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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Sep 07. 2015

사랑인데 통역이 안 되나요

딸 바보가 되고 싶지만 그냥 감정 바보인 아빠들

TV 프로그램은 요즘 고민 해결에 바쁘다. 부모와 자녀, 친구와 연인이 각자의 속앓이를 꺼내기 쉽지 않은 때에, 대중매체는 그 심리전의 중계와 중재에 나섰다. 프로그램 안에서 사람들의 관계는 대체로 나아진 듯 보이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다. 관계란 거기 그 안에 있는 모든 이의 이야기여야 한다.



참 서툰 아빠들


관찰 예능 <아빠를 부탁해>(SBS TV)의 이경규는 딸과 단둘이 있을 때가 두렵다. 다정히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눈이 마주치는 것도 피할 정도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의 아빠는 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딸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른다. 사춘기의 딸이 뾰족하게 대응하자 네 방으로 꺼지라며 소리 지르는 것으로 진압을 완료했다고 생각한다. SBS TV 토크쇼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이하 <동상이몽>)에 출연한 어떤 딸은 아빠가 방에 들어오는 게 두렵다. 자기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뒤에서 껴안고 스킨십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딸 바보가 되고 싶지만, 그냥 감정 바보가 되어버린 아빠들이다.


요즘 30~40대의 젊은 아빠들 중에는 아들딸과 친구처럼 지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아이들 역시 형제자매가 없는 경우도 많아 잘 놀아주는 아빠가 소중하다. <아빠를 부탁해>에 나오는 50대 중년 남자들의 사정은 다르다. 이들은 1960년대 보릿고개 시절을 보내며 험난한 생존 과정을 거쳤다. 168개 계단을 오르며 국민학교를 다닌 이경규, 오랜 무명 연극 배우 시절을 보낸 조재현에게 젊은 날의 기억은 ‘고생’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걸 힘겹게 이겨내느라 항상 긴장해야 했고, 자식들을 살갑게 대할 시간도 부족했다. 뒤늦게 아이들과 감정을 나누려고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른다.


이들에게 아이들 세대는 외계인처럼 여겨질 정도다. 아들딸들은 물질적으로 훨씬 풍족한 상황에서 자라났고, 문화적으로도 다채로운 경험을 했다. 자기 주장과 감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하고, 아무리 아빠라도 무조건 전권을 휘두르는 귄위주의적인 방식에는 쉽게 반감을 가진다. 아빠는 덩치 큰 아들과는 부딪치는 것 자체가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딸만큼은 가까이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아빠를 부탁해>에 나오는 딸들은 무척 양호한 편이다. 자기가 애교가 없다고 자책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방문을 열어두기도 한다. 하지만 아버지들은 딸들의 감정과 접속하는 애플리케이션을 작동시키지 못한다.


<인사이드 아웃>은 이런 아빠의 마음속이 어떤 상태인지 재미있게 보여준다. 이 애니메이션에는 주인공들의 마음속에 있는 다섯 개의 심리 상태-기쁨, 슬픔, 까칠, 소심, 분노-가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해 자기 역할을 한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시큰둥해져 있는 딸을 대하는 아빠의 마음속은 어떤가? 한마디로 군사 조직, 오직 가장의 권위로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 사춘기를 맞은 딸이 아빠의 명령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면 어떻게 대응하는가? 아빠는 이를 자신의 권위에 대항하는 전쟁 상황으로 여긴다. 곧바로 ‘데프콘2’를 발령하고 화난 표정과 격앙된 어조로 벌을 주려 한다. 어떤 아빠들의 감정 회로는 이렇게 항상 준전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지금 뭔가 하지 않으면 아이들과 더 멀어져’라는 위기 의식에 대응하는 방식도 전투적이다.




‘서로의’ ‘모두의’ 마음이 나아져야 관계는 움직인다


유재석이 진행하는 <동상이몽>은 부모와 청소년 자녀들 사이의 갈등을 예능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엄마와 말도 나누지 않는 딸,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고집하는 아들, 성형중독이 의심되는 딸 등이 그들 부모와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최근에 아버지의 지나친 스킨십으로 고민하는 딸의 문제가 방영돼 시청자들이 크게 항의했다. ‘저것은 단순히 애정 표현의 방법이 서툰 것이 아니다. 외국에서는 성추행 성범죄에 해당하는 일이다’라는 주장도 있었다. 결국 제작진이 사과문을 내놓게 되었다. 도대체 그 아빠는 왜 그런 무리한 시도를 했을까? 지금 시기를 놓치면 영원히 관계가 멀어질 거라는 ‘공포’가 작용했던 것 같다. 정신과 전문의들에게도 이런 식의 상담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자식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강박이 또 다른 부작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스킨십도 스스럼없는 아빠와 딸’이라는 목표만 있지, 가장 중요한 딸의 감정 상태에 대한 고려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빠를 부탁해>는 템플스테이, 놀이동산 방문, 아빠 고향 찾기, 요가 교실 등의 방법들을 제안한다. 각자의 사정을 고려해 따라 해볼 만한 것들이다. 그러나 프로그램에서는 이런 방법들을 통해 갈등이 너무나 쉽게 해결된다. 어쩐지 20년 전의 청소년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너무 아빠 중심의 관계 개선이다. 어떤 경우에는 자식들이 훨씬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경우도 있다. 평생 마음에 상처만 주던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따뜻한 가족주의자가 된 것 자체에 적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럴 때는 기다려야 한다. 상대방을 독립적인 성인으로 인정하고 상대의 의사를 물어야 한다.



TV 프로그램으로 간 고민들, 해답을 만날 수 있을까


감정의 고민이 넘치는 시대다. 그리고 TV 프로그램이 그것을 받아 안고 있다. JTBC <김제동의 톡투유>는 관객들이 안고 있는 가족, 진학, 취업 등의 ‘걱정’을 공유한다. JTBC <마녀사냥>은 연애 문제로 고민하는 시청자 사연을 받아 ‘그린라이트’냐 아니냐를 논한다. tvN <고교 10대 천왕>에서는 청소년들이 나와 엄마・아빠에게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들을 토로한다. 전통적으로는 가족, 친지, 친구와 같은 공동체가 고민 해결의 장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지역 공동체도 무너져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가 부족해지고 있다. 또한 가족이 고민의 해결자가 아니라 오히려 고민의 중심이 되는 경우도 많다. 모두가 서로의 감정에 대해 차분히 되돌아볼 때인 것 같다. 그리고 스스로가 미숙하다고 여기면 배워야 한다. 아버지가 딸에게 배워야 할 경우도 적지 않다고 본다.



글 이명석

문화비평가 겸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여행의 즐거움과 인문학적 호기심을 결합한 <여행자의 로망백서> <지도는 지구보다 크다> <도시수집가> <모든 요일의 카페> 등의 저서가 있고, KBS 라디오 <신성원의 문화공감>, 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에 고정 출연 중이다.


* 이 글은 「문화+서울」 9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서울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문화+서울」은 서울에 숨어있는 문화 욕구와 정보가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예술가들의 창조적 힘과 시민들의 일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고자 합니다. 「문화+서울」에 실린 글과 사진은 서울문화재단의 허락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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