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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맺는 기쁨 Jan 01. 2022

나의 완전함, 나의 무결함.

느린 독서회 파이널 에세이:  숲에게 길을 묻다, 저자 김용규


그해 9월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휩쓸었다. 힝힝, 크와악 소리 내며 불던 비바람에 엄마와 동생 그리고 나까지 세 식구가 살던 셋집 슬래브 지붕 위로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고, 구멍 난 천장 위로 빗줄기 쏟아지는 뿌연 하늘과 휘날리는 나뭇가지와 나뭇잎들 보였다.

우리는 그때 옷장 속에 숨어서 간신히 변을 피했다. 그곳에서 대피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온몸을 때리는 바람 헤치며 엄마의 포터 트럭으로 향했다. 젖은 옷은 미친 듯이 펄럭였고, 나도 온몸을 후드득 치고 지나가는 나뭇잎이나 쓰레기들처럼 날아갈 듯이 휘청였으나, 내 입에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 나는 내가 거기에서 바람을 헤치고 걸어가는 것 아니라 저 멀리 하늘에서 이 장면을 구경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사는 생이 실은, 심약한 친구가 말하곤 하던 꿈자리 사나운 그 꿈의 한 복판 아닐까 싶었다. 나는 언뜻 종영된 드라마 세트장처럼 이 꿈이 부서지고 나면, 꿈 뒤에 숨겨져 있던 진짜 세계가 드러나 지금과는 다른 삶이 펼쳐지겠지 기대했던 것 같다.

우리가 어디로 피난을 갔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으나 (아마도 이모집이나 외삼촌 집이었으리라), 어쨌든 우리는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았고, 지붕을 수리한 그 월세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태풍 매미도 나를 그 꿈같은 현실에서 구원해 주진 못했고, 나는 체념하듯 박살 난 현실 속에서의 내가 객체가 아니라 주체임을 받아들였다.

우리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던 것은, 거기가 그 동네에서 가장 싼 월세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살던 집은 도산면 법송리에 있었는데, 통영 시내에서 버스로 편도 40여분 후에 도착하던 버스 종점이 있는 후미진 동네였다. 집 옆엔 논두렁이 뒤엔 버려진 듯한 야산이 있었고, 주인집 포함해서 네세대가 한 지붕에서 함께 살며 화장실 하나를 나눠 쓰던 곳이었다.

나는 그곳도, 그 시절도, 나도, 무엇보다 헤어날 수 없는 이 질긴 가난이 너무나 지긋지긋했다. 나는 자주 내가 타고난 이 옹졸한 자리가 성에 차지 않아 불평을 해댔다. 커다란 칼로 생선 대가리를 툭하고 내려치듯 현실을 깨끗하게 잘라내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내가 가능한 집에서 멀리 있는 학교에 진학하고, 직장을 잡았던 것이 바로 이런 이유였다.

삐뚤 삐뚤한 비탈길의 서늘한 응달 같은 곳에서 볼품없이 자란 나는, 고운 여인네가 분무기로 물 뿌려 깨끗한 헝겊으로 잎 닦아주는 귀한 난초처럼 자란 이들이 부러웠다. 그런 이들에게선 청초한 빛이 났다. 아! 섬세하게 조절된 온도와 습도 속에 우아하고 고고한 빛깔을 뽐내는 이여!

나는 또 양지바른 곳에서 따뜻한 햇볕 실컷 먹어가며 솟아오르는 잎 넓은 플라타너스 같은 이 되고 싶었다. 오! 꼿꼿한 자태와 초여름 같은 느긋함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여! 그 사람이 누구든 당신이 만든 그늘 아래에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콧노래 흥얼거리고 잎사귀 부딪치며 내는 바스락 소리에 귀 기울이리라!

나는 이렇게 간절히 내가 아닌 누가 되고 싶었다. 나는 어렸던지, 식견이 부족했던지,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 아무튼 사물과 현상 넘어를 보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셋집의 구멍 난 슬래브 지붕, 으스스 한 야산과 질퍽한 논두렁이 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다. 나는 내가 경험하는 이 현실이 미시적인 관점에서 또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어떠한지, 그것을 베고 파면 무엇이 나오는지, 일일이 해체하면 또는 조립하면 무엇이 되는지 몰랐다. 쉽게 말해서 나는 성말랐고, 인생에 관한 시적 감수성이 부족했다.

그런 내가 김용규 작가의 '숲에게 길을 묻다'라는 책을 통해 사물과 과거 너머의 현실 너머의 심지어 미래 너머의 나를 보았다. 그것은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일련의 나였다. 구체적으로 나는 이 책을 통해 나에게 '주어진 숙명 안에서 나의 운명을 살아내는 자기 완결의 힘', '다른 이 되려는 것 아니라, 스스로가 되려는 주체성과 죽음으로의 기여'라는 영감을 얻었다.

그는 말한다.

"생명을 보라! 벌과 나비를 만날 수 없다고, 그것이 두렵다고 스스로 먼저 시드는 꽃은 한 송이도 없다. 삶은 나라는 생명에게 깃든 위대한 자기 완결의 힘을 믿는 한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은 모두 자기로 살 힘을 가졌으므로!"

"우리는 희망 아닌 것들로 우리의 희망을 채웠는지도 모릅니다. 숲의 가르침을 전하며 나는 오직 희망인 것들로 그대의 삶이 가득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떠나면서 까지 가난한 영혼을 움켜쥐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할 것은 오히려 살고 있으되 살아 있음에 철저하지 못하고 죽음의 때에 이르러서도 그 죽음에 철저하지 못한 우리의 삶이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일은 신이 그대에게 부여한 삶고 죽음의 기회를 헛되게 하는 것이다."

김용규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주위를 둘러 나무와 풀을 본다. 깊은 산속에, 아파트 정원에, 쓸쓸한 시골길 옆 나란히 나무와 풀들 숙명처럼 그곳에 있다. 어떤 것은 돌무더기 사이에 가련히 등과 목 굽혀가며, 어떤 것은 사람들과 짐승들 발에 짓밟혀 가며 서 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생을 책임진다. 두려워서 먼저 지는 꽃 하나 없다. 왜 내 자리는 이리 험하냐며 불평하는 나무도 없다. 그저 자신으로 살아가다 자연의 이치대로 자신을 키워낸 흙으로 돌아가 또 다른 생명에 기여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종말이며, 그 자체로 알파와 오메가다.

나는 깨닫는다. 나로 살고 이루고 죽을 지혜 내게 있기에, 내게 다른 사람 될 힘은 없어도, 나 자신이 될 힘 있음을. 오랜 세월 인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완전함과 무결함이 저기 멀리 골고다 언덕이나 보리수나무 아래에 있는 것 아니라, 바로 여기 모든 생명 하나하나 안에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집요하게 남이 가진 것 무엇인가 살피며 나와 비교할 필요도, 세상이 말하는 행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나를 채찍질할 이유도, 나는 왜 남이 아니냐 따질 명분도 없음을.

그리고 죽음을 통해 자신 생애의 과오와 죄악을 제 몸뚱어리를 전체에 받침으로 속죄하고, 살아오며 입은 은혜를 만물에 나눔으로 그 인생이 완성됨을.

나는 이제 철저하게 나로 살고 싶다. 지금 나는 한때 나를 살게 했고 만족 주었으나 이제 옛것이 되어 버린 것은, 식물이 떡잎 버리듯 땅에 내려놓고 지금 내 영혼 춤추게 하는 것 위해 한 스텝 밟고 턴하겠다. 스스로 폐기한 구원에 아파하지 않고 나로 농익어가겠다. 다른 이 향하던 나를 돌려세워, 결국 나를 읽고 나를 쓰고 나를 살아내겠다. 이렇게 나는 오직 희망인 것들로 나를 채우겠다.

나는 드디어 사물과 현상 너머를 보겠다. 내 지경을 넓혀 미시적 세계와 거시적 세계를 아우르며 살겠다. 나의 언어는 매가 되었다가 호랑이가 되었다가 곰팡이가 되었다가 끝내 나무 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물 되어 온 세상 두를 것이다. 나는 천상의 존재가 우리 안에 어디쯤 자리하는지, 펄펄 끓는 지옥이 누구의 눈에 비치는지 알아차리고 말겠다. 나는 허공을 구르는 무당의 두 다리에서 펄럭이는 하얀 신복처럼 온 존재 흩날리며, 굿판의 꽹과리처럼 신명 나게 글을 울리겠다. 그리고 결국 만물에 내 온몸 드려 죄를 자복하고 누린 은혜 갚겠다.

나는 비로소 안다. 이름 모를 들꽃 하나 피우기 위해 태고에 온 우주 그 몸 흔들어댔고, 내일 지고 말 이 꽃 위해 그 옛날 마그마 솟구쳐 올랐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이때를 위해 하늘의 별과 달이 반짝반짝 빛났음을.

나도 오늘 피었다. 그리고 내일은 질 것이다. 오늘 있을 나 위해 그리고 내일 결국 지고 말 나 위해 온 세상, 여기에 있다.

나는 선포한다. 나는 나로서 '완전무결'하다. 하물며 당신이랴.


아난다 아카데미의 느린독서회로

나로 살고 이루고 죽고 싶은 이들이 모여

한 달 진하게 책을 읽 내려갔습니다



독서회의 마지막 모임 때 저자를 만나는 귀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원리보다 더 큰 생명의 원리에 귀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서 서로를 보았고, 그렇게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살 수도 있다니! 참 기쁘고 감사합니다.


 *올해 2022년 봄, 괴산 여우숲에서 산림복지진흥원의 지원으로 국민들에게 생태체험과 교육의 기회가 주어진다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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