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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글을낳는집 정원일기 3

글집 친구들

by 일곱째별


내 방에서 보이는 닭장에는 닭들이 산다. 수탉 한 마리에 암탉 열두 마리 정도 되는갑다. 아무리 세어봐도 그때마다 다르다. 그런데 그중 몇몇 닭의 등은 털이 홀랑 벗겨져 붉은 살이 보인다.

사모님이 수탉이 편애를 한다고 하셨다. 미워서 털을 뽑는다는 줄 알았는데 실은 올라탄다는 것이었다. 즉 교미한다는. 홍삼 등 좋은 걸 많이도 먹였더니 수탉의 기운이 넘친단다.


나는 닭이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지 모른다.

수탉의 사랑을 듬뿍 받아 등털이 뽑힌다면 암탉 입장에선 행복일까, 불행일까?

만약 남편 사랑 많이 받은 아내의 머리카락이 홀라당 뽑힌다면? 민머리가 되더라도 섹스하려고 할까?


텃밭의 상추를 뽑다가 먹기엔 좀 시든 게 있거나, 수박을 썰거나 먹고 남은 부분을 닭들에게 갖다 주면 닭들이 몰려온다. 용기 있는 암탉 몇 마리가 오고 곧이어 수탉이 와서 ‘꼬끼오’ 하고 울어준다. 다른 닭들에게 먹어도 된다는 신호인지, 먹을 게 와서 좋다는 표현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수탉과 친한 닭들은 먹이가 왔을 때 거리낌 없이 달려와 쪼아 먹는다.

그런데 유일하게 오지 않는 닭이 있다. 하얗고 작은 닭이다. 식탐을 보이지 않는 품이 도도해 보이기도 하고 무리와 어울리지 않고 따로 노는 게 내 모습 보는 것 같아서 어떻게든 그 닭은 먹이려고 시도해 봤다. 그러나 하얀 닭은 한 번도 먹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사모님이 그 닭은 오골계라고 하셨다. 겉은 하얗고 속은 까만 오골계.



물까치

회색 몸에 까만 머리 물까치는 까맣고 하얀 까치보다 몸통이 작고 날렵하다.

내 방 근처에 물까치가 자주 온다. 토독토독 양계장 양철지붕을 밟기도 하고 고양이 먹이를 탐내기도 한다. 한두 마리에서 서너 마리 떼 지어 올 때도 있다. 건조대 위에 앉기도 하는데 기껏 이불 빨래를 해서 널어놓으면 똥을 싸놓고 가기도 한다.


2년 전 토지문학관 매지사 동남향 방에 있을 때도 창문 너머 전기선에 물까치가 날아와 앉아있는 걸 매일 보았다. 그때는 아주 먼 물까치였지만 지금은 내 방 창문 위아래로 연신 날아온다. 창 아래 고양이 사료를 먹으러 오기 때문이다.


물까치는 매우 시끄럽다. 꽥꽥거리며 우는 게 날렵한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 물까치가 꾀꼬리처럼 운다면 얼마나 좋을까? 청각이 민감한 내 마음에 들기에는 부족하지만, 물까치와 함께 사는 게 싫진 않다. 새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생활이 어찌 싫으랴.



고양이

글집의 터줏대감은 고양이 방울이다. 노란 얼룩이인데 귀는 찌그러졌고 왼쪽 눈도 부었다. 하지만 이 고양이는 애교대장이다. 처음 그네에 앉아있던 나를 만나자마자 그네로 올라와 내 허벅지에 제 머리를 올려놓았다. 그땐 너무 더러워 만질 수가 없었다.


“부담스러워. 부담스러워.”

그렇게 몸을 멀리했다.


그러다 어느 낮에 풀밭에 발라당 누운 녀석의 배를 문질러 주었다. 녀석은 애무를 받는 듯 하염없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몸을 돌리며 누워있었다.

한 달이 넘자 녀석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진드기를 잡아 떼주었다.

가끔 초저녁 산책길에서 돌아올 때 집을 나서는 녀석을 길에서 만났다. 그럼 녀석은 콘크리트 바닥에 또 발라당 눕는다. 만져달라는 신호다.

밤늦은 시각 창 아래 와서 울기도 한다. 그래도 절대 나가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녀석은 온 동네 암고양이들을 다 휘젓고 다닌단다. 밖에서는 무얼 하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건 이 녀석의 아내가 죽고 딸과의 사이에서 새끼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손녀와도 정을 통했다는 사실이다. 누가 딸이고 누가 손녀인지 모르겠지만 둘 다 아내가 된 건 맞다. 엉망진창인 근친상간을 개족보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본 바로는 고양이족보가 더하다.


유월 말쯤 가느다란 아기고양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닭장 앞 덤불 위에 노란 아기고양이 두 마리가 똑같이 생긴 어미랑 있었다. 어미는 쉬지 않고 새끼들을 핥아주었다. 사람들이 많이 기웃거리면 장소를 옮기기도 한다는데 한 번 옮긴 그 자리에서 계속 있었다.


칠월 중순이 넘었을 때 나는 고양이 간식을 구해와 몇 알씩 주었다. 녀석들은 야생이라 해남 백련재 고양이들 같지 않고 거리를 멀리 두었다. 여차하면 달아날 궁리를 하는 게 역력했다.

존재 자체가 귀여운 노랑 아기고양이 두 마리에게 간식을 줄 때면 저만치 장작더미에서 내 쪽을 바라보는 얼룩 아기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그 녀석의 어미는 유월 말에 글집 어미개 까미에게 물려 죽었다. 아비는 노랑이다.

아비가 같은 세 마리 중 노랑 두 마리는 어미가 있어서 늘 셋이 붙어있는데 얼룩 한 마리만 따로 있다. 돌봐주는 어미도 아비도 없으니 당연히 경계심이 더 많다. 먹이를 먹으러 갈 때도 직진으로 가지 않고 장애물을 돌아서 간다. 그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았다.


나는 길을 갈 때 사람 많은 대로를 놔두고 늘 사람 없는 골목으로 돌아서 다녔다. 누가 나를 쳐다보는 게 싫었다.

어린 시절 사람들이 쑤근거리던, “쟤네 엄마 돌아가셨다지?” 혹은 “쟤 엄마 없는 애야.” 그런 말이 들리는 듯했다. 그런 눈초리를 받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동정받을 이유가 없었다. 공부도 잘했고 이쁘장했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들었다. 반에서는 인기투표 1위였고 어른들은 항상 칭찬을 해주셨다. 그랬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엄마 돌아가시고 불쌍한 아이가 되어 버렸다. 천성이 깔끔해서 구분이 심했지만, 그때부터는 더욱 외톨이로 지냈다.


얼룩아기고양이가 내가 놓아둔 간식을 먹는 걸 보는데 문득 고등학교 때 기억이 떠올랐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아이가 내 앞에서 자기 엄마 이야기를 했다. 엄마 무릎에 누우면 엄마가 제 얼굴에 난 여드름을 모나미 볼펜 끝으로 짜준다는.

나는 친구들에게 중학교 때 엄마 돌아가신 이야기를 터놓고 한 적이 없었다. 그 아이는 다른 중학교 출신이었고, 전혀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내게 엄마가 안 계신 줄 모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얼굴이 희고 몸집이 퉁퉁하고 공부는 그다지 잘하지 못했던 그 아이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 부러웠던 기억과 감정이 얼룩 아기고양이를 보는데 불쑥 떠올랐다.

노랑 아기고양이 두 마리가 엄마 품에서 장난칠 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얼룩 아기고양이는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고 가슴 아플까? 게다가 그 얼룩 아기고양이는 제 어미를 물어 죽인 개와 한집에서 살고 있다. 다른 곳에 가서 살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촌장님이 사료 주시는 이곳을 떠나선 살 수 없을 것이다. 아직은 너무 어리니까.

얼룩 아기고양이는 벌써 나무를 탄다. 비록 놓치지만 새도 잡으려고 살금살금 기어갈 줄도 않다. 노랑 아기고양이들보다 훨씬 민첩하다. 첫눈에 보기에는 노랑 아기고양이가 귀엽지만, 가만 보면 얼룩 아기고양이도 못지않다.

내가 이 글집에 있는 동안은 얼룩 아기고양이를 더 챙겨야겠다. 엄마가 되어줄 순 없지만 너를 더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반딧불이

7월 들어 옆방에 온 사람은 헤아려준이었다. 세월호 생일시 앨범 프로젝트를 제작한 이, 자동차에 붙인 노란 리본 스티커만으로 호감이 생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지 않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어떤 분야 종사자에 대한 피해의식이었다.


사람이나 사물에 다가갈 때는 모험이 필요하다. 가까이할 사람인가 믿을만한 사람인가 등등 타진의 시간이 필요하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헤어질 것이었고 그 후론 모르거나 잊어도 될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한 번 더 인간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건 헤아려준의 열린 마음 덕분이었다.


논둑을 걸어갔다 돌아오는 길, 밤이 깊었다.

논 옆에 물 대는 곳에서 뭔가 반짝반짝거렸다.

반딧불이였다.

축복이었다.

사람을 다시 한번 믿기를 잘하였노라.

그건 축하였다.

‘따뜻해졌어.’ 마음이.



꽃병

그 꽃병은 서울을 떠나기 전 내가 가장 사랑하던 공간에 있던 것이었다.

중국제 같은 청색 문양이 흰 바탕에 구불구불 이어진 꽃병이었다. 그 공간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물건이 내게로 와 내 공간의 아름다움을 장식해 주고 있었다. 아무리 누추한 공간이라도 그 꽃병에 들꽃 한 송이 꽂아놓으면 내가 있는 공간은 공방이나 화실이나 서점이나 카페가 되었다.


진도에서도 내놓지 않았었다.

담양에서도 한동안은 꺼내지 않았었다.

내 취향을 남의 방에 부려놓고 싶지 않았었다.

그런데 방에서 꽃을 보고 싶었다. 잘 가꾼 정원에 가득한 꽃은 나를 위로해 주지 못했다. 그래서 차 안에 있던 꽃병을 꺼내 놓았다. 처음 한동안은 쑥갓꽃을 꽂아놓았다. 쑥갓꽃이 시들 무렵엔 도라지꽃을 꺾어다 두었다.


장기 외출하기 직전이었다.

꽃병을 비워 평소 놓던 자리가 아닌 곳에 두었다.

지연된 약속 시각에 미적거리던 시간, 문득 그날 일정을 소화하려면 영양제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이 든 가방을 앞으로 잡아끄는 순간 옆에 있던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건드릴 줄은 몰랐다.

40cm 높이에서 떨어졌다고 깨지는 건 너무했다.

꽃병은 붙일 수도 없이 조각조각이 나버렸다.

받아들이기에는 가슴이 심하게 아팠다.

하지만 남원에서 전기스탠드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을 때처럼 울지 않았다. 뜨듯해진 눈시울로 꽃병 조각을 오래 입어 늘어나고 찢어진 생리 팬티로 감쌌다. 파편에 누구라도 다칠까 봐 비닐에 싸고 또 쌌다. 그리곤 닭장 옆 아궁이 앞 종량제봉투에 넣었다.


차로 집을 떠나면서 뒤늦게 생각이 났다.

차라리 글집 어느 나무 아래 묻을 걸, 그래서 나중에 아주 나중에 이곳에 다시 오면 흙을 파서 찾아볼 걸.

그러나 그 또한 무슨 미련이랴. 깨진 조각을 붙일 수 없듯이 떠나간 인연은 잡을 수 없다. 아무리 아쉬워도 떠난 사람에게 갈 수는 없다. 떠난 사람이 찾아오기 전에는 만날 수 없다.



샤워가운

타월로 된 갈색 샤워가운이 있다. 하도 오래 입어 색이 바래고 올이 풀린 것도 모자라 지난해 해남에선 목덜미에 곰팡이가 시커멓게 슬었다. 여름 습기가 그렇게 옷을 망치는지 처음 알았다.

담양에 와서 곰팡이를 견디지 못하고 칼라 부분을 칼로 잘라냈다. 그리고 자른 단면을 실로 시쳤다. 듬성듬성한 바느질은 중력을 견디지 못한 목덜미 부분이 찢어지는 걸 막지 못했다. 구질구질하고 낡은 샤워가운은 새 정원이 생기면 잘라서 걸레로 쓸 것이다. 그래도 십 년간 잘 썼고 특히 정원을 찾아다닌 지난 2년 간 어디에 있든 내 몸을 귀하게 감싸는 데 소용되었으니 옷으로써는 그 어떤 것보다 소임을 다했다.



노을

입주한 지 보름이 넘어도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곳을 모른다는 아동문학 작가에게 쓰레기통을 알려주러 뜰로 나갔다. 나간 김에 모자 개 까미와 깜돌이에게 간식을 주었다. 온종일 집 안에 웅크리고 있어 아픈가 걱정되던 깜돌이가 냉큼 튀어나왔다. 먹을 것이 활기를 준다.


저녁 식사 후라 잠시 집 앞을 걷는데 하늘에 분홍색 구름이 군데군데 퍼져 있었다.

처음 보는 홍색이 점점 진해져 진홍색 새들 같은 구름이었다.

구름을 사진으로 남겨보려고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불과 몇 초 사이였다.

사진기를 챙겨 나오자 하늘엔 분홍 구름이 사라지고 없었다.

기록이 뭐라고 그 순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다니.


갑자기 인생이 덧없어졌다.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흔적 없이 순식간에 사라질 인생, 뭐 그리 아등바등 애걸복걸 사는가.



옥수수

5월에 심은 고추, 가지, 오이, 옥수수 중 옥수수를 7월에 수확했다.

다른 것들은 사모님이 반찬으로 만들어주셨고 옥수수는 함께 땄다.

사모님께서 내가 심은 것을 가기 전에 먹어보게 하신다고 서둘러 익은 것만 따게 해 주셨다.


옥수수 따는 법은 다음과 같다.

삐져나온 수염이 까맣게 마른 것을 아래로 휙 꺾으면 뚝 부러진다.

겉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얇게 남긴다.

수염은 껍질이 거의 다 벗겨졌을 때 뽑으면 후두둑 뽑힌다.


우리가 딴 옥수수는 사모님 표로 알맞게 삶아져 식탁 위에 올라왔다.

심고 거두는 기쁨을 담양 글을낳는집에서 달콤하게 맛본다.



나무

이곳에는 내가 아는 두 나무가 있다.

한 그루는 은행나무로 텃밭 가는 입구에 있다. 한 그루인 듯 두 그루인 나무다.


또 한 그루는 내 방 창에서 보이는 단풍나무다. 단풍나무는 언젠가부터 유독 싫어하는 나무다.

어느 날 보니 단풍나무로 웬 가시나무 세 줄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남 괴롭히는 건 못 참아 차에서 낫을 가져왔다. 가시에 찔려가며 세 그루를 다 베어냈다. 베어내면서 생각했다.


'대체 너는 그렇게 싫어하는 단풍나무를 왜 돕는 거냐?…….'


그것은 좋고 싫음보다 옳고 그름에 기우는 성향이나 자신보다 타자를 더 생각하는 인류애 때문이다.

때로 그러한 특성은 나 자신을 무척 힘들게 한다. 그럴 때마다 현경 교수를 키우신 어머니를 생각한다. 그런 위대한 분 덕분에 이 시대에 현경 교수라는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지 않았느냐고.


내친김에 근처에 있는 관목들도 베어냈다.

나중에 사모님께 보고하니 가시나무는 찔레였고 촌장님이 꽃 보신다고 놔두신 거란다.

아이고 이런~.

하지만 사모님은 쳐내고 싶어도 못 하시던 걸 객식구인 내가 쳐내서 속이 시원하신 모양이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예쁜 조끼와 여름 원피스를 선물로 주셨다. 전 같으면 비움 실천한다고 안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주시는 것들을 받는다. 주는 사람의 마음을 받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입주 작가 중 한 분이 당신 신간을 받지 않는 나 때문에 놀라신 후, 받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분은 여태 자신의 책을 줬을 때 받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두고두고 말씀하셨다. 내가 아무리 짐을 줄이는 중이고, 받지는 않았지만 그 작품을 잘 읽었다고 말씀드려도 서운함이 오래가는 듯했다.

나는 글집에 온 작가들의 책을 새벽까지 다 읽고는 공동 책꽂이에 꽂아둔다. 저자의 책을 받고도 읽지 않는 사람보다 받지 않고도 읽는 내가 낫다고 생각한다.



담양을 떠나기 직전, 집 앞 다리 위에서 개천을 내려다보았다.

하트 모양의 돌이 있었다.

밭과 나무를 괴롭히는 번식의 왕 환삼덩굴이 어쩌다 만든 사랑.

담양 글을낳는집이 떠나는 내게 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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