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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맺는 기쁨 Jan 29. 2022

내가 문예창작학과에 편입한 경위

느린 독서회 파이널 에서이: 깊은 인생, 구본형


그것은 느닷없는 망상일 터였다. 소설을 쓴다는 생각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전까지 쓰는 삶에 연정을 품거나 내가 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인생은 창조성에 기반한 소설가의 그것보다 훨씬 실용성에 입각한 삶이었다. 나라는 존재는 현실의 삶을 꾸리기에 이미 벅찼으므로 그 너머의 것은 다른 이들의 손에 맡겼다. 나는 언어나 이야기의 소비자였지 생산자가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그런 내가 소설가 지망생을 자처하게 된 것은 머리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같이 가볍고 신선한 우연의 연속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 이 일의 연유를 따지자면 우연을 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벼락을 맞는다던가, 일곱 쌍둥이를 출산한다거나 하는 각 인생에서의 희귀하고 별난 경험이 아닌, 매일 먹고 마시고 싸는 일상에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나는 지난해 한 여성 온라인 공동체에서 진행하는 '빛나는 나를 찾기'프로그램에 참가 신청을 하고 오랜만에 마음이 설레었다.


그 당시 나는 오랜 육아휴직을 하고 있던 상태로, 실제 경력 단절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정서적으로는 사회의 흐름으로부터 도태된 '경단녀'였고, 어미의 삶은 아름다운 헌신이라는 관습적 사고에 설득당해 혼신을 다해 육아하다가도, 여성에게만 이 짐을 다 지울 작정이냐며 독기를 품곤 했다.


나는 찬양받는 어미의 삶이 버겁고 힘듦을 또 가끔은, 아니 사실 자주 그것에서 잃어버린 청춘과 멀어진 미래를 본다는 사실을 이해받을 필요가 있었다.


두 아이를 낳고 키우는 대부분의 날은 하루에 한 번 남편이 퇴근했을 때 겨우 씻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두 아이를 가정 보육하면서 도저히 나까지 돌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하나일 때는 언제 깰지 몰라 아이 옆에 누워 어둠 속에서 웹툰을 찾아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개인 시간이었고, 아이가 둘일 때는 그마저도 화장실을 가거나, 둘째 낮잠을 재우는 짧은 시간에 가능했다. 나는 추레하고 비생산적인 내가 정말 한심했고 때로는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이런 나도 거기서 말하는 '빛나는 존재'가 맞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간절히.


나는 비록 온라인이지만, 이 프로그램을 통해 나와 비슷한 시간을 관통하고 있거나 있었던 누군가를 만난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말 없는 위로였기에. 뒤늦게 내가 참석할 프로그램이 '비폭력 대화'라는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이것이 착하게 말하는 기술을 배우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덜 착하게 사는 법, 그러니까 지금보다 조금 더 폭력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느끼곤 했기 때문에 이 주제가 마뜩잖았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사기를 당한 것 같았다.


타인이 느낄 수치심이 내 것 같아 그의 허점이 눈에 훤할 때도, 심지어 그것에 내게 손해가 된다 해도 할 말을 자주 속으로 삼키는 내가 이제는 돈까지 주고 착하게 말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니! 억울하고 분했다. 이런 프로그램은 내가 아니라, 타인에게 무감각하고 눈치 없는 다른 사람들의 몫이어야 했다. 프로그램의 정확한 정보가 주어졌다면 절대로 신청하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나의 예상과는 달리, 나는 프로그램에 이 참석하면서 '비폭력 대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연민의 눈으로 나와 상대를 바라보고 편견과 판단을 배제한 체 나누는 비폭력 대화는 아름다웠다. 감히 말하자면 그것은 신적인 대화였다.


더 예상치 못했던 점은 내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글'을 쓰겠다는 욕망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바로 '숙제' 때문이었다. 이것은 나를 향해 불어오는 의미 있는 첫 번째 우연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첫 번째 숙제는 나의 장점 50개, 단점 50개를 쓰고 짝꿍과 교환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글을 읽고 자신이 생각하는 상대의 가장 좋은 점 세 가지를 뽑고 그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내가 숙제로 쓴 글은 짧은 비문이었다.


다음은 그중 일부이다.


내가 꼽은 당신의 장점 No.3 : 기도하는 사람이다.

이유: 변화를 믿는 사람, 1인칭이 아닌 2인칭+3인칭의 관점으로 세상과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 삶의 모든 순간이 우연이 아니라 신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믿는 사람,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 은혜를 누리는 사람, 삶의 관심과 영향이 나에게서 세상으로 넓어지는 사람, 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 삶의 풍파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


나는 상대가 적은 50개의 단점에 그것이 아닌 이유도 일일이 적어야 했다. 예를 들어 물건을 쉽게 잃어버리는 것이 자신의 단점이라는 상대에게 '잃어버려 새것을 사는 당신 덕분에 경제가 순환된다. 누군가는 그 덕에 먹고산다'라고 답했다.


나는 이 숙제를 하면서 나에게 '하나의 사실을 다양한 방면으로 검토하고 재해석하여 글로 표현하는 재능'이 있음을 느꼈다. 미처 깨닫지 못했었는데, 나는 말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편안하고 좋았다.



사실 나는 지독한 활자 중독자였다. 아이를 낳고 일 년에 한 권의 책을 겨우 읽었으나, 그전에는 참 징하게 읽어댔다. 읽던 책을 놓을 수가 없어서 책을 손에 들고 읽으며 길을 가기도 했고, 쉬는 날에는 혼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잔뜩 빌려 집에 틀어 박인 채 하루 종일 책만 읽었다. 첫째 아이를 낳고 바닥에 아이를 내려놓을 새 없이 젖을 먹이고 재울 때면 천장에 글이 상영되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도 글이 좋았다.


더구나 마이클 잭슨이 춤을 출 때 빠졌다는 무아지경의 상태를 나는 책을 통해 경험하곤 했다. 소설가가 창조한 세계에 몰입할 때 나는 시공간의 재배열, 물질과 정신의 혼합, 삶과 죽음의 화해를 느꼈다.


책 속에서 아름다운 문장을 만날 때면, 잔잔한 기쁨에 내 속에서 찰랑거렸고. 소설가가 나열한 언어의 조합에서 인생의 비밀을 엿볼 때마다 거센 파도처럼 달려드는 만족감이 나를 덮쳤다. 나는 글자 사이의 여백과 검고 붉은 글자의 직선과 곡선에서 충만했다. 즐거운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약간은 자기 학대적인 나는 책에서 내가 아는 것 중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쾌락을 발견했다. 그것은 내게 지극한 위로였다.


무엇보다 나는 미친것처럼 지치지 않고 하루 종일, 신물이 날 때까지 책을 읽으며, 작가의 언어 이상의 세계까지 선명히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다른 영혼 되기를 기꺼워했다. 훌륭한 작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우연한 기회로 나의 재능을 발견한 나는 '쓰는 삶'에 대한 은근한 소망에 시달리면서도 글 쓰는 방법을 배운 후 쓰겠다며 진짜 '쓰는 삶'은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쓰는 삶'은 지적이고 추론적인 과정을 통해 도출한 적정 형태의 삶은 아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직관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도 '쓰면서 생계도 잇는 삶'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머리를 맴돌았다.


당시 복직 문제로 상담을 하던 보배 코치님은 '쓰는 삶' 주위를 뱅뱅 맴돌면서도 쓰지 않는 이유를 물었고, 나는 완벽하게 잘 쓰지 못하는 나의 두려움을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완벽하게 잘 쓰는 순간'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복직에 대한 두려움으로 받았던 코칭의 귀결이 쓰는 삶이라니!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이것이 필연 같은 두 번째 우연이었다.


나는 '완벽한 때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글을 썼다. 나의 글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글'임에는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글쓰기 그 행위 자체를 통해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았다.


나는 내가 깨닫지 못하는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던 것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이들 재우다 함께 잠이 든 새벽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화면에 글을 채우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이때쯤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내가 만난 세 번째 운명 같은 우연은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했던 아난다 아카데미의 공간 살림 세레머니였다.


나는 공간 살림 세레머니라는 수련을 통해 하루에 3개의 물건을 비우고, 3개의 기쁨을 찾으며 내 공간에 군더더기가 있는 것처럼, 내 삶에 그런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나'의 군더더기를 덜어내기 위해 살림을 하고 공간을 치우며 나의 두려움, 불안, 슬픔, 욕망, 기쁨을 구체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본질에 치우쳐 대게는 실존하기에 실패하는 나는 물질의 세계로 환원한 내면의 세계를 몸의 감각으로 느끼고 비우고 채우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나는 내가 느끼는 사소한 기쁨에 대해 명상을 통해서 내가 나의 삶의 방향을 재정비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서 내 삶을 잠식한 거짓 기쁨과 거짓 만족을 덜어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침 아난다 아카데미에서 그달 선정한 독서회 모임의 책이 '인디 워커 이제 나를 위해 위해 일합니다'였고, 책의 도움을 받아 복직이나 퇴직의 명분을 찾고 싶었던 나는 '느린 독서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것이 네 번째 우연이 되어 나를 깊고 깊은 인생으로 끌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복직을 하겠지만 결국엔 소설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독서회를 통해서 사이버 대학교 문예 창작학과에 편입을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느끼는 몰입과 황홀감 그리고 내 재능이 가리키는 곳이 바로 그 지점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는 복직으로 얻게 될 3년의 유예시간 동안 내가 얻게 될 것은 다음과 같다고 계산했다.


첫 번째, 나는 직장에 복귀하고 남편은 육아 휴직하므로 남편이 가장되는 가부장제를 탈피한다. 나는 여성의 삶에 대해 쓰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그것은 세대를 거친 불합리에서부터 연유한 소망이다. 나는 복직을 통해 현대 여성의 지위의 변화를 삶으로 상징화하고, 이 삶에 대해 일상의 언어로 표현한다.


두 번째, 나는 복귀 후 신규와 같은 지위가 됨으로, 삶 앞에서 안간힘을 다해 서 있는 한 인간이 된다. 이상의 세계만으로는 진실한 글을 쓸 수가 없다. 진짜 글은 삶에서 나온다. 나는 내 삶의 경험으로 독자를 설득한다.


세 번째, 나는 여태껏 정신과 병동에서만 일했기 때문에 상징적인 죽음과 삶에 대해서만 알지, 실제는 환상의 영역 안에 있다. 복귀하면 아마도 나는 진짜를 보게 될 것이다. 폐쇄적인 의료환경이므로 일반 작가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을, 삶과 죽음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기회를 갖게 된다.


네 번째, 내가 직장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첫째 아이는 9살, 둘째 아이는 6살이 된다. 나는 첫째가 학교, 둘째가 유치원에 감으로 갖게 될 개인 시간에 집중하여 글 쓰는 시간을 가진다.


구본형은 그의 저작 깊은 인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연의 모습으로 찾아오는 결정적인 순간들, 누구도 계획하지 않았지만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이 순간들을 우리는 '운명적 사건'이라고 부른다. 마치 누더기 옷을 걸친 신의 화신과의 조우처럼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제대로 살게 될 것인지를 일깨우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사건은 이렇게 우연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우연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 만남이 된다. 성감대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 우연에 민감하게 반응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우연은 그저 우연으로 지나가고 말 것이다. 오직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만이 자신에게 다가온 우연을 인생의 변곡점으로 잡아둘 힘을 가지게 된다."


작가의 말처럼 나처럼 평범한 아줌마가 소설가를 꿈꾸게 된 이 모든 일이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필연적 만남이다. 내가 이 운명의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모든 우연은 사실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시간에서, 공간에서, 에너지에서, 모든 종류의 사상과 지식과 감각과 감정에서.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부모님, 그런 유년 시절, 그런 친구들, 그런 사랑, 그런 어리석은 순간들이 운명처럼 있어야만 했다.


나는 비폭력 대화를 배우다가 글 쓰는 삶에 다가갔고, 공간을 치우다가 소설가의 삶에 연정을 품었으며, 독서회에 참여했다가 문예창작학과에 편입했다. 내 인생의 인드라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직장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은 사실 속으로 적당히 단념했기 때문 아닐까?

나는 복직함으로 진짜 삶에서는 멀어진 채 적당히 손쉬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 아닐까?

나는 복직 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써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또 본질 어쩌고 하면서 실존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내 주제에 너무 큰 꿈을 꾸는 것 아닐까?

내가 온갖 물리법칙이 존재하는 진짜 삶을 무시하고 진공 상태의 이성, 그러니까 사변적인 과정을 통해 도출된 희망찬 결론에 너무 들뜬 것은 아닐까?


나의 불신에 구본형 작가는 이렇게 답한다.

"인생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스스로 모색해라. 헌신하고 모든 것을 걸어라. 그러나 그 길이 아니라 하더라도 실망하지 마라. 앞에 다른 길이 나오면 슬퍼하지 말고 새 길로 가거라. 어느 길로 가든 훌륭함으로 가는 길은 있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내가 직장 복귀를 하던 그렇지 않던, 삶은 내게 훌륭한 다음 코스를 제시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그 운명에 대한 나의 태도다.

내가 할 일은 내 안의 진실을 믿고 행동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진실을 말하겠다.


나에게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과거와 심연을 긁는 슬픔과 진흙탕처럼 질척이는 우울이 있다.

나는 이 진지한 감수성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통해 인간 삶의 진실을 드러낼 것이다.

이 재능이 나의 필체를 만들고, 이야기를 짓고, 사람들을 끌어당길 것이다.

나는 과거의 한계 안에 웅크리고 있는 나와 싸워 이길 것이며, 그냥 글이 아닌 진짜 좋은 글을 쓸 것이다.

나는 믿는다. 나는 이 일을 위해 태어났고, 이 일에서 궁극의 기쁨을 느낄 것임을.

나는 믿는다. 내가 신에게 헌신했듯, 은유와 비유, 상징에 헌신할 것임을.

그리고 나는 간절히 믿는다.  나의 진실이 당신의 진실될 것임을.


아! 나는 지금 운명의 한 복판을 살고 있구나!

나는 나의 신화를 쓰고 있었어!

그래, 지금도 여전히!



아난다 아카데미의 느린 독서회에 참석하여 한 달 동안 구본형의 깊은 인생을 읽고 쓴 에세이입니다.

저마다의 깊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의 꿈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꿈은 스스로를 닮아 있었습니다.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실을 붙들고 테세우스가 미궁에서 빠져나왔듯 우리는 이 꿈을 붙잡고 깊은 인생 한 복판으로 걸어갑니다. 그리고 결국 신화를 살아냅니다.


참 아름다운 한 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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