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한국 천만 관객 영화의 이변
한 해의 절반 이상이 지나고 두 번의 큰 명절 연휴가 끝났다. 방학과 긴 연휴는 영화 흥행의 적기이기에 올해 흥행 기대작들은 거의 윤곽을 드러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영화가 관객의 호응을 얻었지만 ‘천만’ 고지를 넘본 대표작은 <곡성>과 <부산행>. 이들은 지난해 <암살> <베테랑>처럼 흥행 엔진을 탑재한 블록버스터와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장르적인 특성을 강하게 띤 영화들이 보편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점이 일단 눈에 띈다.
명절 연휴가 시작되면 극장가는 소위 대목을 맞는다. 긴 연휴도 연휴지만 보통 한 명 내지 두 명이던 관객 단위가 순식간에 세 명 이상의 가족 단위로 바뀌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절에 극장 가는 거 촌스럽니 어쩌니 한들 영화만큼 만만한 오락거리도 없다는 게 우리네 현실. 덕분에 이맘때면 꼭 이런 우스개가 떠오른다. 1년에 영화관 한 번 갈까 말까 한 사람들이 가서 보는 영화가 ‘천만영화’가 된다는 얘기 말이다(비슷한 예로 1년에 책 한 권 살까 말까 한 사람들이 책을 사야 비로소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얘기도 있다). 단순히 우스개로 치부할 수만도 없는 것이 연례행사로 극장을 찾는 이의 수는 실제로 상당하다. 더욱이 이들을 극장으로 모는 시기가 바로 명절 시즌이니 매년 이때만 되면 ‘승자’를 점치고 천만 영화를 운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들이 선택하는 단 한 편의 영화가 천만 고지를 넘어서기 위한 중요한 동력이 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니 말이다.
그만큼 한국 영화계에서 ‘천만’이라는 숫자는 각별하다. 5천만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천만 관객은 대흥행의 척도일뿐 아니라 그동안 영화와 무관하던 사람들의 관심까지 일거에 환기하는 하나의 사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단 어떤 영화가 천만 관객을 목전에 둔 시점부터 언론은 너나 할 것 없이 영화에 다양한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장점은 무엇이며, 왜 사람들이 이 영화에 그렇게 열광하는지, 그 특별한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덕분에 한국에서 ‘천만 영화’란 단순히 재미있는 영화라기보다는 때때로 한 시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 일쑤다.
그렇다고 늘 천만 영화가 동시대의 면면을 투영하는 것은 아니다. 작년만 해도 무려 세 편의 영화가 천만 고지를 밟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천만 영화 반열에 올라선 세 편의 영화 <암살> <베테랑>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각각 관객을 천만 명이나 동원한 것은 굉장한 일이지만 이 영화의 흥행 자체가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세 작품 모두 대중성을 최우선으로 삼는 검증된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티켓 파워를 가진 배우가 다수 출연하고, 대규모 자본을 투여해, 스크린을 독점하다시피 배급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철저히 흥행을 목표로 기획된 블록버스터의 성공일 뿐 이 영화의 성공이 이례적인 ‘사회현상’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과거 <왕의 남자>(2005)나 <괴물>(2006), <7번방의 선물>(2013), <변호인>(2013)처럼 몇 가지 부족한 조건을 딛고 뜻밖에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다.
그에 비하면 올해는 분위기가 조금 남다르다. 아니, 굉장히 수상쩍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시작은 나홍진 감독의 <곡성>부터였다. 전작 <추격자>와 <황해>로 범죄 스릴러 장르에 특화된 탁월한 감각을 자랑한 나홍진 감독은 세 번째 장편작 <곡성>에서 관객들의 기대를 시원하게 배신했다. 시치미 뚝 뗀 채 범죄 스릴러를 가장하던 영화는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공포영화의 익숙한 소재를 와르르 쏟아낸 것이다.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디딘 스릴러의 세계를 들여다보던 관객들은 환상과 현실을 교묘히 뒤섞다 마침내 오컬트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의 생소한 결에 적잖이 당황했을 법하다. 마케팅 역시 이 영화의 핵심을 꽁꽁 감춘 덕에 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됐다. 결국 <곡성>은 최근 한국 공포영화로는 이례적으로 7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또한 영화 밖에서조차 각종 유행어로 회자되는 등 하나의 신드롬으로까지 이어졌다. 호러팬이 아닌 관객들조차 기분 좋게 뒤통수를 내어준 하나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올해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넘어선 영화 <부산행>의 성공은 더더욱 예상 밖이었다.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잘 알려진 연상호 감독의 첫 실사영화 연출작인 <부산행>의 실체는 뜻밖에도 좀비 영화였다. 물론 기존 좀비영화와 비견한다면 <부산행>은 상당히 평이한 작품에 속한다. 호러 팬들에게는 다분히 익숙한 무대와 상황, 캐릭터를 배치해 비교적 안전한 방향으로 일관한 영화였던 것이다. 물론 어떤 장르영화든 한국이라는 특수한 요소가 가미될 때 생기는 이질감이 이 영화에도 오롯이 담겨 있다. 여기에 자기 희생과 이기주의가 수시로 교차하고 가족애가 진하게 곁들여지면서 <부산행>의 드라마는 매순간 효과적으로 기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좀비라는 괴물보다는 재난에 초점을 맞추고 제한된 공간 안에서의 긴박감을 극대화하는 순간, 아마도 좀비가 뭔지도 몰랐을 관객들에게조차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가 됐을 게 분명하다. 늘 마니아의 전유물, B급 문화에 머물던 좀비영화가 비로소 천만, 아니 천백만 영화에 등극한 순간이다.
여전히 천만 영화의 파급력은 대단하다. <암살>은 일제강점기 영화의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했고, <베테랑>은 가진 자를 악인으로 설정한 일련의 작품들의 가장 모범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그에 비한다면 <곡성>과 <부산행>의 약진으로 호러영화의 득세를 논하기에는 아직 한참 이르다. 그러나 그동안 이 세계에 전혀 발 디디지 않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만남을 주선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들의 흥행에 의미를 부여하기엔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관객의 수와 영화의 질은 결코 일치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극장에서 더 많은 사람이 새로운 재미와 조우하는 ‘사건’은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도 그걸 위한 흥행이, 그걸 위한 천만 영화가 나왔으면 한다.
글 강상준
<DVD2.0> <FILM2.0> <iMBC> <BRUT> 등의 매체에서 줄곧 기자로 활동하면서 영화, 만화, 장르소설, 방송 등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글을 쓰며 먹고살았다. <위대한 망가>를 썼고, <매거진 컬처> <젊은 목수들>을 공저했으며, <공포영화 서바이벌 핸드북>을 번역했고, <좀비사전> <탐정사전>을 기획, 편집했다. 현재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겸 프리랜스 편집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사진 제공 퍼스트룩, 호호호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