. 지독히 놀라고 당황스럽고 무안하고 부끄러워 방에 돌아와 블랑쇼의 <카오스의 글쓰기> 한 권을 독파했다. 어디든 생각을 돌릴 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두꺼운 책의 어느 한 줄 감동이 없었다.
살기 위해 생각했다. 부처에게 찾아와 욕설을 퍼부었던 제자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부처님은 잔칫상을 잘 차려놓아도 먹지 않으면 차린 사람 몫이라는 비유를 하셨다.
귀정사에 너무 오래 있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별 대신 비
주말에 이다가 왔다.
이다를 맞아서 간 남원역 앞 추어탕 집에서 지난 3월에 만났던 먼방지기와 어머니를 만났다. 인연이란 바로 그런 우연이다.
텐트를 배낭에 넣고 천황봉으로 향했다. 별 보러 하는 산행인데 하늘엔 구름이 잔뜩이었다. 두 시간 내내 오른 산길 끝 정상에는 노을이 막 지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무지개가 떠있었다. 텐트를 치고 맥주캔을 따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앉아있기 힘든 텐트에 누워서 밤 9시도 되기 전에 잠이 들었다. 새벽에 깨니 한 시 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세 시쯤 다시 잠이 들었다. 그만 일어나라는 소리에 깨보니 아침 8시가 넘어있었다.
“이러니 그동안 어디서든 살았지.”
참 잘도 자는 내게 하는 소리였다.
우리는 산에서 내려와 백년초 콩국수를 먹고 오름 커피를 마시며 당근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불었다.
내 출판과 취업 축하였다. 내 성공에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 이다. 진정한 친구의 모습이다.
책과 눈
귀정사 예술제를 앞두고 산동이를 목욕시켰다.
예술제에는 해남의 나무가 초대가수로 왔다. 반년만의 해후였다.
다음 날 우리는 순천으로 갔다.
나무가 용화사에서 합창단 반주를 하는 사이 산책 후 좋은인연 스님과 차를 마셨다.
합창연습이 끝나고 우리는 함께 순천 사랑어린학교로 갔다.
거기 관옥나무도서관에서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만났다.
두 주 동안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을 두 번 읽었다.
악을 분별하려던 나는 사랑과 희생에 대해 숙고한다.
그리고 마지막 밤, 드디어 마르셀 프루스트의 한 권으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했다.
2년 3개월.
참으로 오래오래 걸렸다.
이제는 자리 잡을 때가 되었다.
언제든 뛰어갈 수 있는 성전 옆에 내 정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는 절에 와 있었다.
산속 흙집인 둥글레방에서 일주일, 배롱나무가 앞에 있는 대웅전인 보광전 옆 요사채 그분방에서 두 달.
올해도 무와 배추를 심었고, 옷깃의 도움으로 하얀 앞치마를 손바느질로 만들며, 스태들러와 파버 카스텔과 함께, '푸른 옷소매'와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서 보낸 아름답고 고운 시간도 있었다.
있는 동안 거의 매일 산동이 산책을 시켰는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귀정사 예술제 후에 산동이를 산책시켜줄 분이 나타나셨다.
무엇보다 내가 머물기를 바라는 고마운 마음들이 소중했다.
귀정사에서 받은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지만, 취업 기념 십일조 개념으로 업소용 가스레인지를 선물했다.
그동안 점화도 제대로 되지 않는 가정용 가스레인지로 수백 수천 명의 밥을 해 주신 공양주 보살님에 대한 감사였다.
그리고 대책 없이 나왔다. 떠나야 할 때 떠날 줄 아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되뇌며.
마지막 인사 때 눈으로 말하는 게 무엇인지 비로소 알았다.
날이 막 추워지기 직전인 시월 중순이었다.
배롱나무 옆에는 2월에 정읍에서 이다가 사줘서 3월에 귀정사에 가져와 5월에 담양에서 (화초 '이사도라' 옆에 있다고 해서) '덩컨'이라고 이름 지은 동백 화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