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방학하기 전에 꼭 만나는 여자들이 있다. 나까지 여자 세명이다. 알다시피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거나 새 접시를 뒤집어 놓는다고 했다. 그만큼 말이 많고 시끄럽다는 얘기다. 그것도 맞긴 한데 나는 왠지 성에 차지 않는다. 고작 접시라니… 집 한 채도 아니고.
아무려나, 중간에 한 번씩 봐도 될 것을 방학 전에나 만나게 된다. 방학을 앞둔 엄마들의 마음은 그런 것이다. 평소에는 그냥 생각만 하던 것도 행동하게끔 하는 것이다. 방학 내내 사랑하는 내 새끼와 집에서 하루 종일 지지고 볶을 상상을 하면 괜히 설레고 기대하다가도 동시에 두려움에 아득해지는 것이다. 길고 긴 겨울방학이라면 더욱 그렇다. 엄마들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아이와의 하루를 어떻게 굴려야 할지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보면 세 여자는 만나게 된다. 한 여자가 먼저 만나자고 ‘단톡방’에 올리면 다른 여자가 안 그래도 톡 하려고 했었다고 톡을 달고, 또 다른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언제 만날까?’ 한다.
어쩐지 이 여자들을 만나야 이 방학을 잘 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든다. 만남에도 습관성이라는 게 있는 걸까?
원래 세 여자는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셋 다 아이 두 마리씩(?) 키우고 있었고, 남편은 여지없이 바빠 ‘독박육아’ 하는 날들이 많았다. 이런 공통점을 가진 여자들이 어디를 가겠는가? 바로 아파트 놀이터다. 104동에 사는 여자를 중심으로 놀이터에서 알게 된 107동에 사는 여자와 105동에 사는 여자가 만나 친하게 지냈는데, 처음에는 107동 여자가 다음에 104동 여자가 차례대로 이사를 하고 현재 105동 여자인 나만 혼자 남았다.
그러니 전처럼 자주 어울리기가 쉽지 않다. 그때는 제일 작은 아이가 두 살에서 큰 아이가 여덟 살까지, 아이 여섯 명이 한데 어울려 놀았고 세 여자는 먹을 것을 준비하여 끼니를 때우고 커피도 마시고 아주 가끔은 맥주도 마시고 그랬다. 세월이 지나 지금은 큰 아이들 둘이 열다섯 살, 열네 살 한참 사춘기 소년 소녀가 되었고, 얼마 전 107동 여자는 셋째를 낳아 아이들 일곱 명이 다 함께 어울려 놀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언젠가부터 세 여자는 아이들 없이 홀가분하게 만난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누구 엄마 누구 엄마 많은 인연들이 스쳐 지나갔다. 모두 아이 친구의 엄마였다. 아이들 사이가 벌어지면 엄마들의 관계도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러나 세 여자는 달랐다.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일까? 우리는 왜 방학 전에 꼭 만나게 되는 걸까?
세 여자의 만남에는 104동 여자를 빼놓을 수 없다. 104동 여자가 성격이 참 좋다. 한마디로 ‘오픈 마인드’의 소유자다. 그녀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들끓었다. 전에 104동 여자는 말했다. 자기는 늘 친구들이 많았다고. 한 번도 외로운 적 없었다고. 그 말에 난 충격을 받았다. 하긴 나처럼 가까워지기 어려운 내성적인 사람까지 친하게 지내는 거 보면 이 여자는 확실히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 그녀의 오픈 마인드는 상대를 편안하게 한다. 그녀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오케이, 땡큐”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는 오케이 사인을 만들어 보였다. 언제 어디서든, 웬만하면 “오케이, 땡큐”를 외치는 그녀가 놀랍기도 하면서 좋았다. 그녀를 따라 나도 점점 “오케이, 땡큐”를 말하게 됐다.
107동 여자는 성격이 장난 아니다. 이 여자는 크게 웃고 크게 말하고 크게 우는 여자다. 내가 아는 여자 중 가장 큰 여자다. 배포가, 배짱이 말이다. 여럿이 모이면 이 여자를 정치계로 보내야 한다고 다들 말한다. 난 이 여자를 보면서 잔다르크를 떠올린다. 그녀가 지닌 힘과 의지에 마냥 기대고 싶어진다. 이 여자는 망설임 또한 없다. 마음이 동하면 몸도 같이 움직여야 하는 여자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나는, 대체로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나는 그런 그녀가 참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처음으로 내게 누구의 엄마가 아닌 내 이름을 물어봤고 내 이름으로 불렀으며 그저 나를 나로서 알아봐 준 사람이었다. 그녀가 잔다르크가 아니더라도 나는 이 여자를 좋아할 것이 분명하다.
105동 여자, 나는 두 여자에게 어떤 존재일까. 일단 두 여자보다 네 살이나 많다. 두 여자는 나를 언니로서 꽤 존중해 준다. 두 여자는 동갑에 성격도 비슷한데, 굳이 MBTI를 따져보면 두 여자는 ‘ENFP’로 똑같고, 나는 ‘INFP’다. 두 여자는 모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편이다. 둘은 만날 때마다 “우리 이거 할래?” “저거 할까?” 뭔가 추진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와 힘이 느껴진다. 전혀 그렇지 않은 나까지 덩달아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되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그때, “어머! 얘들아, 우리는 지금 날 수가 없는데” 하며 비행기라도 타자고 말할 사람이 바로 나, 그녀들이 언니라고 부르는 105동 여자의 역할이지 않을까 싶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에너지 넘치는 두 여자를 바로 잡아줄 사람이지 않을까. “워~워~”
오늘, 드디어 세 여자가 만났다. 누구의 동네도 아닌 중간 지점 어느 큰 병원 상가 건물에서였다. 상가를 둘러보다 땡기는 대로 들어가 밥을 먹고 역시나 그런 식으로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많은 테이블 중 단연 말 많고 시끄러웠을 거였다. 안 본 사이 한 여자는 셋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고 경매를 배우고 있으며 운동으로 살을 뺐다. 다른 여자는 러닝을 하고 어제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또 다른 여자가 사춘기 딸에 대한 고민을 풀고 한참 투고 중이라며 각자의 근황을 전했다.
그러다 한 여자가 갑자기 그 상가 건물의 시세를 검색한다. 다른 여자가 이 건물에서 '우리 뭐라도 할까?'하고 제안한 직후였다. 또 다른 여자가 “뭐 할 건데?”하고 물으면, “난 뭐든지 다 할 수 있지”하고 대답한다. 이런 여자들이 그저 나는 너무 좋다.
저녁을 준비하는데 남편이 묻는다.
“너 무슨 좋은 일 있나 봐?”
“글세……, 나는 얘네를 만나고 오면 기분이 좋더라!”
좋은 기분이 되어 아이들 방학을 맞이한다. 앞으로 두 달간 매일 반복할 똑같은 잔소리에 미치고 환장할 때면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깔깔대며 뜬구름 잡던 그 순간들'을 떠올릴 것이다.
자고로 세 여자가 모이면 집 한 채는 우습다. 집 세 채정도는 너끈히 구하고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