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 낀 청귤청. 세병 중에 두병은 버리고, 먹을 수 있을까 하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것.
1. 의견
어머나! 귤 색깔이 왜 이래?
택배가 도착하자마자 새콤달콤한 귤을 먹을 생각에서 현관에서 택배 박스를 열었다. 박스 안에 든 것은 말캉말캉하고 달콤 새콤한 감귤이 아니라 그 해 뜨거웠던 여름에 달궈진 초록색의 단단한 풋귤(청귤)이었다. 내가 귤을 살 때 딴생각을 했거나, 너무 서두른 나머지 광고를 자세히 보지 않아서 물건을 잘 못 산 것이었다.
나는 자주 옷을 뒤집어 입거나 거꾸로 입거나 속옷에 치맛자락이 낀 줄도 모르고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사람이니 광고 속의 청귤을 감귤로 착각한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혹시나 청귤도 감귤처럼 달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나 까서 먹어보았으나 청귤은 껍질이 얇고 과육에 딱 달라붙어서 잘 까지지도 않을뿐더러 내 미각의 역사상 기록적이게 시큼하기만 했다, 청귤은 생물이라서 반품하기도 마땅치 않았고, 사실 하나 까서 먹었으니 양심에 찔려서 물릴 수도 없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청귤로 할 수 있는 건, 청귤청 밖에 없었다. 당시 둘째가 태어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고, 남편이 오기 전까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독박 육아할 때였으나 나는 대책 없이 일을 벌이곤 했으므로, 까짓것 청귤청을 만들지 싶었다.
껍질채 먹는 것이니 베이킹 소다, 소금, 식초를 사용하는 각 단계별로 차근차근 뽀득뽀득 깨끗하게 귤을 씻었고 꼭지가 있으면 물기가 잘 닦이지 않아서 청 만들기에 실패할 수 있다고 하여 이쑤시개와 디저트용 포크로 꼭지를 땄다.
여러 차례 헹군 다음 베란다에 이틀을 두고 말렸는데도 물기가 남아 있어서 귤을 마른행주로 다시 한번 깨끗이 닦았다. 이제 막 36개월쯤 된 첫째 딸이 함께 청귤청을 만들고 싶어 해서 고사리 손을 잡고 칼로 귤을 자르고 설탕에 잘 버무려 청귤청을 만들었다.
직접 자른 청귤을 설탕에 버무리는 36개월 첫째
마지막으로 미생물 번식을 막기 위해서 끓는 물에 유리병을 소독하고 설탕에 버무린 청귤을 담았다.
청귤청을 유리병에 담고 나니 참 뿌듯했다. 역시 나란 인간은 우는 둘째 아이를 얼르고, 첫째 아이의 방해(도움이라고 해야 하나?)를 이겨내며 한 박스나 되는 귤 꼭지를 일일이 따고 세척의 세 단계를 건너뛰지 않고 깨끗이 씻은 후 하나하나 물기를 닦아서 청을 만들 만큼 독하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내게 가슴 뻐근한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었다. 우리 집에서 청귤청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또는 먹을 시간이 없다는 것.
부부의 무관심과 바쁜 일상 속에 유배당하듯 냉장고 구석으로 쫓겨난 청귤청들은 실수를 승화해 멋진 먹거리를 장만했다는 나의 만족감 앞에서 한동안 잊혔다가 그 해 겨울, 남편의 감기 기운 덕에 드디어 냉장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런! 아이와 함께 정성스럽게 만들었던 청귤청은 불길한 푸른색과 음울한 검은색의 곰팡이로 덮여 있었다. 내가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미련 없이 그것을 비웠을 테지만, 나는 끝내 그것을 끼고 살면서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해결 못한 생리적 욕구 앞에 절절매듯 마음이 조급해했다.
아이를 낳고 아직 채 여물지도 않은 몸을 일으켜 무거운 귤 박스를 화장실로 옮기고, 씻고, 말리고, 닦고, 뜨거운 물에서 유리병을 꺼내려다 몇 번 놓칠뻔한 아찔한 시간을 견뎌서,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갓난 쟁이랑 '싫어요 혼자 할래요 병'에 걸린 36개월 아이를 데리고 완성한 청귤청인데 내 손으로 그것을 어떻게 버린단 말인가.
나의 노동, 나의 시간,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번듯한 정신 승리까지 모두 쏟아 만든 청귤청이었다.
나는 청귤청을 만들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생긴 나의 실수가 도리어 멋진 도전으로 탈바꿈하였다는 생각으로 나를 위로하고 싶었고, 실수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나를 설득하고 싶었다
"가끔은 이런 실수가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문이 되기도 하잖아? 꽤 멋진 경험 있었지?라고 말이다.
뻔뻔한 속임수!
나는 내게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 "얘, 물건을 잘 못 사서 당황했구나. 다음에는 광고를 좀 더 꼼꼼히 보자"
나는 곰팡이로 덮인 청귤청을 끼고 살면부주의라는 나의 결함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쏟아 부운 노동과 시간과 정신까지 헛수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그런데 말이다. 이것이 정말로 헛수고인 걸까? 결국 내가 청귤청을 먹을 수 없다면 나의 노동과 시간과 정신은 결국 헛수고가 되는 것일까?
사실, 이런 일을 겪은 게 내가 아닌 나의 아이라면 나는 '그것은 헛수고가 아니야'라고 단언했을 것이다. 나는 좀 더 객관적인 자세를 가지고 이 사건을 좀 더 따뜻하고 너그럽게 이 일을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물건을 잘 못 사는 실수를 했지만 긍정적이고 능동적이게 그 상황을 대처하여 아이와 함께 청귤청을 만드는 경험을 했다. 그때의 나는 야심 찼고 활기가 넘쳤다. 원치 않던 상황에 주저앉지 않았고 최선으로 그 시간을 살아내는 경험을 했다. 결국 처음 내가 내게 속삭였던 것은 기만 같은 진실이었다. 물론 실수를 인정한 후 몇 마디 더 덧붙여 친절하게 설명한다면 좋았겠지만 말이다.
바로 이렇게.
"얘, 물건을 잘 못 사서 당황했구나. 다음에는 광고를 좀 더 꼼꼼히 보자! 이런 실수가 네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문이 되기도 하지. 지금처럼 말이야! 꽤 멋진 경험 있었어! 그리고 너 청귤청 만드느라 정말 정말 수고했어. 인생이 항상 그렇듯 결과물이 좋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실패해도 괜찮아 너의 모든 순간이 의미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야."라고.
그림을 그리다 자신에게 실망한 아이에게 " 세모가 마음처럼 잘 안 그려져서 속상하구나, 그래도 끝까지 혼자 하려고 노력했네~대단하다"며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가르친다면, 나에게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말보다 삶으로 살아내는 가르침이 더욱 빛나니까.
그래, "노력했네~대단하다, 실패해도 괜찮아"라며 내게 건네는 이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나를 곰팡이를 키우며 썩어가는 청귤청, 아니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새파랗고 시커멓게 썩어가는 나로부터 구원하겠구나.
2. 물건과 관련된 나의 감정
속상한, 상심한, 울적한, 의기소침한, 짜증 나는, 어쩔 줄 모르는, 심란한
3. 물건과 관련된 나의 욕구
노력한 결과는 모두 좋은 결과로 보상을 받고 싶은 욕구
실수하거나 실패하고 싶지 않은 욕구
청귤청아, 뜨거운 태양과 빗방울, 농부님의 사랑 품고 우리 집까지 와주어 고마워! 그리고 미안. 이제 자연으로 돌아가서 너른 지구 어머니의 품에 안기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