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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추억, 근대의 흔적

홍파동 송월길, 송월1길

by 서울문화재단

교남동,교북동,송월동,평동,행촌동,홍파동


5호선 서대문 전철역에서 3호선 독립문역 사이, 경희궁의 왼쪽자리에는 저렇게 6개의 동이 얼기설기 자리 잡고 있다. 동은 6개이지만 동사무소는 교남동 동사무소 한 곳뿐이다. 예전에는 개천이 있고, 돌다리가 있고, 파발이 있고, 우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개천은 복개되고 큰 도로가 깔려 있으니 그저 이름들에서 추측할 뿐이다. 사직터널과 성산로로 이어진 넓은 자동차길이 생기기 전에는 고개를 넘어 다녔다 하고, 무악재 너머의 사람들이 돌다리 주변에 직접 가꾼 농산물을 펼쳐놓는 난전이 열리기도 하였단다. 일제 시대에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 독립지사들의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위해 모여 살았다는 얘기도 있는 곳. 행촌동 일대는 1960년대 말~1980년대까지 폐휴지를 수합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이 모여 살던 ‘개미마을’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서대문을 경계로 도성을 드나들던 이들, 인왕산자락 아래로 서민들의 삶이 고즈넉이 배어있던 동네였던 게다. 이 지역에는 경교장, 홍난파 가옥, 딜쿠샤(DILKUSHA) 등 서울 시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근대의 건물들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역사의 기억들, 경교장


서대문역을 나서 강북삼성병원으로 들어섰다. 지인들의 병문안을 하러 몇 번 와본 적은 있지만, 병원 입구의 경교장은 으레 지나치기 마련이었다. 경교장은 1945년에 백범 김구 선생이 중국에서 돌아와 숙소와 집무실로 사용하면서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모여 국무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던 곳으로, 1949년 서거하기 전까지 그가 머물며 반탁 운동과 남북 협상을 진행하였던 곳이다. 애초에는 일제시대 금광업으로 돈을 벌었던 거부 최창학이 1938년에 지은 양옥 저택이다. 김구 선생이 머무는 동안에도 집주인이었던 친일파였던 최창학이 끊임없이 눈치를 주고 번거롭게 하였다 하니 해방은 왔어도 해방이 오지 않았던 시대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 곳은 김구 선생의 서거 이후 중화민국(대만)의 대사관으로, 한국전 때는 미국 특수부대 및 의료진의 주둔지로, 또 월남대사관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1967년 현 강북삼성병원의 전신인 고려병원에 인수되어 40년 넘게 병원시설로 사용되면서 본래의 내부가 많이 훼손되었으나 2010년 들어 본격적인 복원이 이루어지면서 건축 당시의 설계 도면과 임시정부 당시의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고 한다. 지하 1층에서는 경교장의 역사를 담은 전시실이 있고, 1층에는 귀빈 식당, 임시정부 선전부의 집무실이 복원되어 있으며, 2층 공간에는 일본식 다다미 방으로 구성된 김구 선생의 머물던 공간이 복원되어 있다.


이 작은 건물 하나에 거쳐간 그 모든 면면들이 우리네 근현대사를 오롯이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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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기억들, 홍난파 가옥, 딜쿠샤(DILKUSHA)


경교장을 나왔다. 맞은편 골목들 사이로 식당과 카페들이 북적북적하다. 그저 심상히 지나쳐도 될 이 골목들이 새삼 눈에 들어왔던 이유는 강북삼성병원 북쪽으로 독립문역 사거리에 이르던 지역들이 죄다 ‘돈의문 뉴타운’으로 지정되어 공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언젠간 지금 남아 있는 저 식당 골목들이 이 지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골목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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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교육청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새롭게 복원된 서울 성곽과 월암근린공원이 있다. 그저 방치되어 있는 것보다야 나을 테지만, ‘복원’이라기 보다는 ‘신축’에 가까운 성곽들이 그 공간들 속에 익숙히 접어들려면 또 꽤 오랜 세월이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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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지나 조금 내려가다 보면 넝쿨이 무성하게 벽면을 덮은 붉은 벽돌담집이 보인다. 바로 작곡가 홍난파(1898~1941)가 6년간 지내면서 말년을 보낸 곳이다. 1930년대에 독일 선교사의 주택으로 지어진 곳인데 당시 근처 송월동에 독일 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에 독일인 주거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당시 건물들은 다 헐리고 이 집만 남아 있다. 마당에 홍난파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월암근린공원과 이어져 있다. 주말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는데, 그걸 모르고 가는 바람에 밖만 훑어보고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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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가옥에서 조금 더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거대한 은행나무가 보인다. 권율 장군의 집터가 있던 곳이다. 바로 맞은 편에 있는 낡은 서양식 벽돌 건물이 바로 딜쿠샤(DILKUSHA)다. UPI 통신사의 서울 특파원으로 온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가 1923년에 지은 건물이다. 당시에는 외국인이 당산목인 은행나무 옆에 저택을 짓는다고 인근 주민들이 격하게 반발을 했었다고 한다. 사실 앨버트 테일러는 외신을 통해 1919년 일제의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과, 3.1독립 선언문을 세상에 알리는 등 조선 독립을 위해 많이 노력한 이였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조선 사람들 참 야속하다’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문화재인지 알고 찾아갔었는데,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나중에 살펴보니 1942년에 일제의 외국인 추방령으로 테일러가 쫓겨났고, 일제 패망 후 미 군정청으로 소유권이 넘어갔으나 그 후 소유권이 애매해졌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저소득 무주택 서민들이 쪽방촌처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기척 소리에 방문을 열고 나오신한 할머니가 말을 건넨다. “볼 것도 없는데 이 더운 날 뭐한다고 여까지 왔능교.” 딱히 지청구는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일상을 침범한 거 같아 못내 마음이 무겁다. 집이란 본디 누군가 살면서 닦아주고 부대끼지 않으면 더 일찍 삭는 법이니, 어쩌면 수십여 년 동안 그 곳에서 살아온 이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나마도 남아있지 못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딜쿠샤(DILKUSHA)는 현재 한국자산관리공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나 여전히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문화재 등록이 가능한 상황이지만, 입주자들의 이주 대책이 아직 서지 않아서 그대로 있는 상태라고. 부디 잘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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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사라지는 기억들이 있다.


어쩌다 한 번 와서 보고 가는 이들에겐 ‘구경’ 혹은 ‘탐사’의 대상이기에 그 모습 그대로 남았으면 하지만, 정작 그곳에 터전을 닦고 살아가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조금 더 나아지고 개선이 되길 바라는 공간들이 있다. 어쩌면 딜쿠샤(DILKUSHA)도 그렇고 지금은 이미 다 파헤쳐진 돈의문 뉴타운 지역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방치’와 ‘복원’, ‘주거환경개선’과 ‘역사지역보전’이라는 딜레마는 그래서 언제나 혼재한다. 돌아 나오는 골목 한 귀퉁이에서 낡은 평상을 마주했다. 그 평상 위엔 식탁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바뀌어도, 또 함께하고 싶은 마음들은 그렇게 다시 생겨나나 보다. 언젠간 또 잊혀질 풍경들일까 싶어, 다시 한 번 셔터를 눌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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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남동 송월길은 현재 행정상으로는 종로구 송월길(거리명 주소)로 명칭이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INFO

1. 경교장
화요일~일요일 오전9시~ 오후 6시 (매주 월요일 휴관)

2. 홍난파 가옥 :
4월~10월 오전 11시~오후 5시
11월~3월 오전 11시~오후 4시 (주말 및 공휴일 휴관)

3. 찾아가는 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로 나와 강북삼성병원 골목

4. 교남동의 지도를 다운로드 받고 싶다면
이 곳 또한 ‘종로 골목길 관광’ 중 하나다, 제7코스 교남동. 지도 다운로드 http://bit.ly/1oQzepQ




글·사진 박정선

골목길에 대한 집착(?)이 있는 남자. 패션지와 웹진에 몸담으며 공연, 음악, 연애, 섹스, 여행, 커리어 등등의 글을 써대며 8년간 밥벌이를 해왔다. 부산 촌놈이 아무리 살아도 어딘가 정이 안가는, 낯선 서울이라는 녀석의 속내를 궁금해하다 <아지트 인 서울>이라는 책을 내고 말았다. 다음 스토리볼 <결혼해도 똑같니?> ,<기춘씨에게도 봄이 올랑가봉가?>등의 컬럼을 연재하기도 했고, 스타트업 기업에서 마케팅을 하다 지금은 커머스 업계에서 콘텐츠를 고민하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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