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걸, 은행나무
30년 지기 친구가 새벽 기차를 타고 왔다.
대한민국에서 이름난 작가인 그가 특강 강사로 이 먼 곳까지.
한동안 나는 그를 불러보지 못한 호칭으로 생각했었다.
마음 속에 그런 대상 하나쯤 두고 싶은 그런 존재로.
그는 항상 철없는 소년 어른이었고, 나는 늘 인생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소녀였다.
요 며칠 살살 몸이 아프기 시작이다.
상상 못 한 무례함와 몰상식과 냉정함에 예민한 몸과 마음이 곧바로 반응하고 있다.
즉각적으로 사람이 싫어지기 시작하는 이때,
상식과 지식과 친절함과 관대함이 뭔지 정확히 알고 게다가 위트까지 겸비한 사람을 만나니 공기층이 맑은 햇살처럼 따스하고 밝아졌다.
처음 보는 수사가 가득한 그의 책을 접한 학생들은 진도가 나가지 않아 나처럼 끙끙대면서도 필사와 소감과 질문지를 작성했다. 그중엔 나도 못 쓸 정도로 수준 높은 질문들이 있었다.
작가가 놀랐고 나는 자랑스러웠다.
질문에 대한 답 속에서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회복과 금기를 말했다고 한다.
주인공인 파라의 엄마와 주인공의 딸 파라와 파라의 남자친구 모하와 작가가 혐오에 정점을 찍은 기득권층 남성 셋-성폭행을 일삼으며 성공의 쾌락을 누리는 교수, 찌질한 강사인 파라의 생물학적 아버지, 비난에나 집요한 선배. 그리고 끝까지 주인공 엄마 곁을 떠나지 않는 주인공 엄마의 여자친구. 그리고,
에르메스와 샤넬과 루이비통에서 각각 만든 실크 스카프가 현인 악기의 삼중주 같은 이 소설의 인물들이 엮어가는 좌절과 갈등과 마침내 사랑.
책을 읽던 당시의 경탄과 도달할 수 없는 문장력에 저절로 피어 나오던 한숨이 떠올랐다.
압축기로 눌러놓은 듯한 두 시간이 지났다.
나는 진즉에 예약해 놓은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는 역사를 몸으로 나타내는 나무가 가득 찬 캠퍼스에 이어 수준 있는 식당 분위기에 만족해 학교명으로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 또 곧 출간될 내 책, 그가 추천사를 써 준 <~정원 일기> 글이 너무 좋다며 어쩜 그리 잘 쓰냐고 만나자마자부터 하던 칭찬을 이어갔다. 그러더니 내가 다 가졌는데 딱 하나가 없다고 했다.
남자 보는 눈.
오후 한 시 언저리의 햇살이 블라인드에 걸려 웃음의 파장 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식사 후 학교 앞 카페에서 학생들과 티타임을 가졌다.
순진하고 호기심 어린 학생들의 눈동자 속에서 잠시 은하계 어디쯤에 정차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30년 전에 내가 느꼈던,
낙엽이 다시 푸른 잎으로 돌아갈 듯한 생기와 환희를 학생들에게 안겨주고는 성큼성큼 기차역으로 갔다.
나는 어느새 춥고 넓어진 공간에서 그가 내 책인 그의 소설책 면지에 남기고 간 짧은 글을 읽는다.
세상에서 가장
정밀하고
적요하며,
타오르는 글을 쓰는
나의 꼬마친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