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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Jan 24. 2023

이층집 정원일기

사마리아 노부부  

    

그 집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생태마을 집에 짐을 풀고 살았을까?

생태마을 집 계약을 위해 장기 무이자로 돈을 빌리기로 하고 빌려주겠다는 장담을 받자마자 받은 전화.      


한시적 매일 출근.      


돌발 변수에 혼란스러워진 나는 그날 밤 생태마을 집을 본 후로 뒤지지 않았던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에 들어갔다. 하필 세월호 참사 이후 거의 이용하지 않는 사이트였다.      


출퇴근 한 시간 이내 거리에 2층 단독주택이 있었다. 

20평 조금 넘는 2층 전체가 비어있는데 남향이었다. 널찍한 거실에 햇살이 한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정면에는 멀리 산이 보였다. 방 둘과 주방과 욕실도 컸다. 잔디 깔린 정원도 있었다. 개집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빨간 우체통. 딱 내 취향이었다. 


부동산에 전화해 보니 주인이 1층에 사는데 주말에만 오신다고 했다. 

동네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정원 있는 집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지도를 보니 근처에 산도 있었다.   

   

다음 날 역으로 갔다. 

통화한 부동산 담당자가 아닌 다른 부동산 담당자 차가 역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바빠서 대신 나왔다고 한다. 동종업체 사람들끼리의 협력이라니 인심 좋은 동네였다. 

참사 나흘 후, 역전에 붙어있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현수막도 고마웠다.     

보러 간 집 1층 앞에 하얀 개가 묶여있었다. 혼자 집을 지키던 개는 사람을 보자 반가워서 뒷발로 겅중겅중 섰다.      


집은 사진 그대로였다.  

환한 거실 앞 창가에 서보니 집 앞에 밭이 있어 사람이 지나다닐 수 없고, 지나가더라도 2층이니 밖에서 안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동쪽과 서쪽 양옆 방도 똑같이 넓었다. 베란다마다 붙박이장도 있었다. 냉장고 자리가 빈 북향 주방 싱크대도 길었고, 세탁기를 놓을 다용도실도 넓었고, 화장실에는 욕조도 있었다. 3인 가구가 살아도 넉넉할 크기였다. 거실 벽 한 면 도배만 하면 될 만큼 깨끗했다. 무엇보다 집이 반듯했다. 마당은 보통 시골집 같지 않게 잔디 깔린 정원이었는데, 마당 가운데와 가장자리로 화단이 있었고 구석엔 정자도 있었다. 조금만 손 대면 반짝이게 가꿀 자신이 있었다. 다만 담장이 철책과 나무들이었고 대문이 없었다. 

     

집을 보고 나오자 개가 또 반가워 섰다. 더러워서 만질 수는 없었지만, 사료통에서 사료를 한 바가지 퍼서 밥그릇에 부어 주었다. 와서 그 개를 돌보고 싶었다.           


그 후 그집에 몇 번을 더 가보았다. 

일주일 후 두 번째는 지도상 300m 옆에 있는 기찻길에 지나가는 기차 소리를 들어 보러 갔다. 

학교 일을 마치고 버스 타고 기차 타고 걷다가 택시 타고.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질 다섯 시쯤이었다. 

평일이었는데 1층 문이 열려있었다. 막 김장을 마친 집주인 노부부가 계셨다. 


"안녕하세요? 집 보러 왔던 사람인데 기차 소리 들어보러 왔어요."

"안으로 들어와요."


개신교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였다. 권사님은 첫눈에 나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2층 세입자들이 다 집을 사서 나갔다고 하셨다. 지금 세입자는 계약 후에 살고 있는 집이 안 나가 못 들어오고 월세만 내는 중이라고 했다. 집이 비어있는데 월세 받는 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나를 위해 별 희한한 방법으로 집이 비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사님이 내 종교를 물어보셨다. 기독교 모태신앙이라고 하니 더 좋아하셨다.      


“집도 좋고 주인 어르신도 좋으신데 계절학기와 방학이 있어서 확실히 모르겠어요.”

“하나님 뜻대로 되겠지.”     


다음날 강의가 있어서 그날 대전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자동차가 없었다. 

대전에 주 거주지가 있는 주인 노부부가 태워다 주신다고 했다. 


차를 타기 직전에 부산과 울산에서 간 적 있는 대전 지점 호텔에 전화를 했다. 최저가 방들은 예약 완료 상태였고 남은 방은 조금 비쌌다. 일단 전화를 끊고 망설이며 중얼거렸다. 

“호텔이 너무 비싸네요.”     


현관 앞에서 권사님이 말씀하셨다. 

“대전(집)엔 잘 데가 없으니 여기서 자고 가요.”      

“네? 여기서요?”     

“냉장고에 있는 거 먹고 내 집처럼 지내요.”


그러시며 가져가시려고 비닐에 싸두신 따뜻한 쌀밥을 차 안에서 꺼내 주셨다. 국이 없어서 어쩌냐는 걱정을 하시면서, 다음 날 아침 버스 시각까지 앞집 아주머니한테 물어서 알아봐 주고 가셨다. 담장과 대문이 없어서 겁이 난다는 내게 동네사람들 인심 좋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2년 넘게 전국을 다녀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내 집처럼 쓰라는 집주인 말씀대로 내 집처럼 샤워 후 목욕탕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젖은 머리로 비닐에서 꺼내 밥통에 넣은 흰쌀밥과 냉장고의 들기름에 볶은 주황색 김치로 밥을 먹었다. 

들으러 온 기차 소리는 모든 문을 꼭 닫으면 아주 작게 들려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난방비 들까 봐 보일러는 켜지 않고 전기장판만 켰다. 

모르는 집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났다. 

전날 남겨놓은 밥을 먹고 커피 믹스 한 잔을 마시고 방과 거실을 걸레질했다. 

첫 버스가 올 시각엔 너무 깜깜해서 해가 뜰 무렵인 6시 50분에 집을 나왔다.  

아직 저물지 않은 하얗고 둥근달이 북서쪽 산 위에 떠있었다. 

     


버스가 다니지 않아 역까지 6km를 걸었다. 

걷다 보니 뒤죽박죽인 삶에 새벽 안개같은 자신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친절하고 믿음직하고 인정 많은 집주인을 어디서 또 만날 것인가. 대문은 없어도 정원을 가꾸며 혼자 묶여있는 강아지 콩이 산책과 목욕도 시켜야지 생각했다.      

그때 전화가 왔다. 7시가 막 넘어서였다. 

권사님이 걱정되셔서 전화하신 거였다. 내가 역까지 걸어가고 있는 중이라니 놀라셨다. 

궁금한 걸 여쭤보았다. 난방과 취사는 LPG로 하고 물은 수돗물이었다. 

내가 가진 전부에 딱 맞는 보증금이었고 월세도 대전시에 비하면 저렴했다. 


며칠 후 권사님께 계약하고 싶다고 전화를 했다. 

마침 그때 장사가 바쁜지 손님이 말을 걸어오고 있어서 권사님은 부동산하고 이야기하라고 하셨다. 

부동산에 전화해서 자동차로 출퇴근 가능한지 보고 계약하겠다고 했다.      


열흘 뒤 강의 후 자동차를 타고 가보았다.

집 근처에 있는 치유의 숲과 자연휴양림에도 가보았다. 누군가 찾아오면 함께 갈 곳을 미리 답사한 것이었다. 

그런데 쓸쓸했다. 가을이라 나뭇잎은 떨어지고 스산한 숲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좋은 곳인들 혼자 있으면 무슨 재미인가. 나는 외로움이 두려웠다. 


다음 날 또 다시 가보았다. 

이번에는 피터와 아이스베어를 자동차에 태우고. 그들에게 집을 봐 달라고 했다. 

밤이라 그랬는지 35km에 45분이 멀게만 느껴졌다. 

시골 동네는 깜깜했다. 집 주변을 한 바퀴 돌고는 둘 다 혼자 지낼 내가 어둠을 무서워하는 걸 염려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쉬움과 망설임 범벅인 내가 읊조렸다. 

“내가 살면 주변 식물이랑 동물이 다 행복해질 텐데…….”     


“본인이나 먼저 행복해지세요.”

“나도 그 말을 하고 싶었는데.”

피터가 핀잔을 주자, 평소 묵묵한 편인 아이스베어가 맞장구를 쳤다.      


23년 지기 피터는 내게 늘 말했다. 

“시골에서 안 어울리게 살지 말고 도시로 나와요. 도시에서 돈 많고 잘생긴 남자 만나요. 사랑하고 싶다면서요. 일단 사람을 만나야 뭐라도 할 거 아니에요.”     

확률상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살고 싶지 않은 나는 도시남을 만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깜깜한 빈집에 있을 자신도 없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빈집에서 공황장애가 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지난 2년간 어떻게 떠돌았는지 아득했다. 


계약을 못 한 채 시간이 흘렀다. 

처음부터 정해진 답이었다. 

그 집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없었다. 

사람.       



이사는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 

들고 나는 사람이 동시에 움직여야 하기에 여럿이 유기적으로 이동하는 물리적 조건이 동반되어야 가능하다. 

떠돌기 전까지를 포함해 지금까지 내가 가는 집들은 대부분이 공실이었다. 공실은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은 상태이다. 그런데 내가 살았던 집들은 다음에 주인이 들어와 살거나 아예 주인이 바뀐 경우가 많다. 집이 좋아져서 주인이 들어오거나, 애물단지인 집을 팔게 되는 것 모두 주인에게는 좋은 경우이다. 

세입자는 집과도 잘 맞아야 하지만 주인과도 잘 맞아야 편하다. 주인 역시 그러하다. 


도둑맞은 집인 줄 모르고 들어가 6년이나 살고 무사히 나온 적이 있었다. 다음 세입자는 사고로 사망했다. 집터가 나빠도 입주자 기운이 더 세면 누르고 산다. 

사는 내내 징징대는 주인도 있었다. 결국 주인이 그 집으로 다시 들어와 살았다. 운을 바꾸지 못하고 사는 경우다. 

집주인이 구속된 집을 회사 명의로 산 사람도 있었다. 중간에 집을 팔려고 해서 이사 비용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알아서 나왔다. 그런 세입자에게 주인은 임대인 중개수수료까지 물게 했다. 사는 동안은 신사적이었는데 야비한 부동산 업자를 만나더니 그렇게 됐다. 소탐대실. 끝이 좋지 않을 거라고 본다.       



비록 나는 이층집에 들어가 살지 못했지만, 그곳에 들어가 사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일 것이다. 

요즘 세상 어디에 살림살이 다 있는 제집에 일면식 없는 낯선 사람을 그렇게 턱 하니 본인도 없는 집에 재우고 밥까지 먹일 귀인이 있을까.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 가지, 이층집 일 층에서 자고 나오면서 식탁에 붙여두고 온 메모,     


‘권사님, 장로님 고맙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갑니다. 

베풀어주신 은혜 기억하겠습니다. 

좋은 인연으로 또 뵙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새해맞이 붙임.      

‘무병장수 하시고 사시는 내내 복 많이 받으소서.’      



그렇게 나는 학교에서 가까운 대전 기찻길 옆 왜가리 아파트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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