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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Oct 14. 2016

우리가 져야할 책임은 여기까지거든요

극단 산수유 <12인의 성난 사람들>


16세 소년이 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재판의 모든 정황과 증거들이 소년을 범인으로 지목한 가운데, 이제 12명의 배심원들에게 최종 평결만이 맡겨진 상태. 결정은 만장일치가 되어야 하고, 법정에는 “한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라는 재판장의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리고 여기 그의 유죄를 확신하는 11명의 배심원들과 조용히 무죄 쪽에 손을 들어 모두에게 이 결정을 다시 한 번 숙고해보길 청하는 한 사람이 있다. 자, 과연 이것은 무엇에 대한 공방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 이들이 진정으로 수호해야 할 가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극단 산수유의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원작 영화의 비판적 시각에 한 발 더 거리를 둠으로써, 이 모든 질문들을 지금 우리의 현실로 끌어안는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1957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레지날드 로즈 작,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배심원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오직 인물들의 말로써 살인사건을 재구성하고, 피고의 유무죄 여부를 검토해가는 밀도 높은 극 전개로 호평 받은 작품이다. 영화의 성공 이후 1964년 런던에서는 이 작품이 연극으로 초연되었으며, 일본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미타니 코키는 1991년 이에 영감을 받아 <12명의 마음 약한 일본인>이라는 영화 각본을 썼다. 1997년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이 TV물로 다시 제작하기도 했던 이 작품은 미국 사회 전반에 개인의 윤리와 사회 시스템에 대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의 연극 무대에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를 가로지르는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수의 의견에 맞서는 한 명으로 인해 ‘쉬운’ 결정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더구나 그 결정이 정작 자신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한 소년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일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따라 결정하십니까


작품은 살아온 배경도, 각자의 맥락도 다른 12인의 배심원들을 등장시켜 같은 사안을 두고도 서로가 얼마나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지 그 갈등의 국면을 낱낱이 드러내 보인다. 그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감을 근거로 증언을 해석하기도 하고, 실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증거물을 다뤄 보이기도 한다. 결정이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개인이 신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의 의미를 역설하는 사람도 있다. 밥을 먹고 하자는 사람, 야구 경기를 봐야 한다는 사람, 그 와중에 자기 사업을 선전하는 사람과 종이를 펴놓고 옆에 앉은 이와 게임을 하는 사람까지, 인물들의 사소한 언행 하나하나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반응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민주주의라는 우산 아래 모여 있는 어떤 한 부분집합, 이 특별하고도 평범한 사람들이 연극 내내 무대를 가득 채운 채 함께 써내려가는 인간 행위의 종합보고서는, 우리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잠깐, 여기는 배심원실이 아니었어!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결코 조급해하지 않고 합리적 의심과 진지한 토론을 바탕으로 ‘옳은’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재판 중에 제시되었던 ‘객관적’ 증거들이 하나 둘 무효화되고, 배심원들 사이의 유죄와 무죄를 가르는 투표도 이제 분명히 ‘정의’의 편으로 기울어진 듯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뒤늦게 밝히자면, 기실 이 연극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 모든 이야기를 통째로, 어떤 다른, 완전히 차원이 뒤틀린, 그런 곳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는 사실! 아마도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눈에 보이는 무대 세트만으로 직감할 수밖에 없는 이 연극의 대전제에 대해서 류주연 연출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지난 해 열 살짜리 아이가 아파트 옥상에서 벽돌을 던져 사람을 해친 사건을 접하면서 그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고민해보게 됐다. 아이가 저지른 사건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지만, 과연 응보만이 최선의 것인지, 죄와 벌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하던 차에 이 작품을 접했다. 원작은 그 자체로 시대를 뛰어넘은 울림을 주지만 지금 이 연극은 그것을 한번 더 뒤집어 보여주고자 한다. 유죄냐 무죄냐를 따지는 사이 이들이 스스로를 가둬버린 것은 아닌지, 한 인간의 목숨이 달린 결정에 대해, 열여섯의 아이가 저지른 죄를 벌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면서 관객들이 작품 전체를 부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품 속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빛나는 이성을 발휘해 결국 무고한 한 소년을 억울한 죽음으로부터 건져 올렸다. 그리고 이로써, 다수의 위압을 묵묵히 견디면서도 소신껏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은 한 인간의 단단한 의지가 얼마나 숭고하고도 위대한 것이었는지 증명되었다. 그런 그가, 소년의 불우한 가정환경을 범죄 동기로 확신하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답했다. “제가 아는 한 우린 이 사건에 기소된 저 소년이 아무런 의심할 바 없이 유죄냐 무죄냐를 판단하면 되는 겁니다. 범죄자의 살인동기에 관한 문제는 우리의 소관 밖입니다” 이 연극은, 어쩌면 그렇게나 정답인 그들의 의무와 책임을 다함으로써 모두가 애써 눈감아버린 다른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너머 인간을 질문한다.


[사진: 극단 산수유 제공]





일시: 10월 13~30일 평일 8시, 토 3시7시, 일 3시, 월 쉼

장소: 미마지아트센터 물빛극장

작: 레지날드 로즈

연출: 류주연

출연: 홍성춘, 강진휘, 남동진, 이종윤, 유성진, 신용진, 한상훈, 현은영, 김애진, 

    박시유, 반인환, 홍현택, 서유덕

문의: 010-3752-1352





김슬기 공연저술가

창작을 위한 읽기와 기록을 위한 쓰기를 하고 있다.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한다.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근무했고, 국립극단 학술출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연극과 관련된 출판물과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대학원에서 연극 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공연 드라마투르그를 비롯해 각종 연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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