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든 나무든 이미 그 가능성을 품고 있는 씨앗처럼
내가 엄마가 되었다. 아이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나는 평생 이 아이의 엄마일 것이었다. 매일 아이를 안고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하루에도 수십 번 아이를 부르며 내 입에 담아봐도,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엄마는 처음이라 그런 거겠지. 처음이라 모르는 게 너무도 많았다.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툴렀다. 처음이라 내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엄마의 삶은 곧 아이의 삶이었다. ‘해’는 정말 내 삶의 해가 되어 내 모든 것이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나는 아이를 위해 존재했다.
세상에 없을 고통으로 아이를 출산했고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성공했던 모유 수유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도로 배 속으로 집어넣고 싶다는 엄마들의 우스갯소리를 나도 실감할 수 있었다. 엄마가 된다는 건 그야말로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 계단을 오르는 일과 같았다. 아이를 달고 계단을 하나 겨우 오르고 나면 다시 또 올라야 했다. 쉴 틈이 없다. 다시 내려갈 수는 없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도 없다. 오직 내가 직접 오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엄마가 되어야 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게다가 올라야 하는 계단은 저마다 다 달라서 정답도, 해답지도 따로 없었다. 그저 엄마 스스로 해답을 찾아갈 뿐이었다.
(나 역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숨이 가빠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내가 어디까지 올랐는지도 모르고 끝도 알 수 없는 그곳에서 나는 낯이 익은 어떤 어린아이와 자꾸 마주치게 되었다. 그 아이는 나를 빤히 쳐다봤고, 그 눈빛이 나는 썩 좋지 않아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져 그 아이를 일부러 외면하고 모른 척 지나가곤 했다.)
솔직히, 나는 첫째가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이 바라는 게 딱 한 가지 있었다. 그건 첫째가 자신감이 넘쳐 대범하고 활달한 아이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와는 완전히 다르기를 원했던 것이다. 나는 좀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으며 내성적인 편인데, 이런 내가 정말 싫었고 나의 최대 단점이라 여겼다. 바로 그 단점 때문에 내가 살아오면서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 있어 많은 어려움과 고충을 겪는다고 생각해 왔다.
또 그 단점은 내가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 그런 것이라며 가정환경 탓을 했다. 어린 시절 결핍은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 결핍을 메꿔가는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내 아이에게 부족함 없는 완벽한 사랑으로 좋은 엄마가 되고자 집착했던 것 같다. 그것을 나의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첫째가 나의 바람과 달리 나와 비슷한 기질을 타고난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내가 좋은 엄마가 되어 아이 곁에 있다면 아이는 기어코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욕심대로) 자신감이 넘치는 활발한 아이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첫째는 그저 그런 기질을 타고난 거였다. 예민하고 내향적인 기질이었다. 기질이라는 건 본질과 같아서 변하지 않았다. 엄마의 노력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첫째를 키우면서 아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평소 내가 싫어하던 나의 어떤 부분을 내 아이에게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괴로웠다. 특히 또래 친구들과 달리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고 소극적인 첫째를 볼 때면 더 그랬다. 나는 차라리 첫째가 여느 다른 아이들처럼 천방지축 사고뭉치이기를 바라기도 했다. 첫째가 꼭 나를 닮아 그런 것 같아 괜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첫째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앞서 염려하였다. 나처럼 똑같은 어려움과 고충을 겪게 될까 봐 그게 늘 걱정이었다.
다행히, 이 또한 나의 착각이었다. 나는 나 자신과 첫째를 분리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투사를 한 것이었다.
“왜 아무 이유 없이 그가 싫은 것일까? 그가 나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나 자신이 그런 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조지프 캠벨, 『블리스로 가는 길』, 111쪽)
(내가 계단을 오를 때 외면했던 그 어린아이는 바로 나의 내면 아이였다. 내가 일찍이 나의 내면 깊은 곳에 꼭꼭 숨겨놓았던 그 아이가 자기의 기질과 비슷한 첫째를 만나자 불쑥불쑥 하고 내 앞에 나타난 거였다. 갑작스러운 그 등장에 나는 깜짝 놀랐고 두려움에 휩싸였다. 나의 내면 아이는 당연한 부모의 사랑을 원했지만 받지 못했고, 채워지지 못한 그 욕구는 그대로 상처로 남은 채 성장하지 못한 나의 어두운 그림자와 같았다. 이제껏 자신조차 아무도 모르게 감추고 살았던 나의 어두운 실체가 다 들통 난 것 같아 불안에 떨었다. 결국 그 불안은 고스란히 나의 아이 첫째에게 갔을 거였다.)
그걸 알고 나니,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첫째는 단지 타고난 기질이 나와 비슷한 것일 뿐 나와는 완전히 다른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는 불안한 눈빛으로 아이를 대하지 않아도 되었다. 첫째를 바라보며 느꼈던 그 불안은 나의 투사에 의한 것임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러자 사랑 어린 나의 아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아이가 타고난 기질, 천성, 본성 그 모든 게 그저 선하고 천진난만하여 사랑스럽기만 했다. 아이는 그렇게 타고 난대로 크면 될 것이었다. 꽃이든 나무든 이미 그 가능성을 품고 있는 씨앗처럼 그대로 자라나면 될 것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내 마음에 들지 않던 나의 모습은 어릴 때 가정환경 때문이 아니라 내가 타고난 기질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나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였다.
사실 모든 근본은 거기부터 시작이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
그건 내가 '운명같이' 첫째를 만나 가능한 일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 피할 수 없는 운명.
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했던 운명.
나는 첫째를 통해 내면의 어린 나를 만났고, 더는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쌓아온 벽을 스스로 허물고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첫째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나 자신을 불행한 유년 시절 탓으로 돌리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우울하게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끝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자기가 쌓아온 벽에 갇혀 아니면 어두운 계단 어딘가에 웅크리고 앉아 소리 없이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투사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투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함으로써 거두어들일 수 있다.”
(조지프 캠벨, 『블리스로 가는 길』, 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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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