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일이다.
냉장고의 아래 칸인 냉동실에 성에가 얼음으로 변하더니 나중엔 꽝꽝 얼어붙어 서랍을 열 수 없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더니 이 집에 이사 와서 처음으로 산 50만 원짜리 중소기업 냉장고는 가동하면서부터 냉장실 벽에 물이 흐르더니 냉동실 전체를 얼음으로 봉쇄하고 말았다.
딱딱한 얼음을 긁어내는 게 쉽지 않아 한나절 냉동실 문을 열어놓고 있어도 쉬이 녹지 않아 결국 전원을 끄고 말았다.
한참 후 얼음이 녹으면서 바닥에 고인 물을 수십 번 닦아내자 마침내 서랍이 열렸다.
서랍엔 하죽도 미역, 냉동 새우, 큰고모가 건강 잃으면 안 된다고 보내오신 판불고기, 4~5년 전 받은 고춧가루, 2년 전 받은 죽순, 숨이차가 설날 보내준 꽃떡국떡, 작년인지 재작년인지의 유성기업 선물 곶감 등이 있었다.
해동한 걸 다시 얼리면 세균 번식 때문에 안되니 죽순과 불고기를 볶아 먹었다. 여름날에 떡국도 끓여 먹었다. 곶감 좋아하는 친구가 언젠가 오면 주려고 쟁여 둔 곶감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아끼고 아끼던 고춧가루는 물이 들어갔는지 곰팡이가 슬어서 버려야만 했다. 하도 오래돼서 전에도 김치를 담그면 맛이 이상했었다.
이제 집에는 죽순도 고춧가루도 없다.
누군가를 위한 비상식품도 없다.
성능 낮은 냉장고 덕분에 냉동실이 비워졌다.
추억도 기다림도 비워졌다.
*
열흘 간의 칩거 후 병원 검진과 재판 참관으로 서울까지 다녀오니 텃밭에 상추대가 웃자라 옆으로 쓰러져있었다.
담양에서 먹은 상추 물김치가 떠올라서 상추를 솎아 김치를 담기로 했다.
상추를 물로 깨끗이 씻었다.
유기농 밀가루 풀을 쑤어 식혔다.
평화바람이 농사지어 오이가 준 양파 일곱 개 중 마지막 한 개를 채 썰었다.
4년 전 지리산 화엄사 아랫집에서 주신 멸치 액젓과 청명이 준 매실액을 쫄쫄 끝까지 따라 넣고 병을 깨끗하게 헹궈 말렸다.
2년 전 친구네 선물로 사고 덤으로 받은 새우젓도 싹 다져 넣었다. 플라스틱 통은 물로 씻어 말려 재활용 봉투에 넣었다.
생강이 없어 느리가 준 진저코디얼을 넣고, 마늘은 없어서 못 넣었다.
건고추도 고춧가루도 없어서 못 넣었다.
생수 2리터를 부었다.
양이 제법 많아 김장김치 담던 통에 담았다.
하루 지난 어제 열어보니 역한 냄새가 났다.
이번에도 김치는 망했나 싶었다.
오늘 저녁 그 상추 물김치를 먹어보았다.
먹을 만했다.
작년여름 고추가 풍년이라 간장 식초 장아찌를 담아 올해까지 맛있게 먹었는데, 올여름엔 상추물김치를 거반 성공했다.
웃자란 상추 덕분에 묵은 양념이 싹 비워졌다.
물건과 물질이 사라지면 그에 따른 기억도 희미해질 것이다.
싱크대를 열 때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눈에 보이던 기억들이 사라져 간다.
비워야 새것으로 채울 수 있다.
굳이 새것으로 채우고자 하지 않더라도 비움이 먼저다.
차차 비우자.
수시로 비우자.
말끔히 비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