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맥스가 지나서였을까.
그 후의 경기는 어딘가 모르게 맥 빠지게 진행되었다.
서로 이렇다 할 장면 없이 소강상태에 빠져든 경기는 결국 연장전에 접어들고야 말았다.
우리야 김용수가 조금 길게 던지면서 끌고 가면 되지만 저쪽은?
1회부터 올라온 김홍집이 10회말에도 또 나오는 게 아닌가.
아무리 오늘이 긁히는 날이라고는 해도 이미 꽤 많은 공을 던진 그였다.
아니, 태평양에는 그렇게 투수가 없나?
맞다. 태평양에는 투수가 없었다.
한국시리즈 엔트리 상 LG는 투수가 10명이었지만 태평양은 8명뿐이었다.
속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이건 명백한 감독의 전략 미스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타력보다 투수력이 강했던 태평양은 어떻게든 끈끈한 투수전 분위기로 시리즈를 끌고 갔어야 했는데 겨우 8명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실은 고마운 맘이 더 컸다.
한화와의 플레이오프 마지막 경기에 나왔던 투수들과 앞으로 선발로 나설 예정인 투수들을 제외하면 나올 수 있는 투수는 정명원, 박은진 정도였다.
정명원은 사상 최초로 40세이브를 기록한 세이브왕이었지만 유독 LG에는 약했고, 박은진은 정점에서 내려오고 있던 투수였기 때문에 타이트한 경기 후반에 쓰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정명원은 유일하게 태평양이 앞서 갔던 3차전 승부처에서 역전을 허용하며 무너져 시리즈 흐름을 완전히 LG 쪽으로 넘겨주게 되었다.
뭐, 어쨌든 우리한테는 고마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홍집은 지치지도 않는 것 같았다.
10회말도 가뿐하게 막고 내려가는 그를 보며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23살의 젊은 투수는 그날 그 경기에 모든 걸 걸고 있는 것 같았다.
팀의 운명도, 자신의 왼팔도, 어쩌면 자신의 미래까지도.
그날의 김홍집은 LG 타자들과 싸웠고, 자기 자신과도 싸웠다.
우리보다 강한 상대와 맞서야 한다는 두려움과도 싸웠을 것이고, 어쩌면 내 뒤에 아무도 없다는 막막함과 외로움에도 맞섰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던지고 던지고 또 던졌다.
11회말에도 그는 다시 올라왔다.
첫 타자 유지현을 1루 땅볼 처리하며 1 아웃을 잡았을 때, 그는 이미 140번째 공을 던진 후였다.
그리고 그가 던진 141번째 공은 김선진의 끝내기 홈런과 함께 다시 그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그 당시 서용빈에 밀려 방출 대상에 올라있던 김선진에게는 일생일대의 한방이었다.
그는 그 한방으로 선수 생활을 연장시킬 수 있었고 95년에는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2000년까지 LG에서 뛴 그는 훗날 LG의 타격코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94년의 한국시리즈는 이 홈런 한방으로 기억된다.
LG는 2, 3, 4차전을 모조리 이기며 4전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나는 물론 엄청 기뻐했지만 그 경기들의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 기억 속에는 김선진의 끝내기 홈런과 그런 한방을 허용했을 때 흔히 투수들이 하는, 주저앉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한동안 가만히 있거나 하는 몸짓 없이 그저 짧게 한숨을 푹 쉬고 난 후 담담하게 마운드에서 내려오던 김홍집의 처연함만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마운드를 내려오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꼭 그날의 여파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김홍집은 다시는 94년과 같은 임팩트를 남기지는 못했다.
모든 것을 걸고 홀로 싸워야 했던 언더독의 결말이 141구 완투패가 아닌 완투승이었다면 어땠을까.
그 한방이 아니었다면 LG와 태평양의, 김선진과 김홍집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찰나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그 짧디 짧은 순간의 결과 하나로 한쪽이 모든 걸 가져가게 되는 야구는 그래서 때때로 잔인하다.
기쁘고도 잔인했던 고2 시절의 가을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