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길에서 만나는 일상의 축제
서울 도심에 걷는 길이 새로 생겼다. 70년대 팽창하는 도시 인구와 교통 체증을 해결해주던 서울역 고가가 찻길의 임무를 마치고 사람 길로 돌아왔다. 낡은 시설에 생명을 불어넣는 서울시 도시재생 정책의 선물이다.
지난 6월 10일 공중 재생 공원 ‘서울로7017’에 다녀왔다. 장미 향 그윽한 주말 오후, 이 특별한 하늘길이 나들이 온 시민들로 북적거렸다. 장미 마당과 목련 마당, 윤슬 등 공원 곳곳에서 거리예술가들의 공연이 연달아 벌어졌다. 새로운 길 위에 예술을 더한 행사는 서울문화재단과 서울시 푸른도시국이 마련한 < 거리예술 시즌제 [봄] >이다. 2014년부터 봄과 가을에 서울 시내 공원과 도심 지역에서 열리는 거리예술 시즌제는 일상의 공간을 축제의 장으로 바꾸고 있다. 지난 4월과 5월 코엑스, 서울숲과 보라매공원의 거리예술 공연에 이어 6월 둘째 주와 셋째 주 목요일부터 일요일(6.8~11, 15~18)에는 서울로7017에서 관객을 맞이했다.
'서울로7017'의 여러 입구 중 서울역 광장에서 나선형 계단을 이용하면 서울로 전시관과 장미 마당, 만리동광장을 더욱 쉽게 만날 수 있다. 17m 상공에 오르자 예전 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쳤던 서울역 주변 풍경이 찬찬히 눈에 들어왔다. 만리동에서 회현동을 잇는 하늘길에는 과속에 익숙한 우리에게 몸과 마음의 균형을 되찾아줄 다양한 스톱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초록 자연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대형 화분 나무들과 한낮의 해를 가릴 그늘막 쉼터, 잘 정돈된 가든, 야외 공연장과 전시관 등이다.
서울역 쪽 고가가 끝나는 지점은 만리동 고개이다. 서부역 뒤편 계단을 내려와 만리동광장에 이르면 평범한 거리가 야외미술관으로 변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서울시 공공미술프로젝트로 설치한 강예린, 이재원, 이치훈 작가의 작품 윤슬(서울을 비추는 만리동)이다.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의 루버 천장에 반사된 봄날 오후 빛이 잔잔한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멀리서 바라보면 대형 광학 렌즈 같은 설치작품이지만, 지면 아래로 움푹하게 들어간 안쪽 공간에는 쉼터이자 무대가 숨어있다. 이날 독특한 공연장에서는 곧ㅅ댄스컴퍼니의 < 위로(We_low) > 거리 무용이 열리고 있었다.
루버 천장 사이로 보이는 무대 중앙에서 남자 무용수가 밧줄에 묶인 몸을 뒤로 젖히며 무언가 호소하는 듯 느리게 움직였다. 이어서 전자 기타의 음에 맞춰 무용수들이 햇살이 찰랑거리는 바닥 위를 달리거나, 엎드리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출연자들이 관객을 향해 서서히 다가와 섞이면서 공연이 끝나버렸다. 아뿔싸! '서울로7017'의 신기한 구경거리에 홀려 너무 늦게 도착했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거리예술가 팀 ‘곧ㅅ댄스컴퍼니'는 우리 가슴 속에 깊숙이 박혀있는 상처를 밧줄과 춤, 다양한 소리로 표현하고 관객과 공감하면서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작품의 의도가 무엇이든지 이 특별하고 아름다웠던 무대는 동네 산책길처럼 슬리퍼 차림의 청년과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은 아가씨, 자녀와 함께 외출한 가족들에게 깜짝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같은 날 오후 장미가 만발한 야외무대에서는 남녀 배우의 익살스러운 동작이 나들이객들의 흥미를 끌었다. 극장 밖 거리에서 다큐멘터리 창작 연극으로 관객을 만나온 우주마인드프로젝트 팀의 연극 < 잡온론(Job On Loan) >이었다. 작품 제목을 보자 슬며시 < 자본론 >이 떠올랐다. 이 작품은 비정규직 생활자의 비애와 꿈을 그리는 두 남녀의 이야기이다. 무대 앞에 앉아 눈을 반짝거리는 어린이들이 다소 어려워 보이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과 달리 상황극은 시종일관 유쾌했다.
일하는 아빠와 엄마가 겪는 아침은 늘 전쟁이다. 두 연기자는 출근 시간 지하철 타기 소동과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는 장면을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연기했다. 극 중에는 카를 마르크스, 엥겔스, 애덤 스미스와 같은 유명한 경제학자들도 등장했다. 하지만 이 거리예술가들은 애덤 스미스를 쌍둥이 형제로, 카를 마르크스는 아버지가 준 용돈을 물 쓰듯 쓰는 요리사로 둔갑시켰다. 연극은 성실한 대형마트 계산원 형 아담과 현실에 불만을 품고 소매치기가 된 동생 스미스가 음지와 양지에서 둘 다 ‘보이지 않는 손’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는 상상 스토리로 시장 경제 원리를 재미있게 보여주었다. 봄날 햇살 아래 현 사회의 메시지를 무겁지 않게 각색한 공연이 주는 재미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올해로 4년째를 맞는 < 거리예술 시즌제 >는 봄과 가을로 나누어 약 4달 동안 시민에게 대중적이면서도 예술적인 거리예술을 소개한다. 이번 봄 시즌에는 4월 21부터 6월 18일까지 총 8주 동안 코엑스, 서울숲, 보라매공원, 서울로7017에서 총 78회의 공연이 열렸다. 여기에는 서울문화재단의 사전 공모를 통해 선발된 13개 단체가 참여했다. 이들은 거리극 <만리동미싱유>, 무용 <연결 링크>, 서커스 <나, 봉앤줄>, 전통연희 <복을 파는 유랑악단 악단 광칠>, 광대마임극 <블랙크라운>, 로봇인형극 <고물수레>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본 사업을 맡은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는 지난 2015년부터 광진구 광장동에 위치한 (구) 구의취수장을 베이스캠프로 삼고 서울 곳곳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거리 예술 및 서커스 장르를 지원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은 앞으로도 다양한 도심 공간에서 무료 공연을 통해 시민의 일상 속 예술 체험 기회와 더불어 거리예술가들에게 연중 지속 가능한 작품 발표 무대를 제공할 예정이다. 오는 9월 가을 시즌에도 다양한 거리예술 공연이 찾아온다. 프로그램에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서울문화재단(www.sfac.or.kr) 또는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www.ssacc.or.kr)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의 02-3437-0054)
호주 원주민 참사람 부족은 길을 갈 때 영혼이 따라올 수 있도록 멈추어 섰다가 가기를 반복한다고 한다. 말로 모건의 자전적 체험 에세이 <무탄트 메시지>에 나오는 일화다. 새로 다가온 사람 길과 그 위에서 펼쳐질 예술이 그동안 빨리빨리 생활에 지친 우리에게 마음과 같은 속도로 걷는 시간을 돌려주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