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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맺는 기쁨 Aug 29. 2021

어떤 깨달음은 이렇게 오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오소희 작가님과 함께한 글쓰기 모임 리뷰

나는 오랫동안 나를 잡아 삼킬 듯 달려드는 수치심에 시달려왔다. 내가 느끼던 수치심 중 가장 아픈 것은 내가 '가난하고 불화한 집안의 별 볼일 없는 딸'이라는 것이었다.

가난해도 화목할 수 있는데, 가정이 불화해도 예쁘거나 특별한 재주를 가진 비상한 사람일 수 있는데, 사람은 별 볼일 없어도 집안은 그럭저럭 먹고살만할 수 있는데 그러질 않았다.


가난, 가정 불화, 별 볼일 없는 여자아이.


카지노 슬롯머신의 잭팟이 터지듯  내 삶의 이 불행 세 가지가 딱 맞아떨어져 머신이 토해 낸 동전처럼 내 속에 수치심이 그득하게 찼다.

끈적끈적하고 시커먼 수치심에서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 중 하나는 상상의 세계로 도망가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신을 의지하는 것이었다.

상상의 세계의 뒷맛은 씁쓸했다. 눈을 감아 잠시 혜안의 세계로 떠날 수는 있었지만, 결국 내가 살아가는 곳은 엄마의 아름다움과 생기를 내어주고 얻은 누추한 월세방이었다. 상상 속에서 진귀한 보물과 다정한 왕자님으로부터 끌어내려지듯 현실로 돌아온 나는 마음 둘 곳 없어 외롭고 슬펐다.

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계셨지만 내 속에서 자꾸만 솟아나는 의심의 그림자는 은총을 입은 자의 자리에서 믿음 없는 죄인의 자리로 나를 자꾸 끌어내렸다. 스스로 정죄하는 마음이 나를 옥죄어 신이 주는 자유는 누리지 못한 채 맹목적인 헌신만 그에게 드렸다.

내 속의 뭔가가 잘못된 것 같은데 꼭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내가 이상하고 불쾌한 사람이라는 생각만 반복해서 들 뿐이었다.

나는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서적들을 통해, 신앙의 행위를 통해 나에 대해 연구했다. 나를 잘 알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 과정을 통해서 나는 꽤 많은 답을 찾았고 실제로 무너지지 않고 한 발씩 한 발씩 발걸음을 옮기며 생을 살아갈 수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고, 과거의 아픔과 슬픔은 이미 치유되었다 믿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때때로 내가 혐오스러웠다. 예전의 것이 바다 깊은 곳까지 훑어내는 거센 파도였다면 이후의 것은 서서히 차오르는 썰물 같았다.


그래서 나는 혐오스러운 나를 내면화했다. 치유받아야 하는 내가 아니라 이 혐오스러운 내가 진짜 나라고 믿기 시작했다.

이 혐오 덩어리가 진짜 나이니 안고 살아야 했으나 언뜻언뜻 비치는 진실의 하얀빛이

내 일부에 닿으면, 거기에 드러난 내가 참 귀하고 사랑스러워서 혹시 혐오스러운 가짜에 가려진 진짜 내가 있는 거 아닐까 생각하며 잠시 희망을 쥐었다 다시 바닥에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 작은 빛에서 본 나를 지울 수가 없어서  거기서 본 나를 포기할 수가 없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생존하게 되었는지를 글로 남기면서 위로를 찾았다.


쓰다 보니 더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서 오소희 작가님의 '나를 찾는 글쓰기 모임'에 등록했다. 나는 이미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저 글 쓰는 법을 지도할 선생님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그러니까 이 글쓰기 모임을 통해서 내가 오랫동안 헤매던 미로에서 빠져나올 길을 발견하였다. 바로 혐오스러운 나에게서 나를 구원할 길.


나는 이 글쓰기 모임을 통해 그동안 내가 혐오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있는 힘껏 달리던 것이 사실 달려도 달려도 제자리인 쳇바퀴 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햄스터처럼 그 위에서 달리는 게 행복해서가 아니라,  그 길 끝에 플라스틱 박스 같이 좁은 나에서 달아날 수 있을까 봐 달리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 모든 과정에 담긴 허무에 몸서리치게 괴로웠던것이다.

아! 가엾은 나여!

내가 정말로 혐오스러운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것으로 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 혐오스러운 나를 마주하고, 그것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하고 그 아픔과 서러움을 위로해야 했다.


나는 그것을 깨달은 후 나에 대해 글을 쓰면서 나를 위해 울었다. 혐오스러운 나에게 귀 기울였다. 그리고 혐오스러운 내가 만족할 때까지 오랫동안 그것을 위로할 것이라 다짐했다.


울어줄게 너를 위해. 내 온 힘을 다해.

나는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문우들을 통해서 완벽해 보이던 타인의 삶에 있는 다양한 색채와 결을 가진 아픔과 슬픔의 실체를 엿보게 되었다. 인생이라면, 누구나 그런 것이 있겠지 하고 짐작은 했으나, 내 것이 가장 아프다며 지레짐작으로 과소평가하던 것들이었다.

나는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함부로 타인은 상처를 내 것과 비교하며 저울질하던 나를 보았다. 그리고 오만했던 나의 지난날을 회개했다.

가벼운 삶, 무거운 삶이 따로 없는데 그동안 내가 참 무지했구나. 각자의 인생 속의 희로애락은 저마다 깊은데 누구의 것이 더 큰가 저울질하던 내가 참 잔인했구나.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 오랜 시간 간호사로서 마음 아픈 이들을 돌보아 왔음에도 만인의 고통과 신음을 깨닫지 못하고, 내가 가장 아프다고, 나만큼 아픈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지르며 살아왔구나!


나는 왜 치유의 현장에 있으면서도 그것과 멀찍이 떨어져 관망하는 태도로 서 있었던 걸까? 나는 어째서 수많은 슬픔들을 앞에 그토록 냉담했던 것일까?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다.


이제야 내가 만난 마음 아픈 이들의 삶이 내 삶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온다.

내가 내 속에 사는 '혐오스러운 나'를 안고 눈물을 흘릴 때, 옆에서 뒤에서 앞에서 외치는 소희 작가님과 문우들의 격려와 위로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그 소리에 힘을 얻고 더 힘주어 안고 더 오랫동안 소리 내어 울었다.


환한 빛과 함께 진실된 내가 드러났다.

참 귀하고 사랑스러운 내가!

귀한 깨달음을 준 소희 작가님과 문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함께 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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