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꽃마리
그 정원은 그동안 거쳐온 다른 정원과는 달랐다.
각종 꽃과 나무와 다양한 야생화로 잘 가꾼 완벽한 정원이었다. 텃밭도 어찌나 깔끔한지 상추를 비롯한 온갖 쌈채소에서도 빛이 났다. 그곳에는 촌장님과 사모님과 개 두 마리와 고양이 세 마리가 살고 있었다.
담양의 그 정원은 작가들에게 집필실을 제공해 주고 음식도 챙겨주는 집필촌이었다.
이름은 글을낳는집.
다섯 개의 방에 화장실이 세 개인 한 채와 본채에 딸려 화장실 하나를 공동사용하는 방 둘이 집필실이었다. 입주작가 성별 비율에 따라 매달 집필실이 바뀌는데 내가 입주할 당시에는 여성 작가 수가 많아 여자 다섯 명이 한 채를 썼다.
오월의 첫날 오후 늦게 도착한 나는 남은 방 둘 중 햇빛이 더 들어오는 서향 방을 택했다.
아무르강, 그방, 고래뱃속, 도청. 유독 내 방에만 이름이 없었다.
무명, 나쁘지 않았다.
매일 아침에 사모님이 만들어 날라오시는 국과 반찬은 요리연구가의 솜씨였다. 약초와 유기농 채소와 직접 키운 닭의 알 등을 이용한 요리는 가히 일류 한식집 수준이었다. 5대 영양소와 자연색소를 이용한 화려한 색감이 꽉 찬 그 음식을 먹고도 대작을 낳지 않으면 미안할 만큼 황송한 음식이었다.
입주작가 중 강원도에서 감자만두와 감자떡을 가져온 분이 있었다. 덕분에 입주 직후 저녁 식사를 다 함께 모여 하게 되었다. 김치만두와 곤드레 고기만두는 별미였고 알록달록 감자떡도 일품이었다.
그날 촌장님의 새 시집 출판을 축하하며 입주작가들이 돌아가며 그분의 시를 낭송했다. 밤이 깊어지며 서로 낯섦이 한 꺼풀 벗겨졌다. 자연스러운 입소식 및 환영회 겸 축하 자리였다.
하루는 낮에 작가들이 모두 모여 삶은 머윗대 껍질 까는 일이 있었다. 노닥노닥 머윗대를 까고 있자니 사모님이 맨드라미 레몬차를 타오셨다. 정열적인 빨간 빛깔이 카르멘의 옷자락처럼 예술이었다.
다음 날 머윗대와 방풍잎이 가득한 오리탕이 나왔다.
어디서도 쉽게 먹어보지 못한 귀한 음식이었다. 오랜만의 보식(補食)이었다. 수년간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온 기나긴 길 위에서 알게 모르게 쌓인 여독이 풀리기 시작하는 듯했다.
저녁이 어스름한데 사모님이 꽃밭에 앉아계셨다. 가까이 가보니 강원도에서 온 노루오줌을 심고 계셨다. 봄에는 햇살이 강해서 저녁때 꽃을 심고 가을에는 오전에 꽃을 심는다고 하셨다. 맨손으로 꽃을 심고 잡초를 뽑으셨다. 조리에 물을 한가득 담아 와 흠뻑 주셨다.
그 옆에 불두화가 있었다. 어느 해 화려한 불두화의 낙화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오월이었다.
사모님은 참꽃마리와 등심붓꽃도 곧 꽃을 피울 거라고 하셨다. 막 피어난 연푸른 빛 참꽃마리는 자잘하고 고왔다. 들꽃이 관상용 화초보다 더 예쁘게 가득한 정원이었다. 그중 소나무는 촌장님 내외분의 금실과 닮은 연리지였다.
어린이날이 창평 장날이었다.
사람 북적이는 날 나갈 생각은 없었는데 무선 키보드에 건전지가 수명을 다했다. AAA 건전지 두 개 사러 창평으로 나갔다. 장을 한 바퀴 돌고 슬로시티에 가보았다. 남극루 앞 아름드리나무 아래 한참을 앉아 있었다. 햇빛 강도가 줄어들 즈음 돌담을 따라 한옥 마을을 휘 둘러보고 성당처럼 보이는 교회에 들어갔다.
105년이 된 창평교회였다. 문이 열려있었다. 안에 들어가 오른쪽 맨 앞자리에 앉았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내 뜻이 아닌 신의 뜻대로 되기를.
지천명이면 하늘 뜻을 알 나이인데 아직도 내 뜻과 하늘 뜻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듯하다. 이제는 어린아이 같은 내 주장을 멈춘다.
글을낳는집에 돌아와 노루오줌이 자리를 잡았나 들여다보고 나서 밭으로 갔다. 쌈 채소밭을 지나 파밭으로 갔다. 허리를 90도로 굽혀서 멀칭 비닐 구멍 사이사이 촘촘이도 난 잡초를 잡아 뽑는 일은 오랜만이었지만 손맛이 있었다. 한참을 허리 숙여 뽑고 나니 네 이랑이 깔끔해지고 내 허리는 지끈거렸다.
마당을 돌아오는 길, 연푸른빛 참꽃마리가 전날보다 더 자잘하게 피어나 있었다.
그날 늦은 밤, 처음으로 밖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집필실 바로 위에 북두칠성이 떠 있었다.
해마다 머리 위에서 북두칠성을 보는 달은 오월이었다.
입주하자마자 택배가 두 번 왔다.
한 번은 사흘째, 또 한 번은 엿새째.
막내동생이 보낸 선물이었다.
지난 정원에서 받은 커피 그라인더-핸드밀 원두 분쇄기와 같은 브랜드로 맞춘 도자기 핸드 드리퍼와 유리 서버와 드립 스탠드와 필터 홀드와 필터, 우드 커피 스쿱과 동생이 직접 볶은 커피 원두였다.
마침 마지막 원고 교정을 보던 때였다.
5년간 무보수로 연재하던 글을 마무리하는 데 근사한 의식이 필요했다. 커피 원두를 갈아 드리퍼에 끼운 종이필터에 붓고, 끓인 물을 부어 뜸 들인 후 다시 내려 커피를 마셨다. 로스팅한 지 5일 된 에티오피아 G1 예가체프의 맛은 약간 시면서 깔끔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초고를 그대로 실을 것인가, 아니면 감출 것은 조금 삭제할 것인가.
말하지 않으면 솔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 정직 강박증은 무방비 상태로 글에 자신을 노출했다.
어느 심사평에 그런 문장이 있었다.
‘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이면 읽는 사람은 수치를 느끼게 된다.’
남의 추문을 퍼뜨리면서 누군가를 공격하는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무마하려는 사람들, 혹은 세상을 죄악으로 물들여 도덕적으로 하향 평준화하려는 사람들에 비하면 제 잘못을 까발리는 사람들은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정제되지 않는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 남는 상처는 오롯이 듣거나 보는 사람이 감내해야 한다. 차라리 보지 말고 듣지 말 것을 하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적당히 삭제하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집필실로 들어와 수정한 교정본을 송고했다.
다음 날, 길도 없는 뒷산에 기어 올라갔다.
인제 그만 걸어야지 했는데도 미지의 세계가 자꾸만 나를 불렀다. 산길을 헤치다가 건드리는 식물들에서 뿌연 가루가 퍼져나갔다. 포자식물의 번식을 사람인 내가 왕성하게 도와주고 있는 셈이었다. 거칠고 험한 산을 오르고 또 올라 산등성이 가까이 가니 커다란 바위를 쪼개고 우뚝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아무 바탕 없이 황량한 바닥에서 혼자 여기까지 온 내 모습처럼 보였다.
“멋져요. 소나무.”
소리 내 칭찬해 주었다. 마치 나도 그 모습을 닮고 싶다는 듯.
내려오는 길, 글을낳는집 파란 지붕이 보일 때쯤 땅바닥에 옅은 푸른빛이 아른아른거렸다. 고개 숙여보니 정원에 있던 참꽃마리였다. 하늘하늘 두 송이씩 피어난 야생화 참꽃마리. 꽃말은 '행복의 열쇠', '가련'.
글을낳는집은 산자락을 정원에 옮겨 놓은 곳이었다.
그 산의 기운을 받아 포자처럼 내 글도 여러 사람에게 퍼져나가려나.
오월 산에서 정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