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9 일요일 샛별 충전소~김천시청 12km
3일 차 : 2025년 2월 9일 일요일 샛별 충전소~김천시청 12km
출발지점까지 기차로 갈 방법이 없어서 승용차를 몰고 나섰다.
전날 도착 지점인 충전소에서 준비운동을 하고 평등약속 낭독 후 단체 사진을 찍었다.
출발 직전 옵티칼 지회장에게 내 첫 책 <일곱째별의 탈핵 순례>와 사진집을 고공 농성자들에게 전해 달라고 하고 서류봉투 하나를 받았다.
오전 10시, 50여 명이 길을 나섰다.
차량을 가져온 사람들은 모두 도착지인 김천시청에 주차하고 노조 차를 타고 뚜벅이에 합류해야 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운전자가 눈에 익었다. 지난가을 희망 뚜벅이 때 장영식 사진작가의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대신 메고 가던 감동적인 뒷모습의 주인공이었다. 물어보니 한진중공업 노조원이었다. 카메라와 카메라 가방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들어본 사람만이 안다. 장영식 사진작가가 앞에서 번쩍 뒤에서 번쩍 나타나 무수한 사진으로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중간중간에 보이지 않게 돕는 손길들이 있었다. 그것이 연대다.
중간에 화장실이 있는 주유소에서 처음으로 휴식시간에 간식이 제공되었다. 깨소금이 솔솔 뿌려진 김천시 꼬마김밥과 얼어서 퍼런 바나나가 맛있고 풍족했다. 매일 길도 달라지고, 참가하는 뚜벅이도 달라지고, 배식도 간식도 달라지는 희망 뚜벅이는 새로워서 좋았다.
다년간 하던 도보순례와 이번 희망 뚜벅이는 다른 점이 많았다. 주로 혼자 걷다가 모르는 사람들과 걷는 점, 길 찾기가 난관이었는데 길잡이가 있음, 어디서 식사할지 걱정하지 않음, 숙소 없음, 그리고 신발.
이날은 최근 생일인데도 아무도 뭐가 필요하냐 묻지 않아 스스로 선물한 운동화를 신고 갔다. 전문 워킹화라고 해서 큰맘 먹고 샀는데 발가락 양말과 등산 양말을 두 개 껴 신을 줄 알았으면 한 치수 크게 샀어야 했다. 그래도 등산화에 비해 가벼워 가뿐했다.
가장 큰 변화는 카메라. 도보순례 때는 짐 메고 걷기만도 힘들어 큰 카메라를 들 수 없다. 그래서 작은 카메라를 소지한다. 그런데 희망 뚜벅이에서는 배낭을 차에 싣는 대신 큰 카메라를 어깨에 멘다. 혼자 걷는 순례가 아니라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용 승계를 위해 걷는 뚜벅이니까 사진도 개인 소장용으로 찍을 순 없다.
이날은 이지영 사무장 인터뷰를 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투쟁 시작하기 전에는 진짜 평범하게 살았었어요.
제가 근무 연차가 우리 조합원 중에 제일 적거든요. 불나기 전까지 치면 한 3년 정도밖에 안 돼요.
2017년에 입사하자마자 원래 노조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일하는 환경도 좋았고, 일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복지나 이런 게 되게 좋았기 때문에 그래서 좋은 회사라고 생각을 하고 다녔어요.
근데 1차 구조조정 때 계속 아침조회 시간마다 부사장 출신이 어렵다. 우리 이제 품질을 이제 높여야 돼, 그런 얘기를 했었어요. 그래서 그런 얘기를 자꾸 듣다 보니까 내가 나이가 어린것도 아닌데 그냥 다른 회사에서 자리 잡는 게 나을까 싶어서 1차 희망퇴직 때 나갔었단 말이죠.
그런데 코로나 19 터져서 중국 봉쇄돼서 회사에서 다시 신입을 뽑았을 때 문자로 지원하라고는 연락받고 다시 들어오게 된 경우란 말이에요. 재입사 통지 오는 거 보고 아, 회사 쉽게 안 망하네, 얘네가 그냥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 없을 때는 그냥 희망퇴직 시켜서 사람 그냥 내팽개치고 이렇게 하는구나 싶어서 이번에 재입사하고 나서는 이젠 진짜 계속 다녀야겠다. 이제 정년까지 다녀야겠다 했어요.
제가 이 회사에 들어와서 결혼한 신랑도 만났단 말이에요. 사내 커플이었어요. 그래서 신랑이랑 희망퇴직도 같이하고, 다시 들어오는 것도 같이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5~6개월 만에 갑자기 회사에 불났다는 소식 듣고. 저번에도 이제 작은 불씨는 났었거든요. 그런 것처럼 조금 지나고 말겠지. 조장님이 오늘 쉬라고 하니까 쉰다, 이 생각만 하고 하루가 지났는데 완전 변수가 된 거예요.”
“엄청 놀라셨겠어요.”
“갑자기 그때부터 실감이 나는 거예요. 어떡하지. 우리 둘 다 갑자기 실업자 됐잖아요. 그래서 우리 어떡하지 이러고 있다가 회사가 한 달 동안 기다린다고 해서 기다렸죠. 근데 기다렸는데 갑자기 피하네요. 근데 그러고 노조 사무실에서 우리 지회장님이 설명해 주고 이제 투쟁을 시작하자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솔직히 많이 고민했어요.
신랑이랑 저랑 상의해서 신랑은 생계를. 둘 중에 하나만 남아서 하자 이렇게 된 거예요. 신랑도 회사 사정을 조금 알고 하니까 시작했는데, 신랑도 저도 일반 조합원이었기 때문에 노조가 뭐 하는지도 잘 모르는 조합원이었는데, 하면 할수록 저는 좀 알지만, 신랑은 처음에는 응원했었는데 이제는 좀 길어지니까 많이 힘들어하긴 하더라고요.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본인이 남을 걸 괜히 나를 남겼다고 미안하다, 이런 말도 하거든요. 그래도 그런 말 들으면 끝까지 해 보자는 마음이 들고 그렇더라고요.”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들었어요?”
“실질적으로 회사가 우리를 타격할 수 있는 게, 제일 힘들어서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게 손배가압류잖아요. 그때 강제 경매된다고 했을 때 듣고 엄청 울었어요. 심리적으로 압박이 되는 거예요. 그때 진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많이 들었었거든요. 그래서 나 못할 것 같다고, 진짜 너무 힘들다고. 근데 또 시간도 지나고 옆에서 응원해 주고.
공탁금 때문에 우리가 금속노조랑 민주노총 지부나 단위마다 다 찾아가서 발언하고 조금 도와주시라고 했거든요. 지역별로 모금도 많이 해서 저희 법률 비용 쓸 수 있게끔 공탁금을 딱 벌고 그렇게 해놓으니까 이거 진짜 별거 아니다.”
그이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서 한 인간의 성장 서사가 축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여성 노동자가 고공에 올라갈 때는 남성에 비해 열악한 상황이 더 많다. 가장 큰 차이는 생리적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상하수도가 없어 위생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고공에서 가임기 여성이 매달 하는 생리는 생리 전 증후군과 생리통과 더불어 한 달에 일주일 정도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것은 부끄러워할 질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답을 듣고는 기겁을 했다.
“초반에는 위에 올라간 언니들이 피임약 먹으면서까지 버텼어요. 그렇게 버티다 안 돼서 그거 끊고 그냥 평소대로 생활하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진짜 많이 울었어요. 저희도 어떻게 하면 좋아, 하면서 그렇게 버텼어요. 너무 불편하고 힘들지만.”
강제로 몸의 생리적 작용을 멈추면서 스스로 입는 피해는 오롯이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얼마 전에는 감기도 걸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여성 최장기 고공농성을 연일 갱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롭지 않았다. 남태령 대첩 이후 지원이 쇄도했다고 한다. 생수가 떨어졌을 때는 인제 그만 보내셔도 된다고 할 만큼 많은 생수가 도착했단다. 그리고 그 지원은 희망 뚜벅이 참가로 이어졌다.
지좌황산공원을 지나 작은 정자 옆에 승합차들이 차 벽을 치고 매서운 바람을 막았다. 그 사이 땅바닥에 희망 뚜벅이들이 앉아서 쌀밥과 싱싱한 김치와 함께 비건(채식주의자)은 들깨 미역국과 논 비건(비 채식주의자)은 닭개장을 먹었다. 희망 뚜벅이 첫 식사 제공이었다. 한겨울엔 뜨거운 국물이 최고. 사려 깊게 식성까지 맞춰 식사를 준비해 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했다.
식후에 엊저녁 달여 이른 아침에 따끈하게 데워 꿀을 넣은 진한 뱅쇼를 박문진, 차해도, 장영식, 정진우 동지와 나눠마셨다.
얼어붙은 강물을 지나 김천시청을 향해 시내를 통과했다. 대열은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대화하며 걸어갔다. 김진숙 동지는 2030 젊은이들 사이에서 대화하며 걸었고, 나는 차해도 동지의 1979년 입사 당시부터 김진숙 지도위원과의 35년 이야기를 들었다. 화장실, 식당, 식판…… 민주노조가 상전벽해시킨 공장의 구석구석에 대해.
금세 휜 소나무가 멋들어진 김천시청에 다다랐다. 따스한 오후 햇살 아래 뚜벅이들의 얼굴이 밝고 환했다. 추위도 젊음을 얼릴 순 없나 보다. 화르르 웃음꽃이 매화보다 먼저 피었다. 박정혜, 소현숙 이겨서 땅을 딛도록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용 승계로 가는 희망 뚜벅이 사흘째, 왠지 모인 이들이 가족처럼 보였다.
지역별로 뚜벅이들이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김진숙이 발언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를 대표하는 상징은 85호 크레인입니다. 그게 이긴 투쟁이어서만이 아니라 저는 함께 싸워서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러분들 마음속에 하나씩은 다 영광스러운 기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남태령 동지는 남태령의 이름으로, 말벌 동지들은 말벌 동지의 이름으로, 무지개조선소는 또 무지개조선소의 기억으로.
85호 크레인의 기억들이, 여러분들은 마지막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첫날 올라가는 날부터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사실은 신변 정리를 다 하고 올라갔었습니다. 새로 산 운동화도 주고, 카메라 배워보겠다고 새로 산 비싼 카메라도 친구한테 주고, 그리고 통장도 다 정리하고.
저는 살아서 땅을 밟을 거라는 희망이 그때는 없었어요. 8년 전에 동지가 죽었던 크레인이고, 그게 8년 만에 다시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제가 크레인에서 희망은 129일이었습니다. 김주익 지회장이 버텼던 날짜. 목을 매었던 날짜. 그래서 저는 129일을 버티면 그냥 김주익 동지를 만나도 떳떳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게 노동자의 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00일이 지나고 150일쯤 되니까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오는 거예요. 저는 그 사람들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까 서울에서 왔대요. 그다음 날 온 사람한테 물어보니까 청주에서 왔대요. 그다음 날은 광주에서 왔답니다.
그 사람들이 처음에 왜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산에서도 영도, 그쪽에서 어떤 노동자가 크레인에 매달려있는데 언론에도 한 번 안 나올 때 저 사람들이 여기까지 왜 왔을까? 그러면서 막 편지를 써주고 가고, 트위터에 글을 올려주고 그러는데 저는 그 사람들이 너무 보고 싶어 졌습니다. 저한테는 그게 삶의 의욕이었던 거 같아요. 내가 살아서 저 사람들을 봐야겠구나,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그때는 간절했습니다.
박정혜, 소현숙 동지가 (고공농성) 오늘이 399일이에요. 그 동지들이 어떤 마음으로 고공에 있을지 저는 알거든요. 이제 부산에서, 양산에서, 울산에서, 고양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자기네들을 만나러 오고. 그 동지들도 아마 너무너무 만나고 싶을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래서 저는 우리에게 그런 영광스러운 기억들이 하나씩은 다 있듯이 옵티칼 동지들에게도 옵티칼이라는 이름이, 옵티칼 조합원, 지회였다는 이름들이 평생에 남는 영광의 기억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 약속들을 지키는 게 희망 뚜벅이라고 생각하고요. 투쟁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귀엽게) 투쟁!”
다음 날, 추풍령 넘을 희망 뚜벅이들을 걱정하며 세종시 국토부 앞 전국신공항백지화 연대 출범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탈핵 벗 청명에게 5일 차 추풍령역~영동군청 24km 장거리 희망 뚜벅이 연대를 부탁했다. 걷기 달인 청명의 흔쾌한 연대가 고마워 기차표를 예매해 주었다.
그리고 8년 전 산티아고 순례 때부터 지금까지 신는 발목 중간까지 오는 발가락 양말과 똑같은 것 다섯 켤레를 주문해 박문진 동지에게 발송했다. 김진숙 동지와 나눠 신으시라고.
그다음 날 종합건강검진을 마치고는 다음 날 옵티칼 지회에 부탁해서 받은 일본어판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조 투쟁 전단이 담긴 서류봉투를 챙겨 오사카로 향했다. 그러니까 희망 뚜벅이 셋째 날 준비해 간 뱅쇼는 내 맘속 짧은 헤어짐을 위한 이별 선물이었다.
<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