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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맺는 기쁨 Aug 21. 2021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냐 하면

나는 혐오스럽던 나를 마주하고 이해하고 위로하는 강한 사람입니다.

"선생님 남자 친구가 바람을 펴서 두 분이 파혼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나는 지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은 그녀에게 연극적인 표정을 지은채 이 말을 건넸다. 그 순간 나는 내가 결국 신의 실패작으로 판명 났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말을 덧붙였던 것 같다. "그런 사람이라면 차라리 결혼 안 하길 천만다행이에요, 선생님은 이 일을 통해 더 단단해지실 거예요"


이런 미친 씨부랄년 그 입 닥쳐. 제발


그날 한옥을 개조한 작은 카페에서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녀는 레지던트 3년 차로 부유한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한껏 받고 자라 그들에 제공한 최대한 모든 자원을 통해서 자신의 가능성을 극대화시켜온 것으로 보였다. 내게 그녀의 삶은 흠없이 완벽해 보였다.


그녀는 나와 많은 면에서 달랐는데 특히 쥐어짜 내어 가까스로 명랑한 척하는 나와는 달리, 자신감에 찬 태도와 솔직하고 발랄한 모습은 누구에게나 사랑받을만했다. 결혼을 약속한 그녀의 남자 친구가 파혼을 전했을 때, 나는 남몰래 생각했다. “그래,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려면 삶에서 저 정도의 고난은 있어야 해, 그것이 그녀를 더 성숙하게 만들 거야”.


사실 나는 그녀가 무척 좋으면서도 지긋지긋하게 부러웠다. 아마 나는 동화 속 주인공과 같은 그녀가 한 번쯤은 무너지기를 바랐으리라. 그래야 누더기 같은 내 삶이 위로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사람 사는 것 비슷하다는 말로 수치심으로 오염된 내 마음 씻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녀와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칼로 이 추악한 나를 도려내고 싶었다. 진짜로 전할 것은 위로였는데 그러질 못했다. 나는 그녀의 상황을 이용해서 동경하는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자 세심하게 머릿속으로 계산했으나 감추고 싶던 나의 본모습만 마주할 따름이었다.


나는 이런 내가 너무 혐오스러웠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서 위로를 찾는 어그러짐.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나를 외면하는 매정함. 어떻게든 살아내고야 마는 억척스러움. 남은 물론 나까지 속이며 능력 있고 사려 깊으며 신실한 사람인척 하는 기만. 아픈 이에게 위로하는 척하면서 건네는 오만 속의 우월. 내 속의 모든 것이 진창 같았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이 없어도 아름다운 사람인 줄 알았다. 겉모습은 별 볼일 없어도, 옷은 촌스럽게 입어도 안에 든 것은 빛나는 사람이라 믿었다. 하지만 방심한 순간, 거짓으로 포장한 나의 영혼이 구멍 난 풍선처럼 퉤 퉤 퉤 침방울 섞인 더러운 소리를 내며 쪼그라들었다. 가까운 이의 절망에 기뻐하면서!


나는 있는 힘을 다 끌어내여 겨우 사랑하게 되었다 믿던 내가 너무 밉고 진저리가 났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코를 쥐어 막았다. 내게는 축축하고 더운 여름날 주방 한편에서 썩어가는 음식물 쓰레기 같은 냄새가 났다.


나는 무식하고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아빠는 외도를 일삼았고, 엄마를 때렸다. 엄마가 드디어 아빠와 이혼했을 때 엄마는 공사판이든, 거친 바다 든 가리지 않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나를 교육시켰다. 그런 엄마에게 세심한 정서적 돌봄까지 요구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러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했으므로 들꽃처럼 가능한 모든 곳에 뿌리를 내렸다. 심지어 그것이 타인의 불행에서 찾는 위로, 나를 외면하는 매정함, 생에 대한 억척스러움, 신실한 척하는 기만, 오만함 속 우월감일지언정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곳에 뿌리내려야 했다.


그랬구나, 너는 살기 위해 그랬던 거야. 양육자의 안전한 에서 너의 필요를 채워갔다면 너는 관음적이게 타인의 불행에서 너의 행복을 찾을 필요가 없었고 그 상황을 이용해서 너를 만족시키려 하지 않았을 거야. 너무나 슬프지만 너에겐 가진 것이 너무 적어서 오랜 세월 생에서 얻지 못했던 삶에 대한 상실감을 그런 식으로 위로했던 거야.


네가 미워하는 그 억척스러움이 너를 여기까지 인도했어. 아니, 너를 갉아먹는 그런 얄궂은 단어는 이제 그만하자! 그래, 생명력! 이건 바로 생명력이야. 밟아도 뽑아도 꺾어도 독약을 뿌려도 결국 피어나고 마는 들꽃 같은 생명력.


이제 여기를 봐봐. 너는 다정한 남편의 아내가 되었고 사랑스러운 아이 둘의 엄마가 되었어. 아이들에겐 칼을 휘두르는 아빠와, 바닷물에 절은 엄마 대신, 직장에 다녀오자마자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아주는 아빠와 원한다면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어주는 엄마가 있어.


네가 사는 곳을 둘러봐, 네가 어릴 때 쓰던 셋집의 공용 화장실과는 달리 이 집엔 너의 가족만 사용하는 화장실이 두 개 있어. 너는 아픈 사람을 돌보는 귀한 직업을 가졌고, 4년의 육아휴직 후 돌아갈 직장도 있어. 이 모든 것은 네가 노력해서 얻은 것들이야. 너의 강인한 그 생명력이 너를 여기까지 인도했어.


그래, 혐오스러운 나 때문에 나는 살아남았어. 억척스러운 나 덕분에 나는 사회의 제도권 안에 속해 있어. 더 이상, 빛바랜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고, 편의점에 들려서 무언가를 사기에 부족한 동전을 만지작 거리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계속 쓰겠어. 내 안의 혐오스러운 내가 만족할 때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세상에 풀어헤쳐놓을 거야.


나는 나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것을 입힐 거야. 가난했던 나를 위로한답시고 잡다하고 시답지 않은 물건으로 나를 채우지 않겠어. 사려 깊고 최선의 것을 나에게 줄 거야. 나는 더 이상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볼모 삼아 돈의 노예가 되는 삶을 살지 않을 거야. 다만, 내 삶을 아끼기에 그리고 나와 내가 선택한 삶의 구성원인 가족에게 성실하기 위해 가진 자원을 최대한 이용해서 물질적 삶을 요구를 채우겠어.


간호사로서의 삶을 살기에 내가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적다면 인정하고 충분히 부끄러워하겠어. 하지만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나는 지금껏 그래 왔듯 가장 좋은 길을 찾을 거야. 내가 살아남을 길. 내가 나를 더 사랑할 길.


혐오스러운 내가 나를 여기까지 인도했구나. 안전하고 따뜻한 나의 가정, 든든한 나의 직장, 친절한 나의 친구들 곁으로.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 줄 알았는데, 평생 혼자 외로이 피어나는 줄 알았는데, 하늘이 구름이 별들이 나비와 벌들이, 바람이, 숱하게 쏟아졌던 빗방울이 나와 함께였어! 뱅글뱅글 돌아가는 지구뿐만 아니라 그 넘어 우주까지 너를 돕고 있었던 거야.


나는 온실 속에 있지 않기에, 노을의 빛을 그대로 흠뻑 받았고, 나에게 매달리는 무당벌레의 발걸음을 느꼈고, 옆을 지나는 다람쥐의 발걸음을 들었어.

그렇게 나는 온실 속 화초가 누리지 못하는 자연을 날 것 그대로 누렸던 거지.


나는 더 이상 살기 위해 혐오스러울 필요가 없어. 이제 나를 위해, 나를 아끼는 이들을 위해 선하고 향기로운 곳에 뿌리를 내리자. 부드럽고 기름진 땅, 배부르고 안전한 곳.


나는 계속 쓰겠어. 언젠가 마주했던 거친 폭풍과 역겨운 제초제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쓸 거야, 현재 나를 감싸는 달콤한 바람의 향기와 개미들이 기어오르는 몸의 감각에 대해서도 쓸 거야, 그리고 하얀 씨가 되어 날아갈 먼 훗날의 나에 대해서도 쓸 거야. 내 글은 씨앗처럼 심겨 꽃도 피고 열매도 맺을 거야. 나는 그 모든 과정을 기쁨과 감사로 맞이할 거야


나는 나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한다. 그리고 나를 뜨겁게 힘주어 안는다. 복받쳐 오르는 울음은 삼키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다시 뿌리내린다.


나는 언젠가 나의 지난시절처럼 좁고 메마른 땅에 뿌리박고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가 있다면, 바위 틈새 작은 곳에 핀 꽃 한 송이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나의 진짜 위로를 전하고 싶다.


옛날 옛날에 바위 틈새 작은 곳에 꽃 한 송이가 겨우 뿌리내리고 꽃 한 송이가 살고 있었데, 뿌리는 흙으로 다 감추지 못하고 얼 기성 기한 모습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낮에는 햇볕에 타들어가듯 목이 마르고 밤에는 추워서 오들오들 떨었어.


그러던 어느 날 삶이 괴로워 훌쩍훌쩍 울고 있는 이 꽃송이를 보고 날아가던 파아란 새가 그러더래, '뾰로롱, 가엾은 꽃아 바람 길을 따라 열 번만 날갯짓하면 기름지고 넓은 땅이 있단다. 뽀로로 롱.' 꽃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 이 바위 틈새가 세상의 전부였던 줄 알고 행여 미끄러질까, 행여 날아갈까 꼭 붙들고 있었는데, 새로운 세상이 있다니!


꽃은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겠다 싶어서 온 힘을 다해서 뿌리를 내리던 곳에서 발을 떼었어. 혹여 그곳으로 떠나는 여정이 고난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이곳에서 벗어나고 말겠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거든.


꽃 한 송이가 뿌리를 완전히 바닥에서 때는 순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바람이  입김을 후하고 불어 꽃을 공중에 띄어 올렸어, 그때 파아란 새가 쏜살같이 날아와 꽃송이를 살짝 물고 하늘 높이 날아 올라 너른 들판에 내려주었지.


꽃은 온 힘을 다해 대지 속을 파고들었어. 꽃이 힘을 주느라 파르르 몸을 떨 때 나비와 벌이 꽃송이의 솜털 하나하나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햇볕이 꽃송이의 노란 얼굴을 간지럽히고, 물줄기가 뿌리 있는 곳까지 마중을 나와 꽃송이를 꼭 안아주더래.


뿌리를 완전히 내린 꽃송이는 지쳐서 따뜻하고 포근한 땅속에서 단잠을 잤어. 얼마간 후에 잠에서 깬 꽃은 변한 자신을 느꼈어. 꽃송이의 노오란 꽃잎은 어디 가고 별님 닮은 하얗고 아름다운 머리 성성하였던 거야. 꽃송이가 잉태한 수많은 생명들이었지. 온 세상을 수놓은 수많은 희망들.


꽃이 환희에 차서 주위를 둘러보니 아름다운 꽃들이 곁에서 흔들거리며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 "옛날 옛날에 바위 틈새 작은 곳에 꽃 한 송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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