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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글을낳는집 정원일기 2

선물

by 일곱째별


선물

시집이 한 권 왔다.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창비시선 475 송경동 시집이었다. 침대 위에서 꼼짝 않고 다 읽고는 내 차로 갔다. 밀폐된 공간에서 울었다. 엉엉 소리 내어. 숨겨둔 맥주 캔 하나를 마셨다는 건 굳이 밝히고 싶지 않지만.


-읽는데 욕이 나오는 詩는

좋은 시인가 나쁜 시인가

씨------바.


읽다가 자꾸 눈물이 울컥울컥 나오는 시는

대체 어떤 시인가


술을 부르는 시

시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는 시

왜 前 詩集에는 동지라고 쓰더니

이번엔 그냥 ----께라고 썼냐고

따지고 싶은 시는

누구의 시인가


열혈투지 부동의 자세로

단숨에 몰아 읽고는

이런 시를 쓰면 어떡하냐고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어

기어이 오열하게 만드는

이런 시를 쓰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시인이냐고


내가 할 수 있는 욕은 시인의 말이 시보다

감동적이라는, 말도 안 되는 딴지.


2022. 5. 12.



쓰레기를 주우며 긴 산책을 다녀오니 커다란 택배 상자가 하나 와있었다.

대구 보인으로부터였다. 영남대 의료원 해고노동자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전 지도위원.


엘리트 초콜릿, 프링글스, 푸딩, 견과류, 구미구미, 빠삭 칩스, 트루팁스 말랑, 데니시타 쿠키, 맛밤, 으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 맥스봉!


쿠키 상자에 분홍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일곱째별님~~

글을 쓰는 일은 고독한 일인 것 같아요.

그 고독을 도반으로 삼아 글을 낳는 일에 에너지가 되시길 바랍니다만 안 써져도 넘 애쓰지 마시고 걍 즐기시길 더 바랍니다.

햇살 좋은 오월에 보인~~'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음은 참 좋다. 든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랑스럽다. 그 자랑스러움에 보인이 보내준 간식을 입주작가들과 나눠먹었다. 그리곤 곧 미안했다. 보인이 고공에 있던 227일 간 나는 무얼 해주었나. 사모님이 만드신 마늘 꾸지뽕 약선 고추장을 보내드렸다.



송별회

5월 말 경 입주작가들과 간 곳은 슬기로운 담양생활 <슬담>

한옥을 개조한 특이한 곳이란 정보만으로 간 그곳은 만족도 최상이었다. 그곳에서 소설을 쓰자마자 일 년 만에 등단한 분,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후 일 년 만에 등단한 분... 각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5월 송별회를 무려 세 번이나 했다.

한 번은 수요일 저녁, 한 번은 갤러리 기역+책방 개업식 차 광주 나들이 다녀온 토요일 저녁, 마지막은 모두 떠나기 전날인 월요일 저녁.

퇴소와 입소 사이에는 빨래가 산더미다. 각자 깔고 덮던 이부자리를 빨아놓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말일 전날, 보슬비가 왔다. 새벽부터 세탁기는 쉬지 않고 도는데 빨래를 널어도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날 다리 밑에서 하트 모양의 바위를 발견했다.)

말일 퇴소와 첫날 입소 사이에는 청소와 소독도 이루어진다. 사모님 혼자 알코올 소독과 유한락스 청소까지 하시는데 고되 보이셨다. 나는 다른 방 커튼을 분리해 세탁하고 유리창을 닦았다.

사모님은 나를 곁에 두고 살고 싶다고 하셨다.

정말 고마운 말씀이다.


5월 퇴소일, 사모님이 겹작약꽃차와 산목련차를 내어 오셨다.

시골 출신 시인 남편 앞장 세워 아무것도 모르던 도시 여자가 산골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12년 전 이곳에 자리 잡고서 첫 추운 겨울을 모질게 나고 산에 오르셨는데 노루귀가 피어 있었단다.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나무 밑에서 자라는 노루귀가 하도 기특해서 ‘노루귀도 저렇게 겨울을 이기고 살아남았는데…….’하며 기운 내셨다는 사모님.

전국 레지던스 중 글을낳는집에서 가장 훌륭한 점을 꼽는다면 단연 사모님의 음식이다. 사모님은 각 작가의 체질에 맞는 음식을 해 주셨다. 덕분에 몸이 찬 나는 열이 나는 음식을 여름 내내 먹어 추위를 덜 타게 되었다.


4~5월 입주작가 시인 릴리가 갔다.

젊은 시절 아주 어려운 형편에서도 백합 한 송이를 샀다고 해서 내가 붙여준, 그이의 이메일주소 이름 릴리-b.




경사

6월, 새 입주작가들이 오셨다.


매일 서쪽 창으로 해가 졌다.

연둣빛이 초록으로 짙어지며 해 지는 시각은 조금씩 느려졌고 햇살 세기는 차차 더 강해졌다. 갈수록 잠드는 시각이 점점 늦어졌다. 그럴수록 일어나는 시각도 늦어졌다.


새벽에 문자 도착 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떠보니 아직 방 안이 어두웠고 커튼 밖으로 여명도 아직 시작되지 않은 상태였다.

대체 누굴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휴대전화기를 열어보니 오전 4:36.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

OO

너의 글들이 아프다

보고 싶다 OOO


짐작이 가는 인물이었다.


-내 글 무얼 읽었기에

내가 아픈 걸 알까?


아니면

그저

읽은 이의 마음이

늘 아픈 걸까?

이 새벽에...


정말 낯설다

보고 싶다는 말도

내 이름도


내 본명을 아는 사람 중 최근까지 연락하는 이는 거의 없기에.


-울지 마

죽지 마

OOO


결국 오전 5시 대에 전화가 왔고,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집필실에선 방음이 안 돼 통화를 제대로 할 수가 없으므로.

신새벽이 찼다.

논길을 걸으며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했다.

아침 7시 넘어 집필실로 들어오니 한랭 두드러기로 몸에 울긋불긋 두드러기가 돋아 있었다.

다시 잠을 청했다.

집필실의 좋은 점은 방 안에 있을 땐 거의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업 특성상 서로의 예민함을 알기에. 함부로 노크하거나 문을 열지 않는다. 타인의 생활에 불쑥불쑥 들어가지 않는다. 자신의 사생활을 보호받고 싶은 만큼 타인의 생활도 보호한다. 그건 불문율이다. 가끔 경계를 넘어서는 작가들이 생기면 집필촌의 경고를 받는다. 정도가 심하면 퇴실 조치도 당한다.



둘만 남게 되면 무언가 말하고 싶게 만드는 분위기에 휩싸인다.그러나 쉽사리 내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는다. 비밀에 경중이 있을까만은 받은 만큼 주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도 있기로 했다. 시인 시아에게서 얻은 건 반가사유상처럼 말없는 미소.


다음 날 우리는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로 갔다. 누룩꽃이 핀다는 시골빵집이 목적지였다. 그런데 그 옆 천년나무에게 소원을 빌었고 물염정을 보았다. 비가 내렸다. 그리고 이틀 후 마침내 염원하던 출판 계약을 하게 되었다. 내가 빈 소원은 그게 아니었는데.......


그날 밤 파티를 열었다. 나는 창평군에 나가 피자와 치킨과 샴페인을 사 왔다. 모두 잔을 부딪혔다. 시아는 자신의 시를 낭독해 주었고 동화작가 윤은 ‘바람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주말이었다.

입주작가 셋이 담빛예술창고에서 오르간과 반도네온과 첼로 공연을 보았다. 5년 만에 찾아온 친구 덕분이었다. 담양에서 헤어진 줄 알았던 인연 둘이 다시 이어졌다. 그중 하나였다.


아르헨티나 반도네온 주자의 자작곡 중 Sweet Dreams를 듣다가 눈물이 났다. 내 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룰 수 없는 아름다운 꿈.


계약 건으로 서울에 갔다.

간 김에 미용실에 갔다. 반년이나 일 년에 한 번 가는 곳이다. 내가 보내준 선물 <포트윌리엄의 이발사>를 다 읽었느냐고 물었다. 전에 왔을 때는 아직 다 못 읽었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다 읽었다고 했다. 그 책을 사준 건 그가 휴무일인 월요일에 일부러 문을 열고 내 머리카락을 잘라주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그런 일은 최초라고 했다. 게다가 그는 전날 동해에서 바닷물에 밀려온 나무를 줍고 있었다. 나 때문에 동해에서 달려와 휴무일에 영업장 문을 열어 준 그에게 절판된 책을 중고로 구해 부쳐주었었다. 단지 제목 때문이었다. 벌써 두 해 전 일이다.


그는 책을 다 읽었으나 자기와 그런 삶은 거리가 멀다고 했다. 나는 그에 답을 했다.

“저는 정말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런데…….”

순간 울컥했다.


“그럼 그걸 목표로 사시면 되잖아요.”

“아니에요. 이번 생은 포기했어요. 내가 살고 싶은 인생과 살 수 있는 인생이 다른 것 같아요.”


주책없는 눈물이 삐져나와 티슈를 뽑아 눈에 댔다.


계약한 출판사와 첫 미팅을 하고, 족히 5년 만에 파마를 하고 담양으로 돌아왔다.

거실 책상 위에는 관지가 보내준 소변 거즈 다섯 장이 담긴 봉투와 책이 한 권 있었다. 입주작가 에세이 <먹실골 일기>. 연재하던 정원일기와 비교되었다. 깊이 있는 사색과 박식함이 따라갈 수가 없었다. 높은 자가 낮게 행동해야 겸손인데 나는 본래 낮은 자라 겸손할 수가 없었다.

그 주말 출간기념과 내 출판계약 축하 겸 송별회 자리에 화려 무쌍한 초계탕이 등장했다.




광양과 하동

유월 마지막 화요일에 시아와 광양에 갔다. 릴리를 만나기 위해. 새벽까지 서류를 작성하고, 아침에 잠시 잔 후, 오전에 서류를 접수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다음 날 멀리 가는 시아에게 운전하게 할 순 없었다.


광양 유당공원은 사뭇 원림과도 같이 연못이 있는 정원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공덕비도 있었다.


얇게 저며 살짝 양념을 입힌 쇠고기가 나왔다. 릴리가 숯불에 구워 접시 위에 가위로 잘라주었다. 나는 파채와 쇠고기 조각을 상추쌈에 얹어 날름날름 먹기만 했다.


식사 후 간 전남도립미술관은 작년 6월, 순천에서 광양으로 걸어오자마자 마주한 건물이었다. 그때 들어가 보고 싶었던 곳을 다음 해 현지 작가 안내로 가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소장품 상설전인 <흙과 몸> 중엔 강요배의 그림 <산방산>이 있었다. 그걸로 족했다. 박치호 개인전 <BIG MAN>은 회화, 조각, 드로잉 등 70여 점으로 구성되었는데 일단 거대한 크기로 압도했고, <부유>는 드로잉을 나무에 조각해 우레탄 페인팅을 한 다양한 기법과 전시 방식이 돋보였다.


빨간 새가 있는 잔디밭을 지나 광양예술창고에 들어갔다. 전이수 작가의 그림이 가득한 카페에서 따뜻한 카페라테 위 하얀 하트를 마셨다. 셋은 손등 위에 붙인 전남도립미술관 스티커를 모아 사진을 찍었다. 우정은 때론 앙증맞은 행위로 상징된다. 비록 오십 대지만 우리는 소녀 중의 소녀들이었다.


다음 코스를 정할 무렵, 자연스럽게 가장 젊거나 혹은 자리를 잡지 못한 내 위주로 결정이 기울었다. 섬진강 드라이브 코스를 준비한 릴리에게 하동 박경리 문학관까지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다음 날 장거리 운전으로 집에 가야 하는 시아와 여행을 가야 하는 릴리는 그렇게 내 요청으로 빗길을 달려 박경리 문학관으로 갔다.


작년 여름 ‘난 특별히 문학을 내 인생과 갈라놓지 않습니다. 내 인생이 문학이고, 지금 문학이 내 인생입니다.’라고, 마치 비극적 운명을 예견하듯 알려주신 박경리 선생님을 다시 뵈었다. 나는 문학관이 아닌 화장실 옆에 붙은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는 선생님의 마음을 잘 알 듯했다. 나 역시 그러고 싶은 마음이니까. 하지만 일 년 후 그곳에 다시 불러주신 선생님의 뜻을 살펴 나 역시 문학인의 길을 가게 될 듯한 상서로움에 몸을 움츠렸다.


문학관에서 나와서야 알게 되었다.

시아는 두 달 전에, 릴리는 불과 며칠 전에 그곳에 왔었음을. 나 때문에 와 본 곳에 또 왔음을. 대체 왜 가는 데마다 그런 사랑과 배려를 받을까.


다음 날인 비 오는 수요일에 시아는 떠났다.

그리고 윤과 나는 산책하다가 소나기를 맞았다.


이틀 후 윤도 갔다.

그이는 글집에서 주문해 입던, 채도 낮은 분홍빛 블라우스를 선물로 주고 갔다.

그렇게 입주작가들의 언니 사랑을 풍성히 받던 담양의 5, 6월이 지나갔다.



경經

7월 첫날, 나는 윤이 주고 간 블라우스를 입고 광주 갤러리 기역으로 갔다.

강재훈 사진전 <지율스님의 경經>

선생님 작품을 광주 작은 갤러리에서 만날 줄이야. 사진학교 사람들을 광주에서 만날 줄이야.

제자가 개관한 갤러리에 기꺼이 작품을 내어주신 이번 전시회는 이전 서울의 대규모 사진전들과는 달라 내게는 결 맞는 충격이었다.


파괴되는 자연환경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천성산과 내성천의 아름다움과 지율스님 맨발의 숭고함으로 그려져서 이율배반적이었다. '사진보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강재훈 선생님과 목숨 걸고 천성산과 내성천을 지킨 지율스님. 두 인물의 만남이 강모래 위 십자가처럼 청미했다. 그 가르침이 선연했다.


강재훈 선생님의 글은 사진 못지 않게 유려하다. 그래서 글쓰는 나는 전시회마다 선생님의 사진보다 글이 더 궁금하다. 그때마다 내 감상은 이렇다.

시가 담긴 가슴이 시적인 사진을 찍는다.


이번 선생님 작품은 막 세상에 나오려고 하는 내 글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지표나 예시 같았다. 언젠가 나만의 정원이 생기면 그 집에 꼭 걸고 싶은 사진들이었다.


이후 담양에서 남은 한 달은 선생님 작품 중 어느 작품을 소장할까 내내 고민하는 나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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