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존재는 순진한 아이의 부드러운 손 안에서 갈기갈기 찢긴 나비처럼, 무정한 운명의 손에 의해 잔인하게 해체되었다.
분열된 나의 한 조각이 경건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침묵하는 비굴한 삶을 살지 마십시오. 당신은 전부이십니다. 인생의 길을 세상에 묻지 말고, 당신의 욕망과 감정에 물으십시오, 당신의 자아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다른 쪽에서 탁하고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년아 신성한 밥 앞에서 이게 웬 주접이냐? 네가 뭘 처먹고 생명을 연장할지 내 알 바 아니나, 앞길 창창한 네 두 아이를 생각하거라, 먹고사는 것 앞에 자아실현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은 거추장스럽다' 했다.
침침한 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졸렬한 인생을 사는 게 니 때문이가? 가난한 부모 때문에, 개인의 가난으로부터 무심한 사회 때문 아이가?, 물려받은 교복이 최선이었던 네 처지에 내면의 문제 들여다볼 여유가 어디 있었겠노?' 했다.
바로 그때 앙칼진 목소리가 훅 치고 들어오며 말했다. '흥! 거짓된 인생이 어떻고, 진실된 인생이 어쩌고 하며 가식 떨지 마라. 우주의 신비 따위가 어디 있냐? 가고 나면 다 똑같이 허무한 인생이야. 따뜻한 집에서 자고 삼시 세끼 거르지 않고, 아이들 키워가며 하루하루 살면 그만인 거지! 거짓된 인생, 진실된 인생이 어디 따로 있냐?‘
나는 내 안 여기저기서 통곡하고 고함치고 성을 내고 비웃는 소리에, 흐느끼고 침전하는 울림에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쪽으로 달려갔다가 또 다른 쪽에서 들리는 소리 때문에 멈칫했다,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어쩔 줄 몰라 배터리 다 된 시계처럼 앞으로 나아가지도, 가만히 서 있지도 못한 채 버벅댔다. 나는 어느 목소리에 따라야 할지, 이렇게 파편화된 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끌어모아 이어 붙이고 화해시켜야 할지 몰라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한쪽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한쪽 손은 입에 갖다 대어 신경질적이게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모르겠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내가 누구였는지, 누구일지 모르겠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정말 모르겠다. 필멸할 존재, 무상한 존재인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무슨 삶을 살지가 이 우주에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나는 죽어 없어질 것이고, 내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도 모두 죽을 텐데 내가 운명에 순응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진실된 삶이 따로 존재한다고 치자, 내가 내면의 열정으로 알 수 없는 환상에 선동되어 가는 길이 추하고 역겨운 인생이라면? 그것이 내 운명이라면 그래도 가야 하는가?
그런 운명이라면 차라리 인생을 낭비하고, 열정도 환상도 없는 불임의 삶을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글을 쓰고 싶다고? 어설프게 비극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그 비극적인 삶이라는 것도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이가 쓰는 글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얄팍해진 감성으로 무뎌진 삶을 사는 사람이 쓰는 대체 글을 누가 읽을 것인가?
그런데 말이야,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면, 구본형 선생의 말처럼, 겨우 그날 닥치는 일에 겨우 관심을 갖고 살다가 평생 내가 좋아하는 일은 한 번도 못해보고 죽는 인생이 아니라, 언젠가 한 번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스스로 설계한 인생을 살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잠시만! 그런데 내가 욕망한다는 게, 진짜로 내가 욕망하는 건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나는 수시로 내 감정에 따라, 또는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에 감동되어 내 삶의 원칙을 간단히 수정하는데 지금 욕망하는 게 내 삶 전체가 욕망하는 것과 다르면 어떻게 하지?
그래, 지금 내가 욕망하는 게 진실되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나는 왜 망설이는 거지?
나는 오랫동안 내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살았다. 내게 주어진 삶의 조건인 가난과, 가정의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 꽤 부지런을 떨었던 덕분에, 드디어 지금 어린 시절 갖지 못한 것을 꽤 자유롭고 편하게 얻게 되었고, 따뜻하고 다정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내가 꿈꾸던 삶은 돈에 굴복되지 않는 우아한 삶이었고, 바람처럼 큰돈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문자 그대로 먹고살 만해졌다. 이제는 내 속의 가장 큰 결핍 두 개가 채워져, 내 삶에 만족하고 안도할 법도 한데, 풀리지 않는 의구심 하나가 자꾸 나를 흔들었다. '지금 살아온 것처럼 계속 살아가도 괜찮을 걸까?'
내 속의 둥둥 떠올라 흘러가지도, 썩어 사라지지도 않는 이 질문에 어떻게든 답을 하고 싶어 글을 썼다. 유치하고 미숙한 글이었지만, 글 쓰는 동안 스스로에게 위로가 되었고, 더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났다. 내 속에 있는 것들을 다 꺼내어 놓고, 내가 모르는 내 심연의 세계가 어떻게 나를 장악했는지 파헤치고 싶었다.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각오는 아니었으나 아름다운 환상 하나가 내 속에서 피어났다.
나는 동시에 두려웠다. 희미한 재능을 따라, 게놈이나 화학적 전기적 신호가 충동질이 선택한 글 쓰는 삶 때문에, 내가 겪은 가난을 아이에게 대물림하는 것 아닌가, 내가 그런 것처럼 아이들이 나 때문에 변방의 이름 없는 존재로, 살고 싶은 삶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 아닐까?
나는 나의 변명이 전혀 논리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은 반 정도의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장마철 하늘을 뒤덮는 검은 구름을 따르는 빗방울처럼 끈적한 불안과 두려움이 무조건 반응처럼 나의 뇌를 장악했다.
한 달 동안 나는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내가 습관적으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 내 인생의 책임을 시간에 맡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혹시나, 내가 살고 싶지 않던 삶을 살게 된다면 내 탓이 아니라 운명 탓으로 돌려서 나를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아이들을 앞세워 내 인생의 책임을 미루고 있다.
책은 내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살거니? 구체적으로 말해봐.
내가 침묵하자, 혁명가인 체 게바라를 소개하며 과묵한 나에게 말한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지! 그러나 가슴속에는 현재 이루어질 수 없는 꿈 하나를 별처럼 품자.”
그리고 정약용 선생의 편지를 인용하며 나를 격려했다.
“가장 평범한 사람도 한 분야를 파면 그 일에 대해서만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된다.”
젊은 베르테르의 외치는 소리를 내 가슴에 새겨준다.
" 당신 같은 사람들은" 하고 내가 소리쳤네 "어떤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바로 '그건 바보짓이다, 그건 현명한 일이다, 그건 좋다, 그건 나쁘다!'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그게 뭡니까? 당신들은 어떤 행위의 밑바닥을 모두 파헤쳐 보셨습니까?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냐 했는지 명확히 밝혀보셨던가요? 그랬더라면 그토록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는 않았겠지요."
자유인 조르바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준다.
" 나는 이제 자유로워". '내'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조르바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 당신을 묶어 놓은 줄이 다른 사람의 줄보다 좀 길뿐이야"라고 말한다. 그러자 '나'는 "이 끈을 언젠가는 끊을 거야"라고 말하고 조르바는 "어려울걸. 바보가 돼야 돼. 바보가 되지 않고는 자유로워질 수가 없어"라고 한다. 바보가 되기 위해서는 삶의 진창에서 뒹굴어야 할지 모른다. 어쩌면 모든 것을 잃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뒹굴고 잃어야 깨끗하게 비워져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게 책의 구절구절들이 혼돈 가운데 쪼그려 앉아 있던 내 손을 잡아끌어 나를 일으켰다. 나는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내속의 목소리들은 여전히 저마다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힘껏 소리쳤다. "아가리 닥쳐"
수많은 내가 침묵하자 태초 전의 암흑이 나를 둘렀다. 나는 외롭고 쓸쓸했으나 바닥을 더듬어가며 나의 파편들을 모아 퍼즐을 맞추듯 나를 맞추어 갔다.
나는 어렴풋이 드러나는 내 속의 것들이 완벽한 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음과 양 그리고 남성성과 여성성. 모든 대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어질 듯 이어진 조화로움 그 자체.
나는 이상과 현실의 대극 속 중용의 진실을 내 속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이제 이 낭만적인 혁명가와 반듯한 선비를 힘입어, 그리고 고전 속 오래된 지혜들을 붙잡고 불행을 찾아 떠나볼까 한다. 두려움과 불안에 압도될 때도 나는 희망에 온전히 나를 맡기고, 신발 끈 단단히 묶고 한 발씩 내디딜 것이다.
허무로 짙게 깔린 인생이라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희열에 나를 맡기며, 실존함으로 영원 속에 각인되고 싶다.
나는 내가 절망적일 때, 누군가의 상상력으로, 경험으로, 헌신으로, 즐거움으로, 고통으로 쓰인 활자화된 인생들로부터 구원받았던 것처럼 예술의 자취를 따라 걸으리라. 설혹 그 길이 나 외의 다른 이를 구원할 수 없을지언정, 나는 그 구원 속에 잠기리라. 그럼에도 나는 아내로 엄마로 딸로 이웃으로 살리라. 예술인과 생활인의 삶은 순환하며 아름다운 원 되리라.
고흐가 그랬다지,
"다른 사람의 눈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팍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없는 사람,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도 가지지 못할 사람, 한마디로 최하 중에 최하인 사람, 그래, 설령 그 말이 옳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다. 이것이 나의 야망이다."
나도 그의 말을 빌려 이렇게 고백하고 싶다.
"너희 말이 옳을지도 몰라, 나는 보잘것없는 최하 중의 최하인 사람일지도 몰라. 하지만 말이야, 누가 어떻게 말하든, 심지어 내가 나를 어떻게 여기든, 나는 보여주고 말겠어. 내 안에 뭐가 있는지. 이것이 나의 예언이다."
엄마 변화 경영 전문가 아난다 인요가 박미옥 선생님 비롯 진실된 나를 찾는 동료 언니들과 함께 느린 독서회를 통해 한 달 동안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을 읽었다. 이 글은 독서회의 마지막 과제인 파이널 에세이다.
참고로 느린 독서회는 한 달에 책 한 권을 읽는다.
독서회인데 겨우 한 달에 책 한 권 읽느냐고 하겠지만,
첫 주는 저자를 읽고, 둘째 주는 최소 1독 하여 글귀를 발췌하고, 셋째 주는 발췌한 글귀를 해석하고, 넷째 주에 에세이를 써야 해서 독서회의 이름만 느리지, 엄마들이 새벽을 살아가며 분주하고 치열하게 책을 읽고 또 읽으며,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