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교보빌딩 이야기
세종문화회관과 더불어 세종로 사거리의 대표적 랜드마크로 꼽히는 광화문 교보빌딩은 조금 부끄러운 탄생기를 지닌 건축물이다. 장소의 역사적 의미를 배제하고 건축주의 취향에 의해 설계·건립된 빌딩은 일제강점기와 전쟁, 압축성장기를 거치며 성찰 없이 욕망을 고집하던 한 시대의 초상과도 같다. 지금 서울은 그때 간과한 도시의 정체성을 잘 찾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도시의 수많은 건축물, 그에 얽힌 사연을 살펴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 많다. 사실 지나고 나니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이겠지만 당시에는 꽤 심각한 고민거리거나 더러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도 적지 않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건축물은 상식적으로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지역 고유의 양식과 재료에 따라 판박이하듯 특정 지역에서 비슷한 건물들이 양산되는 경우는 있으나 그 역시 각 건축물이 입지하는 땅의 조건에 따라 출입구의 위치라든지, 창의 크기와 방향, 전체적인 분위기와 비례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기후와 풍토에 따라 지붕 형태와 외벽 재료 등이 같아지는 경우는 물론 있더라도 본질적으로 같은 건축물은 지구상에 존재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런데 전통 건축물도 아니고 풍토와 관습에 따라 재료와 형태를 취해야 할 어떤 근거도 없을 도심지의 큰 빌딩이 바다 건너, 심지어 다른 나라의 건축물과 거의 똑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게다가 두 건축물을 설계한 사람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 건축가라면.
쓰임새를 생각할 필요 없는 회화나 조각 등의 순수 예술이 아닌 건축의 경우, 건축가가 똑같은 건축물을 조건이 다른 상황에 자가 복제하는 경우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장식장에 올려놓는 작은 예술품이 아니라, 부지 조건과 주어진 용도 등이 엄연히 다른 건축설계에서 이런 방식으로 카피가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이런 현상을 바라봐야 하는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사례가 우리 근처에 있다. 1981년 준공한 광화문 교보빌딩이다.
해마다 매체에서 선정하는 국내 최악의 건축물 투표에서 상위권에 자주 랭크되곤 하는 광화문 교보빌딩은 건축적 종속성, 문화적 사대주의 등의 난해한 수사로 심심치 않게 비판받곤 하는 사연 많은 건축물이다. 교보빌딩의 설계자는 스타 건축가인 미국인 시저 펠리(Cesar Pelli, 1926~)다. 그는 세계적인 랜드마크인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 타워를 설계한 사람으로 수십 년간 수많은 대형 건축물을 세계 곳곳에 설계한 전설적인 건축가다. 그는 교보빌딩을 설계하기 전에 일본 도쿄 미나토구에 위치한 주일미국대사관을 설계하고 완공했는데, 교보빌딩의 창업주가 일본 방문 중 우연히 그 건물 외관에 매료되어 그에게 설계를 맡겼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문제는 건축주가 도쿄 중심가에 있는 그 대사관 건물과 똑같은 모양으로 교보빌딩을 설계해 달라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시저 펠리가 광화문 교보빌딩의 대안으로 제시한 첫 설계안은 건축주의 요청과는 전혀 다른 건축물로 세종로라는 역사 공간의 의미를 반영하는 한국 전통 개념의 빌딩이었다고 한다. 정작 건축주는 관심조차 없던 땅의 역사적 의미를 미국인 건축가가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건축가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도쿄 미나토구와 서울 세종로는 완전히 다른 땅이고, 대사관과 기업 사옥 역시 쓰임새가 전혀 달랐을테니까.
시저 펠리는 부지가 입지한 사거리의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창경기념비각’의 존재를 감안, 이 지역의 역사적 환경을 고려해 비각을 중심으로 6개 건물로 분동되는 부채꼴 빌딩 계획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건축주는 도쿄에 있는 주일미국대사관 건물과 똑같이 해달라고 재차 요구했고, 건축가는 어쩔 수 없이 그 요구를 수용했다. 도쿄 미나토구에 위치한 교보빌딩의 원본(?)인 주일미국대사관 빌딩을 직접 가보면 수교국의 문화 양식을 건물 디자인에 반영한 미국의 문화적 배려를 느낄 수 있다. 우리에겐 왜색이라 불리는 일본적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색감과 세밀한 입면의 창호 비례에서 대사관 목적에 부합하는 외교적 수사로서의 건축 디자인이 읽히는 것이다. 그런데 교보빌딩은 그런 원본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외형만 베낀 ‘짝퉁’으로 서울 세종로에 세워졌다. 문화적 공공재의 책임감 이전에 사적 재산이므로 다분히 개인 취향에 따를 수 있는 게 건축이라고는 하지만 세종로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생각했다면 한 번쯤 신중한 고민이 필요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교보빌딩 입면의 특징은 불그스름한 큰 기둥이 건물 저층부 모서리 네지점에 위치하고 그것을 노출된 큰 보로 연결시킨 구법으로 일본 목조 건축물에서 흔히 보는 가구식(家具式) 구조를 연상케 한다. 또한 브라운 계열 외장 패널과 반사 유리를 적절히 혼합한 입면 구성 역시 전통적 패턴으로 단순 반복되는 일본 특유의 스타일을 느낄 수 있는데, 특히 건물 측면 벽 구성에선 다다미 바닥의 줄눈 조합이 차용되어 토속성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서구모더니즘 건축의 합리주의 개념과 일본 전통 요소를 혼합한 개념으로 설계된 빌딩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광화문 교보빌딩은 197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와 문화적 소양에 대해 그 단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장소에 거금을 들여 기업의 얼굴이라 할 만한 사옥을 지으면서 당연히 추구해야 할 정체성(Identity)을 배제하고 용도조차 맞지 않는 복제품을 간절하게 욕망한 시대가 우리에게 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과거 조선의 육조거리였던 세종로의 건물들은 일제 강점기와 전쟁, 압축성장기를 거치며 우리의 정체성과는 관계없는, 어울리지 않는 제각각의 모습으로 관제적이며 황량한 도시 풍경을 만들어왔다. 식민지와 전쟁을 연이어 겪으며 정상적인 근대화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의 그늘을 그대로 반영하듯 말이다. 600년 넘은 역사 도시 한복판에 맥락도 없는 다른 나라 대사관의 복제품이 오랜 세월 대표적 랜드마크로 우뚝 서 있는 상황이 지금 서울의 민낯인 것이다. 준공 35년차로 접어드는 광화문 교보빌딩은 어느새 우리 시대의 정체성 혼란과 모호한 역사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이 되고 말았다. 그것이 무심한 저 넓은 벽을 볼 때마다 마음이 먹먹해지는 이유일 것이다.
글 최준석 건축가. 건축사사무소 나우 대표. 저서 <서울건축만담> <어떤건축> 등.
사진 연합뉴스 헬로포토
* 이 글은 「문화+서울」 8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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