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은 잊기 싫다. 버리고 싶지 않다.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다 해도 말이다. 이를테면, ‘마후라’ 같은 말…
오늘 아침에는 이 말을 입에 올렸다 괜한 소리를 들었다. 그게 언제 적 말이냐며. 왜 일어를 쓰냐며. 순간 나는 당황하여 그저, 심심하냐고 왜 시비냐고 대꾸했다.
“우리 할머니가 쓰던 말이야.”
“그걸 핑계라고 대냐? 그게 언제 적인데, 지금이 일제 강점기냐? 스카프라고 고쳐야지”
“스카프? 그렇게 말하면 뉘앙스가 안 살아, 할머니는 이런 목도리를 스카프 하듯이 얼굴을 싸맸단 말이야. 이렇게!”
나는 긴 목도리를 목에 한 번 감고 두 번째 감을 때 귀를 덮고 정수리를 지나 반대쪽 귀를 덮으며 그 방향으로 한 번 더 목을 감은 후 도로 돌아와 목도리 끝을 질끈 묶었다. 보란 듯이, 마치 ‘마후라’는 이렇게 하는 게 정식이라는 듯이. 영이 먼저 건네준 귀돌이보다 훨씬 따뜻해 보였다. ‘마후라’가 내 두 뺨, 귀, 머리 목까지 온통 나를 감싸줬기 때문이다.
밖은 영하 8도. 올해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다. 밤새 내린 눈으로 체감 온도는 더 낮을 것이다. 나는 마스크 하고 장갑을 끼고 털부츠까지 챙겨 신었다. 잔뜩 무장하고 아파트 현관을 나섰다. 길가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얼어 있었다. 마스크를 열어 공기를 들여 마신다. 차갑지만 시원하다. 신선한 아침 공기에 산뜻해지는 기분이다. 일부러 눈을 밟고, 언 길로 향한다. 옆 동에 사는 정은 나보고 빙판길 조심하라고 카톡까지 보냈지만, 도서관 다니는 이 철없는 언니는 빙판길만 골라서 가고 있다. 한 발을 앞으로 쭉 밀며 미끄러진다. 빙판길을 만나면 거의 자동이다. 앞에 관리 사무소 직원들은 미끄러지지 말라며 제설제를 뿌린다.
역시 할머니처럼 마후라를 뒤집어써야 한다. 웬만한 칼바람도 막아주니 말이다. 이렇게 마후라를 두른 할머니 손을 잡고 5일 장에 따라가서 족발도 먹어보고 오뎅 국물도 마시고 억지로 유치원도 다니고 그랬다. 불현듯 억울한 생각이 든다. 아까 영의 타박이. 할머니가 쓰던 말인데, 왜 이제는 쓰면 안 된다는 건가? 나는 그렇게 들었고 배웠고 컸는데. 마후라 외에도 할머니가 쓰던 일어들은 꽤 많았다. 할머니는 1931년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겪었고 6.25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할머니는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그때 익혔던 일어들을 썼고 세상에서 빨간색을 제일 싫어했다. 혐오했다. 마후라는 그렇게 역사가 할머니에게 가르친 언어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마후라는 분명 한때는 자연스럽게 쓰던 생활어였다. 일본어에서 온 외래어가 맞기 하지만,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일상어처럼 굳어져 있었고, 특히 할머니 세대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말이라 그걸 썼다고 해서 비난할 일은 아니라는 거다. 영이 내게 지적할 만한 잘못은 아니라는 거다.
무엇보다 내가 이 말을 버리기가 싫다. 버리기는커녕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다. 계속 쓰고 싶다. 영이 아닌 그 누가 뭐라 해도. 난 마후라를 이렇게 뒤집어쓰고 싶다. 그게 촌스럽고 이상해 보여도 말이다.
마후라를 뒤집어쓰는 날에는 어김없이 할머니가 떠오른다. 할머니의 말투나 억양, 표정과 냄새, 내 손을 꼭 쥐었던 할머니 손의 까끌까끌함이나 따뜻했던 온기가 그대로 되살아난다.
이제는 볼 수 없는 할머니
내 기억 속에만 사는 할머니
‘마후라’는 그런 할머니의 기억을 품고 있는 말이다. 그래서 내게는 지키고 싶은 무언가다.
(영이 알리 없겠지… )
아무려나!
추운 날이면 그저 마후라를 쓰고 할머니를 만날 거다.
할머니를 따라 장에도 가고 마실도 가고 그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