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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날에 쓰는 편지

인천 배다리 헌책방 거리 '스탬프투어' 체험하기

by 시 선

작가님,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이제 제법 선선하니 지낼 만하지 않나요? 가을이 갑자기 찾아온 것 같아요. 어느새 10월입니다. 지금 <글 쓰는 여자의 공간>이라는 책을 펼치는데, 작가님이 떠올랐어요. 이 책은 배다리 헌책방 거리, 어느 로스터리 카페에서 저 자신에게 선사한 기념품이랍니다. 나중에 온라인으로 할인을 받으며 주문하려다가 그러지 않았어요. 바로 오늘, 그 자리에서 이 책을 제 손에 꼭 쥐고 나와야 할 것만 같았지요.


오늘은 저에게 조금 특별한 날이었거든요. 15주년 결혼기념일이지요. 그와 결혼한 지 벌써 15년이 지났다니요! 큰 아이가 14살, 작은 아이가 9살이 된 걸 보면 그리 긴 것도 아니건만 결혼만 따로 놓고 보면 식겁을 하곤 합니다. 하긴 그럴 만도 해요. 8년을 사귀고 결혼했으니, 그와 제 인생의 반 이상을 보낸 셈이지요. 이제 서로 애틋하기보다는 편안한 사이가 된 우리 부부는 기념일이 이렇게 바짝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특히나 요새 우리는 긴축재정으로 어떤 여행계획도 하지 않았거든요. '우리 그날 뭐 하지?' 서로 되묻기만 하다가 그날이 불쑥 찾아온 것이지요.


사실 오늘 하루도 그저 그런 날이 될 수도 있었어요. 여느 날과 같이요. 전날 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배다리 헌책방 거리를 돌아다니기로 그날의 일정을 대강 생각해 두었어요. 아침에 눈을 떴는데 밖이 어둑하니 비가 내리고 있더군요. 순간 고민을 했어요. 어쩐지 귀찮기도 했습니다. 날씨 탓을 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때마침 아들이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왔고 아들을 침대 위 남편에게 보내고 저는 이불을 개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습니다. 창문을 열었어요. 비에 젖어 축축해진 도로 위를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 소리가 아주 시끄럽게 들렸습니다.


'우리는 오늘 나갈 수 있을까.'


차를 우리는데 결심이 섭니다. '우산을 쓰고 다니자!' 안 해도 되는 수고를 굳이 하려면 이렇게 별거 아닌 일에도 큰 다짐이 필요합니다. 쓸데없이 진지하게 굴어서 약간 민망스럽군요. 간단히 아침을 챙기고 씻고 나갈 준비를 합니다. 느닷없이 딸이 친구 생일 선물을 전해줘야 한다면서 나가더군요. 남편은 아들 머리를 잘라주러 미용실에 갔고요. 우리의 나들이는 예상한 시간보다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점점 나가기도 꺼려지고 있었어요. 밖에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여전했고요.


아들이 먼저 들어왔어요. 머리를 잘라 이쁜 아이가 작은 국화꽃 한 다발과 손수 접은 색종이 편지봉투에 블록으로 만든 핑크색 하트를 붙인 채 제게 안겨주는 게 아니겠어요. “요즘 시국이 어느 땐데 꽃을 샀어!” 새침하게 말하면서도 제 얼굴에는 이미 환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지요. 그때 딸이 허겁지겁 들어오더니 엄마 아빠에게 눈을 감으라고 주문했습니다. 딸은 괜히 말을 많이 하면서 시간을 끕니다. “딸아, 자꾸 이러면 엄마 되게 기대할지도 몰라.” 이윽고 제 두 손에는 케이크 상자가 하나 놓였습니다. 비가 오는데도 아침부터 케이크를 사러 나갔다 온 모양입니다. 그렇게 저 나름 큰 수고를 감행했으니 할 말이 많을 수밖에요.


저는 이대로 안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얘들아, 엄마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좀 더 애써야겠어. 옷 갈아입고 나올게.”


평소처럼 옷을 입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전엔 신경 써서 원피스라도 입었는데 올해는 왠지 영 기분도 안 나고 비도 오고 우산 쓰고 돌아다닐 생각에 그저 편한 청바지를 입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남편과 아이들에게 뜻밖에도 황송한 축하를 받으니 그에 걸맞은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을까요. 혹은 특별한 그날의 주인공으로서 스스로 빛을 내고 싶었을까요.


그리하여 저는 편한 청바지 대신 약간 끼는 조금은 불편한 그렇치만 핏이 예쁜 블랙진으로 갈아입고 운동화 대신 굽이 살짝 있는 부츠를 신고, 손바닥만 한 크기의 블랙 숄더백을 어깨에 걸쳤습니다. 책도 챙기지 않았어요. 외출할 때마다 버릇처럼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데 오늘은 얇은 시집조차 넣을 수 없는 아주 작은 가방으로 멋을 좀 부렸거든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확실히 평소와는 달라 보였고 저의 기분도 마음도 덩달아 달라졌습니다. 오늘은 분명히 특별한 날인 것 같았어요!


우리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개항면’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은 후 배다리 헌책방 거리 근처에 주차하고 배다리 성냥 박물관부터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바로 그때 비가 그쳤어요. 구름 사이에 환한 빛이 새기 시작했어요. 하늘이 우리를 도운 것이지요. 번거롭게 우산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어요. “그런데, 아들아, 너는 성냥이 뭔지 아니?” 성냥 박물관에 들어가자 아주 오래전 할머니 집 서랍 속에 있던 성냥갑이 보였어요. 현재는 그 성냥을 케이크 초를 킬 때 외에는 거의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끼던 찰나 우리는 어쩌다 그곳에 계시는 해설사분과 함께 ‘동구스탬프투어’를 따라나서게 되었습니다. 일순에 그냥 그렇게 되었어요. 마치 미리 짜놓은 여행 계획처럼요. 6 곳을 도는 코스로 30분 정도 걸리고 완주 후 1만 원 상당의 동구사랑상품권을 지급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 헌책방 거리가 세 번째 방문인데 성냥 박물관도 이런 해설사 동행 투어도 처음이었어요. 어차피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네 가족과 다른 세 가족 모두 일곱 명이 해설사분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습니다.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복합문화공간인 ‘배다리 아트스테이 1930’으로 좁은 골목길을 따라 전시장과 옛 빨래터가 있던 곳에 카페가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빠르게 옛날로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때쯤 우리는 헌책방 거리로 나왔습니다. 한때 이곳은 큰 시장으로 유명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였고 그 무렵 헌책방들이 생겨나기 시작해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책,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두고 간 책을 모아 팔기 시작한 것이 책방 거리의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1960~70년대는 무려 40곳이 넘는 헌책방이 있었고 현재는 5곳만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중엔 영화 <극한 직업>에 나왔던 '집현전'이라는 책방과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였던 '한미서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스페이스 빔’이라는 곳으로 들어섰고, 그곳은 옛 양조장 건물로서 현재는 비영리 대안 문화 예술 활동 단체이자 공간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안내를 들으며 건물 2층의 그 내부까지 쭉 둘러보았습니다. 다음 코스는 인천 창영초등학교 (구) 교사로, 1970년에 개교한 ‘인천 공립 보통 학교’의 교사이자 인천 3.1 운동의 발상지로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수업은 하지 않고 전시, 보존되고 있으며 그 뒤에 학교 건물을 새로 지어 학생들이 그곳에서 수업을 받는다고 합니다. 다음은 인천 (구) 여선교사 합숙소입니다. 19세기말 미국 감리교회의 여성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기숙사 건물로 1894년에 준공됐다고 하는데 북유럽식으로 지어 지붕이 뾰족하고 창문이 아름답게 난 곳이었어요. 지금은 옆에 교회의 소속 건물이 되어 민간인들에게 공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배다리 로드 갤러리예요. 동인천 철도가 지나가는 자리로 자칫 사라져 갈 수 있는 옛 공간과 거리를 시민들이 쉽게 접근하고 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문화거리로 조성된 공간이라고 합니다.


마침내 스탬프 6개를 모두 찍은 두 꼬맹이들은 신이 났습니다. 특히 다른 집 꼬맹이는 해설사 선생님의 뒤꽁무니를 바짝 따라다녀 선생님을 웃게 했습니다. 자기가 뭐라도 줄지 알고 이런다며 기특해했습니다. 조금 더 큰 우리 집 꼬맹이는 동생에게 양보하는 듯 그 뒤를 따를 뿐이었습니다. 출발할 때와 달리 돌아갈 때는 샛길과 지름길을 이용해 금세 배다리 성냥 박물관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이름과 연락처를 기재하고 우리는 총 4만 상당의 상품권을 받아서 나왔습니다. 밑져야 본전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흥미로웠고 저절로 걷기 운동도 되었고, 역사 공부까지 마쳤으니, 이보다 더 유익할 수는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게다가 돈도 벌었으니까요. (작가님도 시간 되시면 아이와 함께 체험하시길 적극 추천합니다.)


우린 상품권을 들고 당당하게 서점에 입장하여 아들은 <엉덩이 탐정> 두 권에 8,500원, 딸은 베스트셀러인 <나미야 잡화점>을 6,000원에 구매한 후 ‘나비 날다’ 문화상점에서 큰 이모 생일 선물로 걱정 인형 고리까지 사고 나니 상품권 2만 원 치가 남았습니다. 정말이지 알뜰하고 살뜰한 소비에 흐뭇했어요. 우리 넷은 이제 그 이상 걸을 수가 없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허기지고 힘들었어요. 저 역시 멋 부린다고 부츠를 신었더니 발이 몹시 아팠습니다. 아까 성냥 박물관 가는 길에 봐둔 카페를 가야 할 때가 온 것이지요.


온 가족이 함께 카페 나들이는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카페는 기대 이상으로 인테리어가 멋진 공간이었지만 넓지 않았고 심히 조용했어요. 한두 명이 겨우 이용할 수 있는 작은 원형 테이블 자리만 남았더군요. 남편이 바라던 디저트도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카페를 나왔지만, 이제 와서 어딘가 새로운 카페를 찾기엔 너무 지쳤고 저는 이 카페가 꽤 마음에 들었어요. 여기 커피 맛을 꼭 보고 싶어 졌어요. 그냥 끌렸다고 할까요. 밖에서 잠시 서성이다 우린 카페에 다시 들어갔고 그 작은 테이블이라도 앉으려는데, 큰 테이블에 있던 젊은 여성 한 분이 저희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아름다운 그분께 두 번이나 인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아이스를, 아이들은 초코라테, 저는 산미가 있을 ‘단청’ 아메리카노를 따뜻하게 마시고 기운을 좀 차렸습니다. 음료를 다 마신 둘째는 이제 슬슬 몸이 베기는 모양입니다. 카페는 ‘동양가배관’이라는 곳인데 (가배는 커피의 음역어라고 하네요) 4층 건물 1층에 위치한 곳이었어요. 2층엔 큐레이션 상점, 3층엔 작업실, 4층엔 전시 공간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입구에 표지판을 보고 알고 있었지요. 아들에게 이 4층 건물을 돌아보고 어떤지 엄마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들을 보내니 딸이 먼저 나섭니다. 이제 좀 편안하게 커피를 마시는가 했는데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어요. 엄마를 데리러 온 것입니다. 엄마는 넋을 놓고 구경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이들은 잘 알고 있지요.


오늘 제가 넋을 내린 곳은 2층 큐레이션 상점이었어요. 그곳엔 온갖 소장하고 싶은 책들과 문구와 소품 같은 것들이 정갈하게 마치 전시품처럼 판매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곳에서 하나하나 둘러보느라 한참 시간이 걸렸어요. 딱 제 취향에 맞는 것들이 가득했거든요. 그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저를 유혹한 것이 바로 이 책, <글 쓰는 여자의 공간>이었던 것이지요. 작가님! 제목부터가 확 댕기지 않나요? 이 책을 소장한다면 제가 진짜 글 쓰는 여자가 될 것 같았어요. 왠지 모를 자부심이 생기고 글 쓰는 여럿 여자 친구들이 생긴 것 같아 괜스레 든든한 동지애마저 느끼지 뭐예요. 그래서 지금 나의 글 쓰는 친구, 작가님이 생각났나 봅니다.


이렇게,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행복'이란 걸 느낍니다. 행복이 뭐 별거 있을까요. 그저 스스로 '행복하다!' 여기면 그것이 곧 행복이겠지요. 나의 하루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고, 나의 하루를 함께 만들어가는 가족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매 순간 행복해질 수도 있을 거예요. 사실 행복은 특별히 대단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을 테니까요.



… 작가님은 어땠어요? 오늘 행복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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