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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맺는 기쁨 Jul 31. 2021

이 세상 모든 순옥 할매에게 바치는 엄지공주 이야기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명작 - 엄지공주

순옥 할매가 엄지 아이를 만났을 때는 바닷가 마을 수산 공장마다 굴 껍데기가 수북이 쌓이는 추운 겨울이었다. 날카로운 칼은 굴 껍데기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억지로 문을 연 뒤 부드러운 속살만 발라냈다. 일 년 내내 향긋한 굴을 키워왔건만 껍데기는 사정없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날 할매는 한밤중에 아랫배가 뒤틀리는 통증에 잠에서 깼다. 할매는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신음 소리를 삼키고 고개만 겨우 들어 머리맡에 둔 약을 삼켰다. 지랄 허네. 지난해 세상을 뜬 남편이 눈을 질끈 감은 채 배를 감싸 안고 엎드린 자신을 보았다면 그렇게 말했으리라. 무난하고 어진 사람이었으나 자신에게만은 그렇지 않았다. 할매는 남편의 폭언과 폭력을 묵묵히 감내했다. 이것이 전장에서 짓밟힌 여성의 최선이라 믿었다. 사실, 그녀의 인생은 피어나기도 전에 비틀어져 있었다.    

 

이미 늙어버려 새삼스러운 이야기나 그녀의 자궁은 불능이었다. 딱 한 번 생명을 담은 적 있었으나, 쉬이 지나갔다. 버마에서의 일이었다.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소녀였던 할매는 아이를 잃은 날 피로 물든 하반신과 생살이 찢기는 고통에도 그저 엄마가 그리워 숨죽여 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음에 오래 담지 않았다.           

전쟁은 끝났으나 차마 고향에서 터 잡을 수가 없어 타향에서 식모살이하다가 아이 셋 딸린 홀아비와 연을 맺었다. 그녀는 빨리 늙고 싶었다. 누구도 탐내지 않을, 곧 썩을 듯 위태로운 몸뚱이를 원했다. 그녀의 바람대로 세월은 그리했다.          


할매는 한겨울인데도 보일러를 때지 않고 전기장판을 놓아 겨우 눕는 자리만 데웠다. 등을 구부리고 어깨를 배 쪽으로 당겨 누워 있던 할매는 통증이 좀 가시자 눈을 들어 창문을 보았다. 창밖으로 하얀 꽃나무를 보았다. 버마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하얀 참파꽃. 달빛을 받은 하얀 꽃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아름답고 순결한 빛.     


참말로 별꼴을 다 보겠네. 저게 뭐꼬. 참 이상타 이상해. 이 겨울에 버마 꽃이 와 여기 피었노.          

할매는 버마에서 이 참파꽃을 보고는 고향 집 뒤뜰에 피던 목련꽃을 떠올렸다. 할매는 천천히 일어나 창문을 열고 자세히 꽃을 보았다. 꽃들은 바람의 손길에 아양을 떨 듯 살랑살랑 몸을 흔들었다.        

  

할매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인가 생각했다. 죽을 때가 다 되어 헛것을 보는 것일까. 독한 약 기운 때문에 환각을 보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한 광경이었다. 하얀 꽃 안에는 엄지만큼 작은 여자아이가 두 손을 포개 머리를 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자신의 자궁에서 살던 것처럼 아주 작은 아이였다. 잔인한 시간 속에 태어나 품에 품어보지도 못하고 구둣발에 짓이겨진 꽃처럼 보낸 후 잊었다고 믿었던 아이.   

  

할매에게 한때 그것은 수치와 절망의 증거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것이 꼭 자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쌍하고 가여운 것. 비집고 들어온 칼에 산산조각 난 것. 기필코 지우고야 마는 역사의 오점.  

   

할매는 이번엔 울음을 삼킬 수가 없었다. 입을 틀어막았지만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짐승의 울부짖음 같기도 한 것이 새어 나왔다. 오랜 세월 몸속 깊은 곳에서 썩어가던 울음이었다.        

  

할매와 엄지 아이는 그렇게 여름이 오기까지 함께 살게 되었다. 할매는 지독한 암세포들이 자궁에서부터 시작해 온몸을 잠식하여 폐 속에 남은 마지막 숨을 내뱉을 때까지 샘솟는 천륜의 정을 엄지 아이에게 와르르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해 가장 뜨거운 날 엄지 아이는 혼자가 되었다.   

  

할매의 유언은 이것이었다.     

아가. 미안타 내가 미안타 아이고 불쌍한 것. 엄마. 엄마.     

그 언젠가 버마에서처럼 이 말은 할매의 입술에서만 맴돌았다.    

 

할매는 생전에 자주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는 다시 태어나면 새가 될끼라. 높다란 나무 위에 둥지 짓고 짝짝 입 벌리는 새끼들 입에 맛난 거 듬뿍 넣어주는 어미 새. 그 좁은 둥지서 복닥복닥 사는 기제."     


혼자가 된 후 엄지 아이는 자주 툇마루에 나가 하늘을 보았다. 새가 된 할매가 날아다닐 것만 같아서.          

어느 날 엄지 아이가 여느 때처럼 자신의 팔을 베고 하늘을 보던 있을 때 뒤룩뒤룩 살이 찐 두꺼비가 무거운 몸을 뒤뚱거리며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엄지 아가씨 여서 혼자 어찌 살라고 그라요. 요즘 시상엔 아는 기 많아야 합니더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허고 밤에는 간호원이 되는 공부를 시켜주는 곳이 있으니, 저를 따라오이소.”          

엄지 아이는 혼자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니나, 간호원이 된다면 좋을 것 같았다. 생전에 할매가 육신의 고통에 갇혀 정신마저 잃을 때가 떠올랐던 것이다. 엄지 아이는 할매의 고통을 덜어드리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그래요? 간호원이 되면 참 좋겠네요오. 그라면 잘 부탁드립니데이"     

두꺼비는 엄지 아이를 아주 먼 곳으로 데리고 갔으나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벌게 해 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신 엄지 아이를 헐값에 짙은 초록색 군복을 입은 풍뎅이때들에게 팔았다. 전쟁의 소모품으로. 그곳엔 그녀 말고도 수많은 엄지 아이들이 있었다.


끔찍한 시간이었다. 반짝이는 초록빛 풍뎅이들은 댕기 머리한 엄지 아이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엄지 아이를 유린하였다. 그녀의 몸을, 정신을, 영혼 전부를.     


엄지 아이는 죽고만 싶었다. 생으로서의 존엄성이 짓밟히니 자신이 한낱 고깃덩이 같았다. 군인을 받는 연잎 위에 누워 있던 엄지 아이는 연못을 유유히 헤엄치는 잉어를 보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엄지 아이는 또 다른 엄지 아이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할 수 있읍니더. 혼자는 못하지먼, 다 같이 한마음 한뜻이 된다면, 힘을 모은다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더" 그날 엄지 아이들은 자신들을 취하러 온 풍뎅이들을 은빛 잉어들에게 던졌다. 휙~첨벙! 연못에서는 세상이 깨지는 것 같은 마찰음 소리가 들렸다. 엄지 아이들 덕분에 실컷 풍뎅이들을 먹고 배가 불러 기분이 좋아진 잉어들은 연잎을 끊어 엄지 아이들의 탈출을 도왔다. 

    

엄지 아이들은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다 가까이 땅이 보이자 풍덩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필사적으로 헤엄쳐 땅에 닿은 그들은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엄지 아이들은 젖은 몸으로 한참을 걸어 들쥐 아주머니와 두더지 아저씨가 사는 마을에 도착했다. 인심 좋은 들쥐는 엄지 아이들에게 따뜻한 미역국을 끓여주었다. 정 많은 두더지는 아이들이 지낼 집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엄지 아이들은 그 마을에서 살게 되었다.     


두 계절이 흐르고 가을이 되자 부지런히 마을을 가꾼 엄지 아이들 덕분에 마을엔 먹을 것이 풍성해졌다. 두 해가 지나자 학교와 병원, 도서관이 생겨났다. 엄지 아이는 바라던 대로 병원에서 아픈 이들을 돌보며 시간을 보냈다. 다섯 해가 지나자 엄지 아이들을 만나겠다며 동물들과 곤충들이 마을을 방문했다. 엄지 아이들은 그들을 맞이하고 전쟁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치며 역사를 증언하였다.     


방문객은 엄지 아이들이 당한 고통에 가슴 아파하며 함께 눈물 흘렸다. 사건을 활자로 기록했고 곳곳에 엄지 아이 동상을 세워 후손들에게 알렸다. 전쟁을 일으킨 풍뎅이들은 진심 어린 사과를 하였고 감언이설로 엄지 아이들을 속인 두꺼비를 비롯한 모든 전범자들을 처벌했다. 그들은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적, 문화적 장치를 고안해냈으며 엄지 아이들에게 충분히 보상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엄지 아이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딛고 일어나 자신을 진심으로 껴안고 위로할 수 있었다. 함께한 모두의 힘이었다. 외면하지 않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모두의 용기였다.     


여느 때처럼 바람 불어오는 맑은 날, 엄지 아이는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손으로 머리를 괴고 하늘을 바라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곳에서 수많은 엄지 아이들과 함께 노래하며 춤을 춘다. 그들이 부르는 자유와 치유의 노래가 꽃잎 하나하나를 어루만진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이 연 꼬리처럼 흔들린다. 발을 딛고 섰던 바닥에 바닷물 차오르면서 흔들리는 물의 표면이 몸에 달라붙어 피부를 간질인다. 온천지를 덮은 물속에서 엄지 아이는 시원하게 팔과 다리를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발밑 바위엔 잘생긴 굴이 그득하다. 향긋한 굴의 향이 바닷속을 뒤덮는다. 갑자기 어깨 밑에 날개가 돋더니 몸이 뱅그르르 돌다가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그때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잽싸게 벌레를 물어 새끼들이 짹짹거리는 둥지로 날아간다. 엄지 아이는 그 모습으로 오래도록 바라본다. 엄지 아이는 새를 향해 큰소리친다. "할매, 괘안타, 나는 괘안타, 아이고 보고픈 우리 할매. 내는 잘 살고 있응께. 내는 행복항께. 내 걱정 마소. 우리 할매도 행복하제?.... 엄마, 우리 엄마"     





그때 그 소녀들에게 감히 어떤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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