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결국 '사람'이 남는 장사다.

평생의 지인을 만나다.

by 세화


흔히 비즈니스를 숫자의 싸움이라고 하지만, 20년 가까이 현장에서 굴러보니 결국 남는 건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내가 가장 지쳐있던 순간, 그리고 가장 찬란하게 비상하던 순간의 곁에는 늘 '돈'보다 귀한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은 내 옆에 빛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EC플라자에서의 치열했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나는 비로소 꾹 참아왔던 ‘나 자신’을 돌보기 시작했다. 지독했던 업무의 굴레를 벗어나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살이 빠지고 예뻐졌다는 인사가 들려올 때마다, 바닥까지 내려갔던 자신감이 기분 좋게 차올랐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운전면허를 따는 것이었다. 면허를 따자마자 이백만 원짜리 중고차 한 대를 덜컥 샀다. 비록 그 차가 폐차장으로 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하하하), 그 고물차는 나를 더 넓은 세상으로 데려다준 첫 번째 날개였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도시, 강릉으로 향했다. 지친 마음을 쉬게 하고 싶어 선택한 도망이자 휴식이었다. 그곳에서 정부 지원 사업장에 입주하기 위해 사업 계획을 발표했고, 감사하게도 심사를 통과해 사무실을 배정받았다. 월세 걱정 없이 관리비 수준의 비용만 내면 되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강릉에서의 삶은 평온했다. 월세지만 아파트를 얻고, 내 차를 끌고, 교회 청년들과 바다를 향해 드라이브를 나갔다. 창밖으로 밀려오는 시원한 바다 내음을 맡으며 나는 정말 오랜만에 생각했다. ‘아, 내가 살아있구나.’

강릉에서 내 비즈니스가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나에게 단순한 합격 그 이상의 의미였다. 내 사업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는 일종의 증명 같았다.


웹이라는 일의 특성상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프리랜서라는 이름 뒤에 홀로 서기엔 내 꿈이 커졌고, 나를 도와줄 ‘사람’이 절실하다는 것.

그 무렵, 내 인생을 바꾼 인연들이 선물처럼 하나둘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2006년 4월, 나를 사업가로 살게 한 박선옥을 만나다

교회 친구의 소개로 만난 선옥이는 내 인생의 항로를 바꾼 사람이다.

2006년 4월에 시작된 인연이 어느덧 20년째를 맞이했다.


사실 강릉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인천으로 거점을 옮길 때, 나는 심각한 갈림길에 서 있었다. ‘이제 그만 회사를 접고 취업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터라, 선옥이에게 다른 직장을 알아볼 것을 권했다. 강릉에서 인천까지 출퇴근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런데 선옥이의 대답이 의외였다. 나는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상대방에게 거절을 잘 못하는 성향이다. 수원에 부모님이 계시니 그곳에서 출퇴근하며 계속 함께하겠다고 한 것이다. 사업을 접을까 말까 망설이던 나는 그녀의 결단 덕분에 인천에서 다시 사업장을 이어가기로 했다. 정말 생각없고 우유부단한 결정이었으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 인생 최고의 결정이었다.


인천에서의 생활은 치열했다. 나는 영업을 위해 밖으로 돌았고, 선옥이는 텅 빈 사무실에서 회계부터 PM 운영까지 모든 살림을 도맡았다. 혼자 고생하는 그녀가 안타까워 동료를 한 명 더 채용했고, 늘어난 운영비를 감당하기 위해 나는 더 열심히 영업 현장을 누볐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직원이 늘어 지금의 '매스티지'가 되었다.


멋진 비전을 제시하며 화려하게 시작한 대표는 아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거창한 목표를 정하고 달려가는 사람만큼이나, 눈앞의 사람을 책임지기 위해 길을 만들어가며 방향을 잡는 회사도 많지 않을까. 나는 기꺼이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선옥이는 처음 PM으로 입사해 프로젝트를 정리하고 고객과 소통하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회사의 자금과 운영 전반을 담당하는 '박선옥 수석'이 되었다. 내가 흔들릴 때마다 “대표님, 이건 이렇게 가면 돼요”라고 말해주는 그녀는 우리 회사의 견고한 뼈대다. (글을 쓰다 보니 조만간 임원으로 승진시켜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하하.)


나는 종종 그녀에게 장난스레 말한다.

“내가 회사를 접으려고 했는데, 너 때문에 하나둘 사람을 늘리다 보니 여기까지 왔잖아. 그러니까 내 은퇴도 네가 책임져야 해. 우린 무조건 같이 은퇴하는 거야!”



2005~2006년, 모태솔로 남편을 만나다.

사실 남편은 2005년부터, 정부사업을 하면서 프리랜서로 나와 연결돼 있었다.
얼굴도 모른 채 같이 일하던 사이였다.

이상하게 잘해줬다.
배너도 만들어주고, 팝업도 만들어주고, 먼저 연락도 하고.
너무 티가 나는데 정작 고백은 안 하길래, 내가 네이트온으로 물어봤다.


“혹시 저 좋아하세요?”

남편은 “네”라고 답했다.

그런데 1분도 안 돼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세화 씨 취소할게요! 좋아하긴 하지만, 세화 씨랑 일도 못 하고 연애도 못 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될까 봐요. 그냥 취소할게요.”

… 어이가 없었지만 참 귀여웠다.


나는 이렇게 연애에 정말 무지한 모태솔로와 결혼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그 순간이 웃기다.


나는 종종 생각했다. 나는 영업. 남편은 디자이너. 뭐 망해도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 이렇게도 내가 전략적이란 말이야 푸하하 하하하--- 그렇게 결혼했다! )


2005~2006년, 이영미 이사님을 만나다

이영미 이사님 역시 그 시기에 만났다.

내가 EC플라자의 수십 개 일을 처리하던 동안, 이사님은 돌쟁이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취업은 쉽지 않았고, 프리랜서 일을 찾다가 나와 연결됐다.

그렇게 우리 회사에서 거의 20년을 함께했다.
마지막에는 이사 직책으로 재직했고, 내가 뒤늦게 육아를 시작했을 때는 회사 운영의 짐을 거의 떠안다시피 했다.

결국 지쳐 퇴사했지만, 나는 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내 육아도 회사도 제대로 굴러가기 어려웠을 거라는 걸.

영미 이사님은—나이가 들어서도, 늙어서도—평생 잊지 못할 은인이다.


그때 나는 돈도 얻었지만, 더 큰걸 얻었다.
평생을 함께할 사람들을 만난 시기였다.

스크린샷 2026-02-22 131712.png 15년 장기근속 포상여행 유럽을 가다. 오랜동지의 사진을 올려봅니다.20년동안 우유부단했던 내 결정 곁에 있어 준 사람들


흔히 사업을 숫자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20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오며 내가 얻은 확신은 단 하나다.

인생은 결국 사람이 남는 장사라는 것. 내가 버텨온 시간을 감히 ‘성공’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건 통장의 숫자 때문이 아니다. 내 곁을 지켜준, 그리고 내가 지켜온 이 소중한 인연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오늘도 내 곁에서 빛나주는 그들이 있어, 나는 다시 힘을 내어 내일을 계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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