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청주에서 박완서의 책까지

8월 11일의 일기

by 세언
청주 숙소 앞 작은 시냇가

휴가 동안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쪘는데 키도 컸나 보다. 건강검진을 했더니 168.8이 나왔다. 작년보다 0.8센티가 더 자랐다. 엄마는 다 큰 애가 더 클 키가 있었느냐며 어이없어했다.


자주 여행을 다니던 동기들과 청주를 다녀왔다. 1년 반 만에 다녀온 짧은 여행이었다. 사실 여행이라기보다는 피서에 가깝다. 모두가 각자 처한 상황과 직면한 과제들을 치열히 풀어나가느라 바쁘게 지내는 까닭이다. 그 시간을 쪼개어 술잔을 부딪칠 수 있음에 즐거워하기로 했다. 함께 나누어마신 물가의 축축하고 싱그런 공기가 코밑을 맴돈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강화도 어느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 또한 여행보다는 차라리 캠핑에 가까울 정도였지만, 가족끼리 수영을 하고 집 밖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치맥을 하는 광경이 꽤 오랜만이라 그런대로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숯불 냄새를 맡으며 들었던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이 다시금 귓가를 훑는다.


정해지지 않아 막연하게 답답하고 불안한 일들이 몇 가지 있다. 끝을 보면 좋겠는데 당장 하지 못해 얼른 시간이 지나가버렸으면 싶다가도, 돌이켜보면 지레짐작하여 성급히 결정하고 떠났다가 후회했던 그때만큼 사무친 적이 있었나 싶다. 가만히 두었더라면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여 자책했던 날들, 그래서 비 내리는 새벽 누군가의 품에 얼굴을 묻고, 또는 정든 땅을 떠나며 홀로 비행기에 탑승해 펑펑 울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간다.


이런저런 상념을 끊고 박완서의 책을 마저 폈다. 차마 피난을 못 가고 인민군 치하의 적막한 서울에서 빈집을 털어가며 살아냈던 스무 살 남짓의 그녀와 그 올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동시에 이 세상에 자리한 그 누구의 서사도 지독하지 않은 구석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의 것이나 누군가의 것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가 없다고, 각자가 제 몫이 생겨먹은 대로 살아갈 테니 내 몫 이상으로 보살피지 좀 말라고 되뇌었다. 나에게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 외의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는 마음 또한 내 몫을 벗어난 영역 같기도 하다.


쉬운 일은 아니다. 약한 위염이라고 했던 의사 선생님의 말이 무색하도록 쥐어짜는 위통이 찾아오는 것처럼, 소설에 파묻히려던 의도와 다르게 생각이 샛길로 새는 것처럼, 내 마음에 달라붙는 사람들과 온통 시간을 보내더라도 결국 홀로 돌봐야만 하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늘 다짐하지만은 그녀에게 문득 그날들을 글로써 남겨야겠다는 강렬한 예감이 찾아왔듯이, 나 또한 언젠가 글로써 끝장을 보리라는 상상을 하고는 한다. 그래서 내 주변과 그 너머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글감으로 여기며 부정하려 들지 않고 천천히 소화해내려는 성싶다. 크게 탈이나 나지 않으면.


2021.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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