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와의 면담: 일곱 번째

10년 묵은 간호학 전공책; 지식의 소유가 주는 거짓 위안

by 열매 맺는 기쁨

나는 아난다 박미옥 선생님 비롯 동반 수련자들과 함께 하루 3개의 물건을 비우고 3개의 기쁨을 찾는 공간 살림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 내 삶의 군더더기를 비우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 집안의 쓰레기들과 면담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오늘은 그 일곱 번째 시간이다.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한 성인 간호학 교과서

가격: 새것은 3만 원~6만 원대, 중고는 5천 원~1만 5천 원 사이에 거래

스펙: 하드커버, 쪽수 800여 쪽


개인면담 개물 면담: 쓰레기의 변명


봄이면 진홍색 철쭉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떨어지는 캠퍼스를 거닐던 네가 떠오르는구나. 그래, 그 시절 너는 참 불안하고 고왔지.

인쇄소에서 갓 나와 하얗고 뻣뻣하던 나도 이제 나도 색이 바래고 쭈글 해졌구나.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은 사람만이 아닌 것이지. 너를 따라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숙사로, 자취방으로, 신혼집으로 옮겨 다니며 세상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한동안 먼지 쌓인 채 한 곳에 머무르다 보니, 이제는 그만 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나는 이제 미련 없다. 네 대학시절 함께 할 때, 젊은 간호학도를 키워내겠다는 내 소명은 이미 완성된 게야. 세상은 변하고 늙은이가 가야 젊은이가 오겠지. 나를 이제는 보내다오. 때가 되었어.

책꽂이에 꽂혀 있는 오래된 전공책들

1. 의견


나는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을 전공처럼 하느라 학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동아리는 꽤 강도 높은 헌신을 요구하는 신앙 훈련 공동체였는데 많은 회원이 도중에 이탈하여 끝까지 남은 소수의 인원이 많은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8시 모임, 점심시간에는 전도활동, 월요일 저녁에는 회의, 화요일 저녁에는 모임, 수요일 저녁에는 지역 공동체 임원 모임(왕복 한 시간 반 거리), 금요일에는 자정 넘게까지 모임, 토요일에는 봉사활동, 일요일에는 교회. 그리고 중간중간 시간을 내서 후배들을 만나고 교제하고 성경 공부를 했다.


간호학과 특성상 아침부터 저녁 5시까지 빡빡하게 수업 일정이 잡혀 있음에도, 학기의 반은 실습해야 했기에 이론 진도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나는 겨우 기간에 맞춰 과제를 제출했고, 매일 4시간씩 자면서도 겨우 겨우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다. (나와 달리 이 와중에 훌륭한 성적을 유지하는 훌륭한 학생도 있었다.) 대학시절보다 교대근무를 하는 직장생활이 덜 힘들게 느껴질 정도로 신념에 따라 살고 싶어 치열하게 살던 시절이었다. 근무 후에는 원하는 만큼 잠도 자고, 책을 읽을 여유시간도 가질 수 있었으니까.


학창 시절 벼락치기 선수였던 그리고 학생 아닌 캠퍼스 선교사로 살던 나는, 영적인 만족감을 누렸을진 몰라도 뿌린 씨를 거두듯 겉만 번지르르한 직장인이 되어버렸다. 버리기를 잘 못하는 나는 대학시절 봤던 책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가져와 자취방 책장에 꽂아 놨었다. 업무에 자신이 없던 나는 집에 간호학 책이 있어야 불안하지 않았다.

펼쳐보는 일은 없어도 손 닿는 곳에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고 그렇게 졸업한 지 10년이 흘렀다. 내가 세월에 늙어 가는 것처럼 책장의 책들도 그러했는데 겉모습만 뿐 아니라 그 내용도 빛바래갔다. 그중에는 대학 졸업 이후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책도 있다.


나는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전공책을 비웠다. 하지만 미련이 드는 몇 가지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여전히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채. 소중한 내가 들어설 자리를 대신한 채.


의료지식과 환경은 급격하게 변해가는데 10년 전의 간호학 지식을 담은 이 책들을 비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추억이 깃든 책이라서? 전부는 아니라도 몇몇은 아직도 유효한 지식들이라서? 꽤 비싼 책들이라서?


아니,

내가 쾌쾌하고 묵은 냄새가 나는 낡은 지식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훌륭한 직업인이 되겠다는 소망에 대한 인색함, 직장 내에서 프로토콜대로만 하는 이류 간호사가 되겠다는, 내가 맡게 될 역할에 대한 소극성, 그리고 책을 소유하기만 하면 언제든 원할 때,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


직업인으로서 발전하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투자와 노력이 필요한데, 나는 간호사 업무에 적성이 안 맞다며 유능해지기를 포기했다.

병원에서 정해준 프로토콜대로 근무하는 소극적인 간호사로 나를 제한함으로써 나의 직업 가치를 평가 절하했다. 나는 근거를 중심으로 간호 진단을 내리는 능동적인 간호사가 되어 역동적이게 환자의 치료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렇게 버렸다.

간호학 전공책을 소유하면 언제든 훌륭한 간호사가 될 수 있다고 나를 속였다.


나는 만성적인 무기력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발전하려는 몇몇의 구체적인 노력을 하기는 했다. 실무 중심의 Nclex(미국 간호사 자격증 시험)를 쳐서 합격하기도 했고, 1년 간의 정신전문 보건 요원 2급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간호학 학문 지식 자체를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향상해서 임상에 적용하겠다는 시도는 포기했다. 그야말로 직장인으로서의 생존에 급급하여 학문적 발전을 하겠다는, 고차원적인 삶에 대한 열망은 쉽게 져버렸던 것이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

발전하려는 나를 내가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 병원에서 환자의 치유에 참여하는 동안, 최신의 지식과 기술을 사용하는 유능한 간호사가 되는 것, 책을 소유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식과 경험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


나는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학교에서 품었던 이상대로, 내가 만나고 돌보는 환자들을 마음으로만 돌보는 반쪽짜리 말고, 질 좋은 간호도 함께 제공하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


2. 물건과 관련된 감정


불편함, 신경 쓰임, 민망함, 부끄러움, 무기력함


3. 물건과 관련된 욕구

구체적인 노력 없이 적당히 훌륭한 직업인이 되고 싶은 욕구

금전적인 투자 없이 적정한 간호 수준을 요구하고 싶은 욕구


4. 물건을 버리려는 구체적인 이유

10년 전 의료지식을 바탕으로 한 낡고 오래된 지식이어서 효용가치가 떨어진다.

때가 되어 가시는 길 아름답게 보내드리며

소명 따라 산 그 세월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결론: 너는 쓰레기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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