켜켜이 쌓인 시간의 향기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이맘때면 자연히 ‘책’을 가까이하고 싶어지는 것은 계절적인 관성일까. 1934년에 문을 연 오래된 고서점 ‘통문관’을 찾아가기 위해 안국동사거리에서 인사동 삼일로에 이르는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잰걸음으로 바삐 걷다가도 이 길에 들어서면 마음도 발걸음도 죄다 풀어진다. 여전히 상점을 구경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많고 요즘엔 부쩍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이도 자주 만나게 된다. 이리저리 눈요기하다가 뜻밖의 공간에서 ‘통문관’이라는 현판을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이란... 늘 다니던 길에 고서점이 버젓이 서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안국역에서 인사동 골목길로 들어선 초입에 말이다.
그동안 단 한 번 눈길조차 준 적이 없는 가게였다. 난감해하며 들어서자 고서가 천장까지 빼곡하게 꽂힌 책장들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동시에 고서들이 내뿜는 시간의 향기가 진동한다. 오기 전에 고서점의 냄새를 상상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은은했다. 오래되고 낡은 것들이 주는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마저 든다. 책장들 사이 좁다란 통로 끝에 놓인 책상에 앉아 ‘통문관’ 3대 관장인 이종운 씨가 반갑게 나를 맞는다.
“통문관 문을 처음 연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두 가지에요. 고서들을 보고 신기해하거나 고서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도망치듯 나가거나요. 대개 일반인들은 이곳을 기웃거리지도 않거든요. 보통은 고서를 즐기는 사람들만 오니까 늘 오는 사람만 오죠.”
통문관은 고서적을 매매하는 곳으로 한때는 출판업도 겸했다. 현재 통문관 내에는 2만 여권의 책이 있다고 한다. 이종운 관장의 집에 방 두 개를 차지한 고서와 창고에 있는 것까지 합하면 대략 5만 권은 넘는다. 그중 가장 연대가 오래된 책은 고려 말에 쓰인 것이다. 대부분 사극에서나 봤음직 한 구형판의 형태라 더욱 낯설다. 빙 둘러보았지만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책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한자로 쓰인 책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눈은 서둘러 낯익은 한글 제목의 책을 찾느라 분주하다. 헌책방으로 생각하고 들어왔다가는 고를 수 있는 책들에 한계가 있어 통문관의 주된 손님은 고서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이들과 고서의 가치에 투자하는 수집가들, 그리고 한자에 익숙한 일본인과 중국인 관광객들이 대부분이다.
‘통문관 앞을 지나는데 / 노란 은행잎 속에서 이겸노 옹이 바스락거린다 / 그의 생애가 인사동이다’/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유명한 이생진 시인의 '통문관'이라는 시에는 1대 이겸로 관장이 등장한다. 인사동의 터줏대감으로 불렸던 이겸로 관장이 타계한 지 올해로 10주기가 된다. 평안남도 용강에서 1909년에 태어난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배움에 대한 갈증이 컸다. 16세가 되던 해,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부산으로 갔다가 마침 고향 친구를 만나게 된다. 배고픔에 허덕이던 때라 일본으로 가는 대신 친구가 소개한 일본인 고서점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당시 고서와의 인연이 훗날 통문관으로 이어진 셈이다. 이겸로 관장은 26살이던 1934년에 인사동 서점 금문당(金文堂)을 인수하고 상호를 금항당(金港堂)으로 바꾼다. 시작은 참고서와 교과서를 취급하던 서점이었는데 차츰 고문헌을 수집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이겸로 관장은 서점의 간판을 ‘통문관(通文館)’으로 고쳐 달았다. 원래 ‘통문관’은 고려시대 충렬왕 때 설치된 관청으로 한어(漢語)를 가르치고 통역에 관한 업무를 보던 곳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고서점의 이름에 ‘통문관’을 붙인 것일까. 아마도 이곳을 통해서 과거의 언어로 쓰인 옛이야기들이 제대로 후대에 통역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인지 이겸로 관장은 고문헌들을 매매하는 데 열을 올리기보다는 제대로 된 임자를 찾아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통문관’의 단골로도 유명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이겸로 관장을 회고한 글을 보면 6․25동란 중 폐허 속에 나뒹구는 책더미 속에서 <월인천강지곡>을 찾아낸 것을 생애 가장 큰 기쁨으로 얘기하곤 했다는 구절이 있다. 게다가 <월인천강지곡> 말고도 <월인석보>, <독립신문> 등 숱한 문화재를 발굴하고 기증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서예사 자료를 예술의 전당에 기증하고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이겸로 관장의 호를 따 ‘산기(山氣)문고’라는 이름으로 기증한 서적들을 운영하고 있다니 인생을 통틀어 스스로 통문관의 역할을 하신 큰 어른임을 짐작하게 된다.
“할아버지가 직접 쓰고 출간한 ‘통문관 책방비화’를 보면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아요.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가재도구 대신 <조선군서대계> 80권을 짊어지고 피란길에 올랐다고 하고요. 심하게 훼손된 고서의 경우는 한 장 한 장 인두로 다리고 풀을 먹여 살려냈다고 하더라고요.”
고서에 대한 1대 이겸로 관장의 애정을 그대로 이어받은 3대 이종운 관장 또한 가장 뿌듯한 기억으로 꼽는 것이 ‘상해 독립신문’을 서울역사박물관에 보낸 일이다. 자본금이 없었던 상해독립협회에서 발행한 것으로 때로는 2~3일에 한 번, 어떨 때는 몇 주 만에 발행된 낱장의 신문 170여 장이 묶음으로 손에 들어왔다고 한다. 종이 자체가 창호지처럼 빳빳한 것이어서 잘못 만지면 부서지고 끊어지기 쉬워 개인이 관리하는 것보다는 박물관에서 보관해야 그 형태가 온전할 수 있겠다 싶었단다. 불가사의하게도 50년의 간격을 두고 <독립신문>은 할아버지에게, <상해 독립신문>은 손자에게 전해진 것인데 생명이 없는 고서라 해도 그 가치를 알아주는 이에게 인연이 닿는 모양이다.
“제가 운영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게 인연이에요. 고서도 영물이라 저와 인연이 닿지 않으면 아무리 책값을 많이 드린다고 해도 제 손에 오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반대로 인연이 되려고 하면 책값을 적게 드려도 제게 팔겠다는 분이 나타나거든요. 정말 오래 하면 할수록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6살 때부터 통문관을 드나들었던 3대 이종운 관장은 늘 고서를 보고 만졌던 때문인지 자연스레 고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거기에 국문학 전공까지 한 덕에 20여 년 전인 1997년, 큰 이물감 없이 통문관 주인이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이종운 관장의 아버지인 2대 이동호 관장이 잠시 통문관 운영을 맡은 적이 있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아버지인 이겸로 관장보다 먼저 생을 등졌다고 한다.
“제가 할아버지의 첫 손주거든요. 그래서 유난히 예뻐하셨어요. 토요일에 학교를 마치고 통문관에 오면 할아버지는 항상 저를 빵집으로 데리고 가셨죠. 단팥빵에 우유를 데우고 소금을 살짝 넣어서 주셨어요. 그러면 정말 우유가 더 고소했어요.”
20여 년간 통문관을 운영하면서 이종운 관장에게도 기억에 남는 손님들이 있다. 한 권에 8천만 원 하는 고서를 구입한 손님도 아니고, 묶음의 책을 2억에 구입한 손님도 아니다. 오래도록 고서 모으기를 취미로 한 손님이 여든쯤 되어 자신의 서재를 정리하고 싶다고 직접 연락을 해왔단다. 어르신의 집에 찾아가 서재에 발을 디뎠을 때 받은 느낌은 애잔함이었다. 평생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하나 둘 모아온 분의 서재를 둘러보다 보니 그분이 얼마나 책에 애정을 가졌는지 마음으로 느껴지더란다. 고서의 값을 떠나 생을 마감하기 전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책을 정리하고 떠나야겠다고 결정한 그분의 마음이 이해가 되어 조금 더 값을 매기는 것으로 예의를 다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직접 고서를 가지고 찾아오는 이들 가운데 기가 막힌 경우도 접하게 된다. 영화 <올드미스 다이어리>를 보면, 값이 나가는 문서인 줄 알고 가져간 것이 하필 노비문서였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나온다. 혹시 이렇듯 씁쓸한 에피소드는 없었는지 여쭤보았다.
“어떤 손님이 고서를 가지고 찾아왔어요. 친구가 급하다며 2천만 원을 빌려달라고 하면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책이라 2천만 원은 훨씬 넘게 받을 거라고 했대요. 그런데 제가 살펴보니까 20만 원의 가치도 없는 책이더라고요.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해요.”
현재 통문관에 비치된 고서 가운데 이종운 관장이 아끼는 책은 무엇일까. 망설임 없이 <명의록(明義錄)>과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을 꺼내 보여준다. <명의록>은 세손이었던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한 홍인한과 정후겸 등을 사사(賜死)한 일이 정당함을 기록한 역사서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고서의 경우 80~90%는 문집 형태인데 역사서의 경우 책으로 나오는 것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증수무원록>은 요즘으로 치자면 법의학서다. 무원(無寃), 잘못된 판단으로 원망하는 이들이 하나도 없게끔 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책이다. 중국 송나라 때의 법의학서를 종합해 편찬한 <무원록>에 중국 방언이 많아 이해가 어렵다 보니 내용을 첨삭하고 주석을 달아 다시 편찬한 책이란다.
통문관에는 고서 외에도 오래된 사진이나 엽서, 서구의 근대무용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한 무용수 최승희의 사진도 있다. 그러나 이종운 관장이 개인적으로 애정을 갖는 책은 따로 있었다. 통문관 구석에 놓인 금고를 열어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노천명 시인의 시집 <창변(窓邊)>이었다. 노천명 시인은 친일파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창변>은 1945년 초, 그녀의 시와 친일시 9편을 묶어 친일 신문사인 ‘매일신보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런데 출간하고 몇 달 뒤 해방되자 서둘러 시집을 수거해 뒷부분에 실린 친일시를 다 뜯어내고 재출간했다는 거다. 그런데 이종운 관장의 손에 친일시 9편이 온전히 담긴 시집이 들어온 것이다.
“당시 시인과 매일신보사가 시집을 수거해서, 뒷부분 9편을 떼어내고 앞쪽 목차는 창호지로 덧발라서 안 보이게 한 뒤 다시 간행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노천명 시인이 손수 지인에게 친필로 적어서 선물한 시집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 제게 온 거죠. 용의주도하게 증거인멸을 하려고 했지만, 역사는 다 알고 있거든요.”
요즘 통문관을 찾는 단골손님들 가운데 가장 어린 손님은 삼십대 초반의 석박사 학위를 가진 이들이고, 나이 많은 이들은 아흔이 넘는다. 그들 대부분은 고서를 연구하거나 어릴 적부터 고서를 읽고 취미로 모으는 이들인데, 최근 들어 바뀐 경향이 있다면 고서를 투자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이들이 있단다. 그런데 그들은 고서에 관심조차 없으면서 다짜고짜 돈 되는 게 무엇인지부터 묻는다고 한다.
“젊은 친구들이 찾아와서 어떤 책에 투자하면 돈이 되는지 추천해달라고 해요. 기가 막히죠. 그러면 저는 주식에 투자하실 때 남들이 하라는 대로 하시냐고 되물어요. 고서에 투자하려면 똑같다고 설명을 하죠. 고서에 대해 공부를 하는 게 먼저라고 말씀드립니다.”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에 통문관의 주인이 된 이종운 관장도 무작정 고서를 찾아 헤매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엔 보는 눈도 없고 고서에 대한 식견도 적어 손에 잡히는 대로 어떤 책인지 찾아보고 또 값싸게 구입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단다. 비록 그 책이 그다지 값어치가 없는 책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고서나 고미술품에 관심이 있다면 먼저 전시회나 박물관에 가서 그 형태나 모양에 친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그렇게 조금씩 고서와 친숙해지면서 통문관을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보고 스스로 공부하다 보면 좋은 책을 저렴하게 사는 눈도 트이게 된단다.
통문관 문 앞에는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에서 수여한 ‘풀꽃상’ 상패가 걸려있다. 1999년의 일이다. 돌이나 새와 같은 자연물에 본상을, 동시에 의미 있는 인물에게 부상을 주는 풀꽃상을 1대 이겸로 관장이 받았다. 상패에는 인사동 골목길과 통문관의 가치에 대한 멋진 글귀가 적혀있다.
‘인사동 골목길은 무하지역(無河地域)에 흐르는 개울과 같습니다. 이 길을 지날 때 우리는 한 마리 왜가리처럼 느긋해집니다. 우리의 발걸음에 여유를 주고 시간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 인사동 골목길에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4회 풀꽃상을 드립니다.’
속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메마른 땅의 한줄기 개울처럼 쉬어갈 수 있는 장소는 필요하다. 이종운 관장은 통문관이 100년이 되는 해에 통문관이 가진 고서나 자료를 일반인들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 한다. 가을이 가기 전에 왜가리처럼 인사동 골목길을 느긋하게 거닐다가 오래된 고서가 이끄는 시간의 향기에 흠뻑 취해보는 것은 어떨까.
글, 사진 천준아
방송작가. 독립잡지 ‘노처녀에게 건네는 농’ 발행인 겸 편집인. 좋으면 덕질부터 하고 봅니다. 그러면 예상치 못한 근사한 일들이 수순처럼 따라온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