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명 배우의 해외 뮤지컬 도전기
한 무명 배우가 뮤지컬
<미스 사이공>으로
세계무대에 오른다.
박영주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비전공자
출신의 뮤지컬 배우다.
그런 그가 세계 최대의 뮤지컬
제작사 캐머런 매킨토시가
제작하는 <미스 사이공>의
‘투이’ 역 커버와 앙상블로
캐스팅돼 오는 7월부터
월드 투어를 시작한다.
비전공자라는 틀을 깨고
세계무대로 나아가는
한 무명 배우의 거침없는
해외 캐스팅 도전기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나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우연히 ‘바람의 딸’ 한비야의 강연을 듣고 ‘내 심장이 뛰게 하는 일을 찾자’라는 생각에 취업을 포기하고 뮤지컬 배우에 도전, 2009년 <모차르트>의 앙상블로 데뷔했다. 2015년 신혼여행을 빙자해 간 비엔나에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고 유학을 결심했다. 내가 입학한 비엔나 콘저바토리움(Vienna Konservatorium)은 뮤지컬학부가 있는 사립학교로, 입학을 위해서는 오디션이 필수다. 자유곡 2곡, 자유 안무, 자유 연기 등 3가지를 준비해야 했는데, 다행히 노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합격했다.
2016년 2월부터 비엔나에서 지내며 공부했지만, 나의 목표는 졸업보다 무대에 설 수 있는 일을 구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뮤지컬 오디션을 보려면 물론 독일어를 잘해야 한다. 특히 발음이 관건인데, 어려운 부분이 많았지만 독일어 원곡으로 좋아하는 뮤지컬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었다.
첫 도전은 오스트리아의 창작 뮤지컬 <슈카네더>와 <에비타>였지만 시대 배경과 인종적인 문제로 인해 정중하게 오디션 자체를 거절당했다. 뮤지컬에 동양인 배역이 드물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뮤지컬 시장은 보수적인 편이라 동양인 배우가 무대에 서는 것이 쉽지 않았다. <미스 사이공>이나 <왕과 나> 같은 아시아 배경의 뮤지컬이 아닌 이상 설 곳이 없다는 것을 몸소 느끼던 중, 독일 함부르크에서 <라이언 킹>과 <노트르담의 꼽추> 오디션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도전했다. 하지만 역시나 독일어가 미숙하다는 이유로 떨어지고 말았다.
유럽에서 배우로 활동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을 때쯤, 런던에서 <미스 사이공> 영국 투어 공연의 아시아 배우를 뽑는다는 기사를 보고 다시 한 번 오디션에 도전했다. 지난해 9월 런던에서 첫 오디션을 봤는데, 1차 오디션을 위해 자유곡 2곡을 준비해 갔다. 심사장 안에는 캐스팅 디렉터 2명, 피아노 반주자 1명이 있었고, 지원자들의 노래 1곡을 다 듣고 난 후 그 자리에서 합격과 불합격을 바로 통보하는 식이었다. 내 차례가 와서 준비해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겟세마네>를 부르는데 15초 정도가 지난 후 갑자기 노래를 중단시켰다. 심사위원은 “노래를 너무 잘해서 끊었다”면서 “‘투이’라는 배역으로 다시 부를 테니 2차 오디션 때 오라”고 했다. 2개월 뒤 2차 오디션에서는 지정 안무와 ‘투이’ 역의 지정곡 3곡을 준비해야 했다.
2차 오디션은 전문 남자 댄서들과 함께 지정 안무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춤에는 자신이 없었기에 30명이 넘는 외국인 댄서들 앞에서 점점 주눅이 들었다. 한데 갑자기 런던에서 이런 멋진 댄서들과 함께 오디션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맨 앞줄로 나가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3시간 동안 춤을 추었다. 안무 오디션이 끝나고 아시아 지원자들만 남아 2차 노래 오디션을 시작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심사장에 들어가 자기소개를 하고 준비한 곡을 불렀다. 집중해서 연기를 하자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갑자기 “탕!” 하는 소리를 내며 실제 무대에서처럼 나를 총으로 쏴 죽이는 시늉을 했다. 그 소리에 맞추어 죽는 연기까지 하며 후회 없는 오디션을 마치게 되었다.
오디션이 끝난 후, 결과가 금방 나올 거라는 이야기와 달리 지난 2월까지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 영국의 경우 그런 일처리가 우리나라와는 정말 다른 시스템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메일을 보내고서도 무작정 기다려야 했고, 전화를 해도 담당자가 자리에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이런 과정을 겪은 우리나라 뮤지컬 배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기에 더욱 답답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지난 3월 초, ‘투이’ 역의 커버로 최종 합격 소식을 들었다.
지난 5월 15일, 고대하던 <미스 사이공> 월드 투어의 연습이 시작됐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의 경우 우리나라와 달리 한 배역을 한 사람이 담당하는 원 캐스팅 시스템이라 그 역할의 커버가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주어진다. 나 역시 ‘투이’ 역으로 무대에 오르는 날을 기다리면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앙상블로서 최선을 다해 관객들에게 좋은 공연을 보여주고자 다짐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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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제공 박영주
뮤지컬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