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동(龍門洞) 용문시장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역과 용산 전자 상가 사이. 용문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우연한 기회에 컴퓨터 A/S 센터를 찾아가다 그사이에 웬 재래시장이 제법 큼지막하게 있어 괜히 반가웠었다. 그곳이 바로 용문시장이다. 용문동이라는 이름은 용산(龍山)의 '용' 자와 옛 지명인 동문외계(東門外契)의 '문' 자를 따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조선시대 서울의 행정 구역 중 도성 밖10리 이내에 해당하는 지역) 지역이었고, 1751년(영조 27)에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龍山坊) 동문외계(東門外契)로 불렸다.
1914년에는 경성부 대도정(大島町)으로 바뀌었다가 해방 후, 1946년에 용문동이라는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청나라에서 군대를 파병하게 되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 또한 군대를 파병하게 되었다. 그때 군을 이끈 일본 장수의 이름이 대도규개(大島圭介)였고, 그 군사들이 용산 일대에 주둔했다. 일제시대 이 지역의 명칭인 대도정(大島町)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라 하니, 일제가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한 행적들이 지명 하나에조차 정말 깨알같이 배어 있는 셈이다. 군대를 따라 자연스레 이 일대에 유곽이 들어서고, 떡 하니 장군 이름을 딴 사창가가 되었으니 그 꼴이 또 참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그 또한 이제는 다 과거지사. 지금은 또 아파트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서울 곳곳 생각 없이 지나가던 공간들이 이리 하나하나 다 지난 역사의 무대였다는 생각을 하면 발걸음 한 번 그냥 쉬이 지나칠 수 없게 되곤 한다
6호선 효창공원역 4번 출구를 나와 한창 공사 중인 예전 경의선 철길을 건너 10분 남짓 걸으면 용문시장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를 끼고 오른편에 있는 블록이 바로 용문 시장.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6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니 재래시장 치고는 꽤 오랜 곳이다.
시장 초입부터 사람들이 잔뜩 줄을 서 있는 ‘싱싱 나라’라는 생경한 간판이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김밥집이다. 값도 싸고 맛도 괜찮아서 꽤 인기가 있는 곳이란다. 120여 곳의 상가들이 아직도 영업 중인데 이렇게 지역 맛집들이 하나둘 숨어 있다. 시장 한가운데에는 상인회 사무실이 있으니 궁금한 게 있으면 들러서 물어볼 것. 마침 이날은 용문시장에 처음으로 개최하는 어린이 그림 그리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통 시장의 맥을 이어가기 위한 작은 노력들.
효창원로 42길이 이 시장의 메인 로드(?). 그리고 그 옆의 샛길처럼 붙어 있는 효창원로 40길은 미로처럼 얼기설기하지만, 또 한 켠 물러나 있어 더 시골 장터 같은 편안함이 있다. 싸전, 생선 가게, 반찬가게 등이 오밀조밀하다. 그냥 떡 하니 앉아 국밥 한 그릇 내어 먹고 싶은 식당들까지. 비닐봉지에 매어 햇살을 바라보게 만든 작은 화분 하나까지….. 일상의 틈새를 그 나름의 손길로 자아내는 시장 상인들의 재치가 눈에 띄었다.
효창원로 40길을 하나 더 지나 보면 건너편에 새로 들어선 브라운스톤 아파트가 있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용문시장의 뒷자락을 엿볼 수 있다. 낡은 것과 새것이 대비되어 마치 서울의 현재와 과거를 길 한 폭에 담은 느낌.
다음이나 네이버 지도를 검색해 보면 용문시장이라고 적혀 있는 구역이 있다. 예전에는 용문 시장의 중심이었으나 지금은 너무 오래되고 낡아 붕괴의 위험으로 2008년부터 ‘재난위험시설’로 지정된 곳. 그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이제 그 생명을 다한 공간들이 지니는 퇴락함, 그러나 또 그 시간의 손때가 묻어 있는 알 수 없는 아늑함이 공존하는 곳. 그래서 왠지 모르게 도심 한가운데에서 비밀의 화원을 발견한 거 같은 기분.
원래 있던 상가들의 간판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 지난 모습을 여전히 떠올리게 한다. 효창원로 40길로 이어지는 구역에서는 포장마차처럼 생긴 식당들이 여전히 영업 중이니 시장의 속살을 엿보고 싶다면 들러보자.
구 시장 건너편에 보이는 브라운스톤의 언저리 언덕에 남이장군(南怡將軍) 사당(용문동 106번지)이 있다. 남이(南怡, 1441~1468)장군이 이곳 용산에서 군사를 모아 훈련했고, 아울러 한강 변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었기에 이곳에 사당을 세웠다. 그래서 매년 10월마다 남이 장군사당제가 열린다고 한다. 정작 취재를 갈 때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해서 들리지 못한 것이 꽤 아쉬웠는데 가시는 분들께서는 한 번 들러보시길….
용문시장에서 세창로를 끼고 건너면 그곳에도 꽤 아기자기한 골목길이 자리 잡고 있다. 큰 길가의 용문갈비집은 40년이 넘은 맛집이기도 하다. 별생각 없이 들어선 골목 한 귀퉁이에서도 왠지 50년은 거뜬히 넘었을 거 같은 가옥들을 만나게 된다. 전자상가로 향하는 원효로 2가 사거리에는 1970년에 입주가 시작된 원효 아파트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장 보고 돌아서기엔 조금 아쉬워 조금 더 걸었다. 원효로 41길을 따라 원효대교 북단 방면으로 쭈욱 걷다가 원효로 19길로 접어드는 길. 바로 성심여중과 성심여고가 있는 방향이다. 걷기에 조금 무리다 싶으면 용산시장 사거리에서 0017번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정도를 가는 것도 방법이다.
굳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학교 안에 있는 원효로 성당과 용산신학교 때문이다. 원래 이 일대는 용산강을 굽어보던 정자가 있던 터인데 성직자들이 많이 순교한 새남터와 당고개를 잘 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신학교가 1892년에 세워졌다. 성당 건물은 그 보다 10년 후인 1902년에 세워졌고 지금도 성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약현성당(1892년), 명동성당(1898년)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고딕 성당이다. 성당 건물은 3층 건물이지만 경사지에 지어져 있어 뒤에서 보면 1층으로 보인다.
용산신학교 건물은 지금은 성심기념관 및 성심수녀원 건물로 이용되고 있다. 반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되어 있으면 조지언(Georgian) 양식의 벽돌조 건물로 된 국내 최초의 신학교 건물이다. 성당과 신학교 모두 둘 다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성당 뒤쪽으로는 기도 동산이 아름드리 나무들을 따라 이어져 있다.
학교를 나서 다시 원효로 19길을 따라 걷다 보면 또 다시 골목 풍경들이 이어진다. 아기자기한 카페에 앉아 한 모금 축이고 돌아서는 발길이 심심하지 않을 풍경들이다.
지난 10여년, 재개발 열풍의 한 가운데 있어서일까. 용산이라는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때론 생경하다. 일제 시대 때부터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이니 얕은 지식으로 보아도 적산가옥이라 해도 좋을 오래된 가옥들이 군데군데 엿보이는데 또 도화동 같은 곳은 동 전체가 아파트들로 가득하다. 게다가 철도들이 가로지르는 동네들은 일상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와 또 여전히 시간의 흐름에서 비켜간 공간들을 연출한다. 그러니 60여년의 오랜 시장이 신축 아파트 곁에 자리잡고 있고, 100여년이 된 사적들이 아파트에 둘러싸여 있다. 현재와 과거의 무질서한 공존 사이, 그 시간들이 ‘무슨 무슨 터’라는 이름의 비석으로만 남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INFO
- 찾아가는 길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역 4번 출구
글·사진 박정선
골목길에 대한 집착(?)이 있는 남자. 패션지와 웹진에 몸담으며 공연, 음악, 연애, 섹스, 여행, 커리어 등등의 글을 써대며 8년간 밥벌이를 해왔다. 부산 촌놈이 아무리 살아도 어딘가 정이 안가는, 낯선 서울이라는 녀석의 속내를 궁금해하다 <아지트 인 서울>이라는 책을 내고 말았다. 다음 스토리볼 <결혼해도 똑같니?> ,<기춘씨에게도 봄이 올랑가봉가?>등의 컬럼을 연재하기도 했고, 스타트업 기업에서 마케팅을 하다 지금은 커머스 업계에서 콘텐츠를 고민하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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